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검은 눈 (2)
은광고 조경 구역, 청랑호 주변.
호족들이 지력이 움직이고 하늘에 빛이 쏘아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그 힘을 발현한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빛의 중심은 천익산이었고, 천익산에는 호족의 은인이 있었으니까.
“신수가 옆에 있었다고 하나 이건 은인이…….”
“호족의 은인께서 그 삿된 눈을 홀로 멈추게 한 건가!”
조의신의 안위를 걱정하던 호족은 할 말을 잃고 하늘을 바라봤다.
곧 하늘에서 검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평범하지 않은 눈의 색에 일순 경계한 호족도 있었으나 곧 그게 조의신의 이능파 색이라는 걸 알고 기꺼이 눈을 맞았다.
검은 눈에는 삿된 기운은 조금도 없었다.
검은 눈이 피부에 닿아도 녹아 버리는 게 아니라 눈송이가 품은 이능파와 함께 사라져 버렸기에 차갑거나 질척이지도 않았다.
호족들은 난생처음 보는 눈과 풍경을 즐겼다.
“조의신의 계획대로 됐군요, 백호.”
적호가 백호에게 말을 걸었다.
백호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처럼, 흔들림 없이 가만히 서서 검은 눈을 맞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조의신을 향한 백호의 굳건한 믿음과 신뢰가 느껴졌다.
‘나도 조의신을 믿긴 했으나 저 정도로 침착할 만큼 믿음이 깊지 못했다. 반성해야겠군.’
적호가 속으로 작게 반성하고 있을 때,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위화감을 느낀 건 백호의 얼굴이었다.
백호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아니, 잠깐 백호가 지금 웃는 건가?’
백호는 좋은 친우였으나 말수가 적고 다른 이들과 말을 쉽게 섞지 않을 정도로 오만하다고 오해를 사기 쉬웠다.
먼 옛날 백호는 실제로 그의 무력만큼 오만했기에 오해가 아니었으나, 현대에 이르러 백호는 많이 변했다.
신역의 수인이 된 여파인지 몰라도 백호는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그는 오만함을 비롯한 모든 감정이 결여된 것처럼 굴었다.
그런 백호가 희미하게나마 웃고 있으니 적호가 놀랄 법했다.
적호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그러나 백호가 웃은 건 잠시뿐이었다.
‘어?’
갑자기 무표정으로 돌아온 백호가 고개를 돌렸다.
하늘 대신 그가 바라본 곳은 천익산 쪽이었다.
백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적호는 말을 걸었다.
“이제 저희도 다음 수를 위해 움직여야겠습니다. 황호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거기에 맞추는 게 좋겠군요.”
“적호.”
백호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들렸다.
적호가 뭐라고 말을 덧붙이기 전에 백호가 말했다.
“나는 잠시 따로 움직이겠다.”
“네?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
백호는 적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백호의 하얀 신형이 검은 눈 사이로 사라졌다.
* * *
천익산 천단수 앞.
백아의 칼날을 따라 지력이 쏘아진 직후.
지력의 여파로 주변이 초토화될 가능성도 생각했는데, 천단수는 물론이고 주변의 잡초 하나 상하지 않았다.
단순한 이능파였다면 후유증이 남았겠지만 땅의 힘인 지력은 다른가 보다.
‘평범한 이능을 사용했다면 아무리 타깃을 한정했더라도 주변에 그 여파가 남았을 텐데.’
지력은 내 의지대로 움직여 내가 원하는 것만을 노렸다.
그 대상은 풍백과 우사, 구름, 쌓인 눈이었다.
그 결과, 풍백과 우사는 쓰러졌고 구름은 흩어졌으며 삿된 눈은 검게 변해 정화되었다.
‘이걸로 풍백과 우사는 붙잡았다.’
천단수 주변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두 소년, 풍백과 우사가 있었다.
그들은 이름이 새겨진 검을 놓칠 만큼 타격을 받았다.
휘리릭!
나는 몸에 감고 있던 오색 옷깃을 벗어 이능파를 흘렸다.
그러자 오색의 옷깃은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다가 저 둘을 꽁꽁 묶었다.
타락한 풍백과 우사가 저 오색 옷깃을 떨쳐 내고 달아나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 봤자 눈을 뜰 때쯤에는 호랑이 굴에 처박혀 달아날 수 없겠지.’
앳된 모습을 한, 쌍둥이 소년들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상위 존재나 진족들의 겉모습에는 큰 의미가 없다.
황지호만 해도 황유호처럼 착하고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풍백과 우사는 겉보기에 내가 기억하는 동생들의 나이와 비슷해 보여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물론, 마음이 좋지 않은 것과 별개로 포박은 단단히 해 뒀다.
‘저 아이들이 은광고에 삿된 눈을 뿌렸다는 걸 잊지 말자.’
플마고의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속, 눈 속에서 죽어 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을 떠올리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풍백과 우사로부터 눈을 떼고 시선을 위로 돌렸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검은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구름이 없어. 전부 흩어진 건가?’
하늘에는 구름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동안 쌓여 있던 삿된 눈이 내 이능파 색으로 물들어 검게 정화된 후 뿌려지고 있을 뿐이었다.
용왕신의 무녀들이 불러낸 구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력으로 꿰뚫려 그 정체가 낱낱이 드러나기 전에 재빨리 힘을 거두어 도망친 것 같았다.
‘그래도 이 거대한 힘에서 배신자들이 온전히 몸을 뺐을 리가 없지.’
용제건은 리플레이 속에서 용왕신의 무녀들이 부리는 오색 채운을 발견했다.
철저하게 정체를 감추던 무녀들은 여의보주가 산산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순간, 그 조각을 회수하기 위해 등장하였다.
용제건은 녹(綠), 벽(碧), 홍(紅), 자(紫), 유황(硫黃) 오색의 빛을 전부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용제건은 무녀들이 구름을 다루는 법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용왕신의 무녀들은 오간색에서 따온 이름을 받았어. 참고로 무녀들의 이능파의 색도 상징하는 색과 같아. 구름을 다룰 때에도 보통 제 이름과 같은 색의 구름을 다뤄. 하지만······.
―무녀들은 인접한 색에 위치한 구름을 다룰 수 있어. 예를 들어 벽의 무녀는 벽색의 구름 외에도 홍색과 녹색의 구름도 부릴 수 있지.
―배신자는 최소 두 명이야. 한 명이 최대 구름을 세 개 부릴 수 있으니, 다섯 색의 구름을 다루려면 적어도 두 명이 필요하지.
즉, 용왕신의 무녀 중에서 배신자는 최소 둘 이상이다.
나는 기청제를 치르며 무녀 중에서 배신자를 최소 한 명은 잡아내기로 마음먹었다.
그 배신자를 잡아내기 위해서 나는 배신자들의 계략에 의해 목숨을 잃은 비운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윤여랑의 힘을 이용했다.
나는 예전에 이 힘으로 악의의 실체를 밝힌 바 있었다.
장남욱이 도시후를 도와달라고 했을 때였다.
―조의신, 무엇을 한 거지?
―진령(鎭靈)을 사용했어. 령(靈)을 달래서(鎭) 그 실체를 밝힐 거야.
령(靈)은 신령이나 영혼, 귀신뿐만 아니라 정기, 영기, 영적인 것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령에는 악의도 포함된다.
나는 진령을 통해 아바리티아의 문양을 찾았고, 악의의 기억을 통해 도시후를 노리는 자의 얼굴을 밝혀냈다.
그리고 내가 이번 기청제에 사용한 힘은 벽사와 진령, 두 가지다.
삿된 것을 없애되 령을 달래 그 진정한 실체를 파악하는 것.
나는 두 가지를 목표로 했기에 두 힘을 동시에 사용했다.
파앙!
진령에 사용한 부채, 일월청룡선(日月靑龍扇)을 크게 펼쳤다.
그러자 부채 끝이 파르르 떨리며 부채 속의 청룡이 크게 꿈틀거렸다.
청룡의 입에는 구름 조각과 옷 조각이 물려 있었다.
그 조각들은 당장이라도 달아날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부채 속 청룡은 이를 악물고 그것들을 붙잡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면 단서를 한 조각도 얻지 못했겠구나.’
새삼 그 모습에 용왕신의 무녀들이 품은 집념과 신중함이 느껴졌다.
나는 일월청룡선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부채를 잘게 부쳤다.
“보여 줘.”
파르르…….
청룡이 입을 벌리자 구름에 섞여 있던 옷 조각이 나왔다.
그 옷 조각의 색은 유황색이었다.
‘배신자 중 하나는 최고참 유황이었구나!’
청룡에 입에서 자유롭게 풀려난 구름 조각은 허둥지둥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옷 조각은 불에 탄 것처럼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똑똑히 보았다.
진령으로 잡아낸 증거 중 하나가 유황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최고참이 가담했다면 얘기가 복잡해지는데…… 누가 언제 어떻게 변심했는지 확인하기 어려워지니까.’
최고참이 배신자가 아닌 게 밝혀져 조력을 구할 수 있게 된다면 얘기가 편해졌을 거다.
오랜 기간 무녀의 자리를 지키며 모든 이들을 관찰했을 테니, 배신의 원인이나 시기 등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본 것 외에는 증거가 없는데, 용족이나 염방열을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어깨에 따뜻한 게 닿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천재 전사가 보였다.
늠름하고 강하고 굳세고 씩씩한 우리 올무가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솜뭉치 시절에 올무가 이렇게 다가오면 무릎에도 닿지 않았는데, 지금은 올무가 고개를 숙여야 내 어깨에 닿는다.
그 순간 나는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게 배신자가 어쩌고 하는 고민이 아님을 깨달았다.
지금 중요한 건 천사이자 전사, 천재에게 내 잘못을 고하고 용서받는 일이었다.
“아직 내가 모르는 올무의 천재성이 또 있었다니, 상상도 못 했어. 내 상상력과 생각이 이 정도로 부족할 줄은 몰랐어. 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해.”
크릉……!
“용서해 주는 거야?”
크르릉!
올무는 내 어깨에 턱을 올려놨다가 등에 이마를 대며 답했다.
올무가 답할 때마다 천지가 흔들리고 초목이 떨릴 정도로 공기가 울렸으나 이건 우리 올무가 천재 전사라서 어쩔 수 없었다.
올무가 좀 커져서 그런가, 우리 올무가 머리를 기댈 때마다 어깨와 등이 뻐근해지고 아프게 느껴지곤 했다.
나는 내 단련이 부족함을 새삼 느꼈다.
우리 올무가 부리는 작은 어리광조차 받아 주기 힘들 정도로 내가 연약했나!
앞으로는 신체의 단련에 더욱 힘써야겠다.
나는 올무에게 사과를 하면서도 온 힘을 다해 올무의 어리광을 받아 주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 꿈 같은 시간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나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올무야, 쟤들이 못 도망가게 감시해 줄래? 묶어 두긴 했는데, 누가 와서 저걸 풀어 줄 수도 있잖아.”
크르르르?
순간 다친 귀가 따끔해질 정도로 올무가 낮게 목을 울렸다.
피는 멎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 소리에 반응해 움찔하자 올무가 더 놀랐다.
올무는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내렸다.
귀가 다친 건 북소리로 공격한 풍백과 우사 잘못이고, 그걸 막지 못한 내 잘못이므로 올무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여기서 아픈 척을 하면 올무가 잘못한 것 같지 않은가!
나는 올무에게 다시 사과하고 달랬다.
올무는 내가 가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난 아직 할 일이 더 있어.”
아직 크리스마스는 끝나지 않았고, 내가 할 일은 남아 있었다.
나는 은빛 영웅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네가 성탄절에 벌어질 사건을 막을 대책을 세운 걸 안다. 계획대로 진행되면 그날의 일은 저지할 수 있겠지만······.
―황호 님이 위험에 처하겠지.
나는 은빛 영웅의 경고를 그리고 그녀와 나눈 약속을 잊지 않았다.
나는 눈썹을 내리며 서운해하는 올무에게 말했다.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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