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47화 (643/925)

85. 기청제 (11)

맹수가 포효하는 소리가 하늘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러다가 하늘이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먹먹해지는 소리였다.

현재 나는 한쪽 귀에서 피가 계속 흐르고 있는 상태라 저런 소리를 들으면 귀가 아플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저 소리는 내게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들으면 들을수록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 포효가 풍백과 우사의 힘이 담긴 북소리를 막아 주고 있구나.’

저 포효가 울려 퍼지는 한, 풍백과 우사의 북소리는 내게 닿지 못한다.

이 포효의 정체는 황지호가 둔 수인 듯했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아직 움직일 수 없었다.

벽사 의식은 끝나지 않았고 풍백과 우사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멀리서라도 그 모습을 보기 위해 검무를 추던 발끝을 소리가 들린 쪽으로 움직였다.

기청제가 중단되지 않을 정도로만 시선을 돌려 그 모습을 살폈다.

오색 옷깃 사이로 포효의 근원이 보였다.

‘호랑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호랑이가 천단수의 그림자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여태까지 저 새하얀 호랑이는 그림자 속에서 몸을 감추고 있었던 것 같았다.

천단수가 큰 편이긴 하지만 저 거대한 범이 털끝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숨는 데에 이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저 새하얀 호랑이는 그림자에 녹아 있었던 것 같았다.

‘백호군은 아니야.’

새하얀 호랑이를 보자마자 떠오른 건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 백호군이었다.

그러나 플마고 속 백호군이 범의 모습을 한 것과는 달랐다.

하늘을 노려보는 매서운 눈과 이빨을 드러내어 위협하는 입매는 전부 내가 기억하는 백호군과는 달랐다.

가장 다른 점이 있다면 저 새하얀 호랑이가 머금고 있는 이능파의 색이었다.

새하얀 호랑이가 두른 이능파는 천단수의 나뭇잎 빛깔, 천익산의 초목의 색과 같았다.

등장하는 모습도 그렇고, 마치 천익산의 화신 같았다.

그때, 하늘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호랑이? 호족이야?”

“진족이 아니야. 이 정도로 힘을 회복했을 줄이야……!”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늘에 떠 있는 두 명의 소년이 보였다.

높이 떠 있어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들은 독특한 복식을 갖추고 있었다.

소년들은 마치 제례를 주관하는 제사장이 입을 법한 옷차림에 각각 북과 거울을 들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저 소년들은 먼 옛날 함께한 호족과 신인을 등지고 흑막을 택한 배신자, 풍백과 우사였다.

크르르르!

풍백과 우사를 발견한 새하얀 호랑이가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겁을 먹고 주변의 공기가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살벌한 포효였다.

지상으로 하강하던 풍백과 우사를 움찔하게 만들 정도였다.

“우리가 누군지 알고 소리를 지르는 거야?”

“알아보고 그랬든, 아니든 어리석어!”

저 호랑이 때문에 잠시 멈춰 선 게 굴욕이었는지, 풍백과 우사가 새하얀 호랑이를 향해 살기를 날렸다.

그에 지지 않고 호랑이가 다시 포효하며 그들을 위협했다.

그 포효하는 모습을 응시하던 중, 새하얀 호랑이와 눈이 마주쳤다.

거대한 맹수의 눈에선 용맹한 기운이 넘쳐 흘렀다.

속으로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는데, 어쩐지 새하얀 호랑이는 나를 보자 눈썹을 내리며 기가 죽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나와 아는 호랑이인 것처럼 굴었다.

그 순간 갑자기 당장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이건 이 세계에 와서 몇 번 느껴 본 거대한 감정이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착하고 멋진 천재이자 천사에게서 느낀 감정이었다.

‘설마, 저 호랑이는…….’

신화 속 존재, 풍백과 우사와 맞서 싸울 정도로 용맹하고 강한 존재.

그들의 눈을 속여 천익산에 녹아들 수 있는 존재.

호족과 깊은 연이 있으나 호족이 아닌 존재.

‘그런 존재를 여태까지 흑막이 내버려 뒀을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흑막이 노렸으나 살아남은 존재.

그러면서도 나를 걱정할 만한 다정한 존재.

이 사실을 종합해 봤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새하얀 호랑이, 호족의 신수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 줄곧 신경 쓰였던 하얀 솜뭉치를, 조금 커지고 세고 근사하고 아름답고 멋있는 모습을 봤다고 바로 알아보지 못하다니.

미안함과 동시에 벅찬 감동이 솟아올랐다.

“……올무야.”

내 말에 답하듯이 올무가 눈을 깜빡였다.

나는 올무를 늦게 알아봤는데!

바로 알아보지 못한 어리석고 멍청하고 못된 나를 상대로 저렇게 답해 주다니!

올무는 작고 귀엽고 완벽한 천사일 뿐만 아니라 크고 강하고 천재적인 전사이기까지 했다.

크르르? 크르르르……!

착한 올무가 갑자기 지옥에서 들릴 법한, 아니, 전쟁터에서 싸우는 용감무쌍한 전사가 내지를 듯한 소리를 내었다.

올무의 시선이 내 귓가에 닿은 것 같기도 하다.

피를 보고 착하고 강한 올무가 놀란 것 같았다.

기청제만 아니었으면 냉큼 피를 닦아 내고 올무를 안심시켜 줬을 텐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크르르르! 커컹!

“으으…… 귀가, 아파!”

“조금만 참아. 사정권에 들어가면 이 손으로 호족의 신수를 죽여 줄 테니까!”

우리 올무가 좀 포효했을 뿐인데 풍백과 우사가 엄살을 떨며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게다가 감히 우리 올무를 어찌 해보겠다며 협박까지 해 댔다!

올무는 지지 않고 소리를 높이며 발톱을 세웠다.

풍백과 우사는 살기등등했지만, 우리 올무도 지지 않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천재적인 올무가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방비한 상태인 내가 방해가 될지 모른다.

신화 속 존재가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르니 걱정되었다.

‘올무는 착한 천사니까 나를 걱정해서 감싸다가 다칠지도 몰라. 그러니까…… 마지막 수를 둬야 해!’

아직 기청제는 한참 남았다.

쌓인 눈의 양이 워낙 많고, 삿된 눈을 내리기 위해 수많은 악의가 모였다.

사실 처음부터 나 혼자만의 힘으로 눈을 멈추고, 진령(鎭靈)으로 악의의 정체를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풍백과 우사에게 공격을 당해서 그런지, 이능파의 소모는 점점 극심해지고 있었다.

귓가에 흐르는 피를 이능파로 지혈하고 기청제를 지속할 여유가 없을 만큼.

‘조금만 더……!’

풍백과 우사가 느리게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들이 좀 더 가까이, 이 땅 위로 내려올 때까지 버텼다.

내 수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풍백과 우사가 땅에 가까이 내려와야 했지만, 그들이 가까이 온다는 건 동시에 그들의 공격이 더 거세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결국 풍백과 우사는 땅에 발을 디디고 올무와 격돌하게 되었다.

크르르르!

“우리에게 발톱을 세워? 발부터 잘라!”

“나는 그사이에 목을 따 주지.”

그들의 손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칼이 들려 있었다.

그 칼날에는 각각 ‘풍백(風伯)’과 ‘우사(雨師)’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이 신화 속에서 제사를 올릴 때 쓰는 제의 도구 중 하나였는지, 칼날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때, 풍백과 우사의 시선이 잠시 내 쪽에 멈췄다.

“……진족? 학생 중에 진족이 있다고?”

“은광고에는 용족의 후예가 재학 중이니 어딘가의 진족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긴 한데, 호족이 아닌 진족이 천단수 앞에서 감히 칼을 휘두른다고?”

지금 나는 가면을 쓰고 있긴 하나 겉보기에는 조의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윤여랑과 백호군의 광림을 동시에 사용하는 중이다.

그러니 백호군의 힘으로 인해 내가 진족이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데…….’

내가 이 세계에서 겪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지식과 그들의 말 사이에는 묘한 모순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진족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신수부터 처리하고 알아내면 돼.”

그들의 칼날이 올무를 향했다.

동시에 내 수가 완성되었다.

‘모든 수가 생각대로 자리에 배치되었어. 마지막 피스를 움직이면 돼.’

기청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풍백과 우사, 용왕신의 무녀들을 상대해야 한다.

신화적 존재들을 홀로 이기는 건 어렵다.

기습을 가하거나 사전에 수를 쓴다면 가능성이 오르겠지만, 이번에는 그게 어려웠다.

저들은 눈을 내리기 위해 기설제를 지내고, 나는 눈을 멈추기 위해 기청제를 올린다.

사실상 정면 승부나 다름없었다.

하늘을 향해 정화와 벽사를 해야 하므로 몰래 한다는 선택지도 택할 수 없었다.

대놓고 호족이나 다른 진족을 앞세워 눈을 막아 버리면, 그들의 단서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저들을 끌어내기 위해 혼자 움직이면서도 동시에 저들과 힘 대 힘으로 부딪쳐 승리할 힘이 필요했다.

그 결과, 나는 그 수를 택했다.

―풍백과 우사는 호족에 관해 잘 알잖아. 그러니 내가 호족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보겠지. 호족이 아닌 다른 진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거야. 벽사 의식을 하려는 은광고 학생이라고 결론지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겠지. 너와 같은 색의 이능파를 지닌 호족은 없으니 이능을 사용한 순간 바로 그렇게 생각할 거다.

황지호는 내가 수를 생각해 낸 걸 알아챈 건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또 직접 알아내겠다며 잠시 말을 끊었으나 황지호는 도통 감을 잡지 못했다.

아마 내가 무슨 수를 제안한 건지 생각도 못 하는 것 같다.

이 수를 완성하기 위해선 황지호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한데 생각도 못 하고 있는 걸 보면 좀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황지호가 기대에 찬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잘하면 허락해 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제안했다.

―그 허점을 노리기 위해서 허락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 연습할 때 도와주면 더 좋고.

―무엇을 제안할 생각이지? 허락? 연습? 거기에서 더 위험해진다면 허락하기 어렵군.

―위험해지진 않을 거야, 아마도.

―‘아마도’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만…… 그래도 말해 봐라.

답을 찾아내겠다고 머리를 굴리다가 해결책을 찾지 못한 게 내키지 않은 듯, 황지호는 조금 시큰둥했다.

그래도 내가 어떤 수를 제안할지 기대하는 것 같았다.

―내가 지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줘.

황지호는 상상도 못 한 듯 내 말을 듣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지력을 사용한다고?

지력은 진족이 아닌 존재는 유효하게 다루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진족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그것도 이 땅에서 신화에 이름을 남긴 신화계 호족, 백호의 힘을.

―알았다, 조의신. 네가 이 땅에서 지력을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고, 돕겠다.

황지호는 놀란 얼굴을 금세 기대에 찬 듯한, 아니, 묘하게 기뻐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꾸고 눈을 반짝이며 내 수의 완성을 도왔다.

그 결과, 내게는 지력을 사용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파아아…….

“잠깐, 저게 뭐야. 황호의 힘……?”

“어째서, 저기에……!”

황지호가 내 손목에 새긴 허락의 증거로, 내 손목에서 황금빛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호족의 수장이자 신역의 수호자가 내게 지력의 사용을 허락하고, 이를 돕겠다는 의지가 들어간 문장이 지금 내 손목에 있었다.

황금빛 기운은 손목을 타고 올라가 내 이능파 색으로 덮인 백아를 뒤덮었다.

백아를 휘두를 때마다 천익산의 모든 지력이 반응했다.

“지력이다……!”

“호족이 아닌 존재에게 지력의 사용을 허락했다고? 황호가?”

“저자의 손목에 새겨진 인장을 봤어! 저자부터 없애야 해!”

크르르르!

풍백과 우사가 뒤늦게 올무를 노리는 대신, 나를 노리려 했으나 올무의 포효 앞에 가로막혔다.

그사이에 나는 지력을 더 끌어올렸다.

한반도에서 지력이 가장 충만한 은광고.

그중에서도 천익산의 천단수 앞.

그 앞에서 지력을 끌어다 쓰는데 제아무리 신화 속 존재라고 해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휘이이이……!

백아가 움직이는 대로 지력이 조용히 바닥에서 차올랐다.

백아의 칼날과 전신이 지력으로 충만해 있었다.

나는 내게 흘러들어 온 지력을 은광고의 적을 향해 휘둘렀다.

삿된 눈을 뿌린 풍백과 우사를 향해.

그리고 은광고를 덮은 구름을 향해.

콰아아아아아!

지력이 담긴 일격은 풍백과 우사를, 그리고 구름을 향해 솟구쳤다.

지력이 하늘에 닿자 마치 기다린 것처럼 용제건의 기적은 옅어져 그 위에 쌓인 눈이 쏟아지려 했다.

하지만 그 눈은 더 이상 삿되지 않았다.

은광고를 덮은 구름이 흩어지고 눈이 휘날렸다.

그 눈은 내 이능파 색,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돌아가기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4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