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45화 (641/925)

85. 기청제 (9)

은광고의 하늘, 용왕신의 무녀들이 부른 구름 속.

같은 얼굴을 한 두 소년, 풍백과 우사가 구름에 걸터앉아 기설제(祈雪祭)를 지내고 있었다.

풍백은 사물을 비출 때마다 바람 소리가 울리는 거울을 들었고, 우사는 두드릴 때마다 빗소리가 퍼지는 북과 북채를 들었다.

풍백과 우사 사이에는 넓고 깊은 흰 그릇이 놓여 있었다.

두 소년이 각자 거울을 향해 기도를 드리고 북채를 휘두를 때마다 그릇 위로 눈송이가 쏟아졌고, 그릇에 담긴 삿된 기운을 머금은 눈은 쌓이다가 넘쳐서 구름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들이 내리는 삿된 눈은 은광고에 닿지 못했다.

여의보주가 발현한 기적 탓이다.

“아직도 유희계 용이 버티고 있어?”

“응, 웅족들이 용제건을 못 죽였나 봐.”

“이번엔 번민의 곰도 있잖아! 무능하긴. 이럴 줄 알았으면 미친 곰을 끼워 넣자고 할걸!”

“미친 곰들은 명령을 잘 안 듣잖아. 시키는 대로 진(陣)을 설치하지 못할 거야.”

풍백의 대답에 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풍백이 한 말대로, 진웅팔선 중 미쳐 있는 웅족은 강력한 힘을 지녔으나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실성한 웅족들이 모습을 감추고 은광고 곳곳에서 진(陣)을 설치하는 등의 섬세한 작업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陣)이 모두 설치되면 신역에 흐르는 지맥을 제어하고, 지력의 흐름을 바꿀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지력의 제어권은 일시적으로 우리에게 넘어올 거야.”

“그럼 지력을 이용해 이 성가신 결계와 기적을 지울 수 있겠구나!”

풍백의 설명에 우사가 밝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들의 부하들이 모습을 숨기고 은광고 곳곳에 진(陣)을 설치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신역의 주인인 호족들이 지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둘째는 지력을 이용해 12지 결계를 완전히 부수기 위해서였다.

현재 12지 동맹의 결계를 일시적으로 망가뜨려 뒀으나 여전히 결계는 그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었다.

그 많은 진족들이 동시에 은광고에 침입할 수 있었던 건 우족의 수장이 결계에 가한 기습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현시점에선 우족의 수장은 결계에서 떨어져 은광고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기에 또 다른 진족을 투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또, 결계는 어그러져 학생을 가두는 감옥이 되었으나 동시에 외부의 이능독을 차단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최종적으로는 이 결계를 없애 버리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이번 일로 호족은 12지 동맹에 불신을 품을 테니, 결계를 수복하거나 새롭게 만들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지력의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력이 오는 게 좀 늦다. 혹시 지력이 전부 네 쪽으로 간 거야?”

“아니, 아무 힘도 오지 않았는데.”

구름 속에서 삿된 눈을 부리는 데에 온 힘을 쏟던 풍백과 우사는 알지 못했다.

은휘관에서 안중지계 천동하가 ‘건곤(乾坤)을 품은 눈’으로 은광고 전체를 관찰하여 그들의 움직임을 모두 꿰뚫어 보았다는 것을.

아무리 모습을 감추고 신중하게 행동하여도 천동하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천동하는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조의신과 은호의 부탁을 받아 이번 일에 조력하였다.

천동하는 진족이 침입하기 전, 은광고 전체의 모습을 샅샅이 살폈다.

적이 침입하기 전의 모습을 온전히 기억하여 나중에 위화감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비유를 하자면 은광고 전체를 두고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방대하고 광활한 은광고의 규모를 생각하면 말 그대로 눈이 돌아갈 일이었으나, 천동하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천동하의 지시 아래에 지상에서 진(陣)을 설치하던 진족들은 호족에 의해 토벌되어 갔다.

풍백과 우사는 일에 착오가 생겼음을 어렴풋이 느꼈으나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풍백과 우사의 발밑에는 오도 가도 못하는 제물 후보들이 넘쳐났고, 그들은 공격받지 않는 안전한 위치에서 강력한 권능으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었으니까.

“눈을 더 뿌리자. 눈이 더 두껍게, 많이 쌓이면 여의보주의 기적이 무너질 거야.”

“그래, 삿된 눈을 뒤집어쓰면 누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을 거야. 게다가 밑에는 제물 천지잖아.”

“맞아, 삿된 눈을 맞고 에너미에게 죽는 사람이 생기면 기설제가 더 수월해지겠지.”

풍백과 우사가 다시 기설제를 시작하자 흰 그릇에서 눈이 넘쳐났다.

그들이 모시는 자가 직접 내린 흰 그릇에는 그자가 새긴 문자와 그림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한 획, 한 획에는 그자가 지금까지 거두어 온 제물들의 최후, 죽음이 묻어 있었다.

타락한 풍백과 우사가 부르는 눈은 이미 삿된 존재였는데, 저 그릇의 힘이 더해지니 피부에 닿기도 꺼려질 만큼 간악한 힘을 머금었다.

풍백과 우사가 여의보주의 기적 위로 한창 삿된 눈을 퍼붓고 있을 때였다.

“……!”

“아!”

둘은 갑자기 벼락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고 움직임을 멈췄다.

풍백과 우사는 기설제를 멈추고 허둥지둥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둘의 팔에는 방금까지 없었던 상흔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 대검으로 얕게 그어 낸 듯한 자국이었다.

그 자국에는 선하고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타락한 존재들, 지금의 풍백과 우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 정화 의식을 하고 있어!”

“하늘에서 가까운 위치일 거야, 찾아볼게!”

풍백이 거울을 조작하여 땅 아래를 비추었다.

풍백이 비춘 곳은 은광고 중에서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천익산이었다.

한때 이 땅에서 제사를 주관한 풍백과 우사답게 그들은 천익산에서 가장 맑은 기운이 모인 곳, 바로 천단수 앞을 짚어 냈다.

“천단수 앞에 누가 있다!”

천단수 앞, 누군가가 검무를 추고 있었다.

그자는 한 손에는 대검을, 다른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었다.

그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거울에 입가가 조금 비추어졌다.

마치 그자는 이쪽을 꿰뚫어 본 것처럼 입꼬리를 들어 수상하게 웃고는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파직!

“크윽……!”

풍백이 들고 있던 거울에 실금이 갔다.

그자가 대검을 휘둘러 날린 맑은 기운을 거울로 막지 않았더라면, 또 피부에 상처가 남고 말았을 것이다.

풍백은 그제야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기청제다. 저자는 지금 눈을 그치게 하고, 우리에게 벽사(辟邪)를 시도할 생각인 거야!”

“대체 누가? 백호는 천신에게 밉보여서 힘을 봉인당했잖아. 누가 감히 우리를 상대로 벽사를 하는데!”

“지금 휘두르고 있는 검은 백호의 것 같은데…… 잘 안 보여! 저자의 이능파로 덮여 있어!”

우사의 말대로, 지금 호족 중에선 그들을 상대로 벽사를 할 만한 이가 없었다.

굳이 꼽자면 죽호 정도가 후보에 들어가겠으나, 죽호는 벽사에 능하지 못했고 죽림 밖에서 이런 힘을 낼 수 없었다.

풍백과 우사는 기청제를 하는 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금이 간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러나 신령한 힘을 머금은 오색의 옷깃이 그자의 모습을 감추고, 옷깃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까마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대체 저자는 누구지……?”

거울 너머의 천단수 앞에서 기청제를 하는 인물은 바로 조의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의신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없었다.

역대 가장 강력한 용왕신의 무녀가 될 재능을 타고난 윤여랑의 광림으로 부른 오색 옷깃이 삿된 자의 시선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거울을 조작하던 풍백이 제안했다.

“그분의 힘을 빌리자!”

“그래!”

풍백은 거울을 들어 삿된 기운이 가득한 그릇에 올려 둔 후 이능파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그릇에 남아 있던 눈이, 그릇에 새겨진 것들이 거울 안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갔다.

쩌적, 쩌저적…….

실금이 생긴 거울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모습을 되찾고, 거울 너머의 그자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신령한 옷깃이 방해되었으나 어느 정도 그 모습이 확실히 보였다.

조의신의 실루엣과 그가 휘두르는 대검의 이능파 색을 똑똑히 본 풍백이 단언했다.

“이자는 호족이 아니야. 호족들 중엔 저런 새까만 이능파를 지닌 자가 없어. 그리고 좀 어려 보여.”

“호족이 아닌 데다 어려 보인다고? 강력한 벽사 스킬을 지닌 학생일지도 몰라!”

“학생 중에 이런 자가 있었다니…… 잠깐, 그분께서 경계하시던 은광고의 학생 중에 검은 이능파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었어.”

“그럼 저자가 그 학생인가 보네! 호족이 아닌 진족이라면 겁도 없이 천단수 앞에서 칼춤을 출 리가 없으니까!”

풍백과 우사는 기청제를 하고 있는 자가 호족이 아니라 단정 지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더라도 호족의 신역 중심에서 칼을 휘두른다는 건 호족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족이라면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몸을 사릴 것이다.

이들은 멋도 모르는 학생이 벽사 스킬 하나를 믿고 기청제를 올리고 있는 거라고 판단했다.

“벽사는 쓸 만하지만, 전투 능력은 어떨까? 우리를 상대할 수 있으려나?”

지이익!

우사가 바닥을 향해 손을 휘두르자 구름이 둘로 갈리고 바닥이 보였다.

우사는 직접 내려가 조의신을 쓰러뜨릴 생각인 듯했다.

풍백도 기청제를 막기 위해선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판단했으나, 일단 그를 말렸다.

“아니, 함정일지도 몰라. 적호가 적연을 쓰고 숨어 있을지도 모르잖아?”

당장이라도 밑으로 뛰어내릴 기세였던 우사가 풍백의 말을 듣고 멈춰 섰다.

이 땅에서 제사장을 맡았던 두 사람의 힘이라면 호족 몇 명 정도는 거뜬히 상대할 수 있긴 했지만 이곳은 호족의 영역이다.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건 자제하라며 그들이 모시는 자도 당부했었다.

그 변수 중의 하나가 적연으로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적호의 존재였다.

적호가 다른 호족들과 함께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기습을 가할지도 모르니 경계해야 했다.

풍백은 거울로 천단수 주변을 비추며 말했다.

“주변에 호족들이 있나 없나 확인한 후에 움직이자. 그래도 늦지 않아. 저자가 혼자라면 말이지. 우리에게는 강력한 원군도 있고.”

조의신을 노려보는 풍백이 구름을 자아내고 있는 힘의 원천을 가리켰다.

그 원천의 정체는 진주였다.

오색의 빛을 머금은 진주는 용왕신의 무녀들이 조력을 위해 제공한 것이었다.

풍백은 조심스럽게 오색 빛의 진주를 손에 쥐며 말했다.

“용왕신의 무녀가 만들고 우리의 힘이 더해진 구름 아래에서 거울로 비추면, 적호의 적연도 꿰뚫어 볼 수 있겠지. 신중하게 움직이자.”

오색 진주를 든 풍백은 거울로 조의신의 주변을 비추었다.

조의신으로부터 백 걸음 떨어진 곳까지 살펴봐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천익산 전체를 살펴봐도 호족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살펴보는 사이에도 조의신의 검과 기운이 그들의 몸에 생채기를 남겼으나, 풍백과 우사는 고통을 참고 집요하게 주변을 살폈다.

“호족은 없어. 그냥 어리석은 학생이 혼자 왔나 봐.”

풍백이 확신하여 말하자 우사가 구름을 크게 갈랐다.

풍백과 우사는 구름 밑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소년의 모습을 한 두 사람은 삿된 살기를 품고 있었다.

“감히 우리의 눈을 멈추게 하려는, 기청제를 올리는 자를 없애 버리자.”

그들의 살기가 쉼 없이 검무를 추는, 무방비한 상태의 조의신에게 향했다.

돌아가기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46)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