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검은 눈 (3)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건물 주변.
나비령은 유유히 협회 건물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비령의 여유로운 심경과 달리 표정, 몸짓을 본 사람은 누구나 동정심을 품을 만큼 가련했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협회에서 발생한 난리에 패닉을 일으켜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협회 내에서 발생한 이계, 박 팀장의 폭주 등으로 인해 계속 비상사태인 점을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았다.
굳이 틈을 잡는다면, 일반인치고는 비상구 위치를 지나치게 빨리 찾았다는 것 정도다.
만약 그 건으로 추궁당하면 나비령은 협회 건물 평면도를 박 팀장에게 받았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그 사람이 직접 준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을 통해 받은 걸로 해 둘까. 번거롭네.’
나비령이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일찍 협회를 나선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비령이 ‘그자’에게 받은 임무는 완수했으니 이제 개인적인 사명을 위해 움직일 때였다.
협회 밖으로 빠져나오니 건물 주변의 이계 공략이 완료되어 있었다.
여전히 통신이 제대로 복구되지 않아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듯했으나 이계나 에너미로 인해 사상자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비령은 공략을 마치고 정보를 공유하는 플레이어들과 안도하는 일반인들을 무감동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은광고 상황이 신경 쓰여. 권제인이 죽림에 가지 않은 게 아쉽네.’
은광고 출입구 주변은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이능독과 냉기, 돈족과 그 권속, 천계의 수군 등 베테랑 플레이어도 조금만 방심하면 목숨을 잃을 정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조의신이 철저히 수를 배치하였으나, 권제인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아끼는 나비령의 입장에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나비령은 호족이 죽림의 방비를 철저히 했을 거라고 예측했고, 그곳에 마침 한때 나비령의 가호를 받았던 목련의 화신 김유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비령은 권제인을 죽림으로 유도하려고 했다.
‘권제인을 죽림으로 보내서 안전을 확보하고, 운이 좋으면 호족의 비밀에 접하게 하고, 목련과 좀 더 친하게 만들 기회였는데. 누가 권제인을 말린 걸까? ……응?’
그때, 나비령은 머릿속에 나비의 편린이 흩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녀의 나비가 먼 곳에서 날갯짓을 하며 주인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나비의 위치, 역할을 파악하자 저도 모르게 멈춰 서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비가 반응한 곳은 특별한 진(陣)을 새겨 배치한, 용왕신의 무녀들 쪽이었다.
‘한창 구름을 움직이고 있을 땐데, 무슨 일이 있었지?’
나비령은 나비와 정신을 이었다.
나비와의 거리가 멀었기에 시야가 흐리고, 감각이 희미했으나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이 되었다.
나비의 시선 안에 검은 눈을 뒤집어쓴 무녀들이 있었다.
용왕신의 무녀들은 체통도 잊고 비명을 지르며 검은 눈을 털어 내고 있었다.
‘누군가 구름을 부수어서 도망쳤나 보네.’
나비령은 용왕신의 무녀들의 옷깃에 잔뜩 붙어 있는 검은 눈을 관찰하였다.
아직 아무런 단서도 없었지만, 눈이 검다는 사실만으로 나비령은 까마귀 가면을 떠올렸다.
호족일 가능성도 생각해 봤으나, 이능파의 색으로 추정해 보았을 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일이 잘못 돌아가면 무녀 쪽에 손을 써야 했는데 필요가 없어졌어.’
이번 계획이 온전히 돌아간다면 은광고는 궤멸하고, 호족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다.
그 사태만은 막아야 했다.
풍백과 우사가 직접 움직였으니 나비령이 나서서 삿된 눈을 완전히 막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무녀 쪽에는 손을 쓸 여지가 있었다.
나비령에게는 무녀 측에 보낸 나비가 있었고, 무녀들은 용족과 붉은 사자를 경계해야 하니 그쪽에 작은 분란만 일으켜도 구름 정도는 쉽게 흩어지게 할 수 있었다.
‘용왕신의 무녀들은 여의보주의 잔해를 탐냈지. 그것만 얻는다면 은광고가 어찌 되든 크게 신경 쓰지 않을 테니 개입할 여지가 있었어.’
만약 까마귀 가면과 호족, 은광고인들이 삿된 눈을 어찌하지 못했다면 나비령까지 나서야 했을 것이다.
나비령은 개입해야 할 상황을 고려해 판을 짜고 있었다.
용왕신의 무녀들은 나비령이 모시는 그자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원하는 게 있어서 손을 잡은 것뿐.
그러니 용왕신의 무녀들은 여의보주의 잔해를 얻은 후라면 구름이 흩어지든 말든 제 살길을 우선시할 게 뻔했다.
‘그분의 계획이 전부 뜻대로 흘러갔다면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겠지.’
나비령은 자신도 모르게 만약의 경우를 생각했다.
김신록이 작년 입학시험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용제건이 친우를 위해 소생의 소원을 빌다가 약해져 이번 계획에 산산이 흩어졌다면.
용왕신의 무녀들이 구름 위에서 여의보주의 잔해를 손에 얻었다면.
그 틈을 타 나비령이 개입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은 무녀들은 방심할 테니 일이 쉬워지고, 나비령에 의해 구름이 흩어진 후에는 굳이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은광고에 구름을 드리우지 않을 테니 뒤처리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용제건은 무사했고, 용왕신의 무녀들은 검은 눈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럼 이쪽에는 내가 손을 쓸 필요가 없겠네.’
용왕신의 무녀 건은 해결되었으나 다른 쪽이 남아 있었다.
호족 측에서 몹시 성가시게 여기고, 반드시 죽이고 싶어 하는 상대 중 하나이자 나비령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존재.
12지 동맹을 저버린 배신자, 우족의 수장.
‘이쪽은 어떨까? 그 영물이 임무를 완수하면 성가신 일이 일어날 테니 처리해 두는 게 좋을 텐데, 여차하면 내가 나서야겠지.’
나비령은 용왕신의 무녀 쪽을 살피는 나비와의 감각을 끊고, 다른 쪽을 살피기로 했다.
나비령에게 푹 빠진 그 영물은 겁도 없이 그녀가 만든 아이템을 착용하고 호족의 신역 안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나비령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그 영물의 비위를 맞추고, 자존심을 낮추고, 원하는 것을 주고, 언제든지 그를 죽여 버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나비령이 우족의 수장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피려 할 때.
누군가가 나비령의 등 뒤로 달려왔다.
‘너무 오래 멈춰 서 있었나. 달려오는 방향을 보니 협회 쪽인데…… 목격자로서 붙잡으려 하는 걸까?’
재빠르게 달려온 누군가는 나비령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비령은 그 손길을 피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저 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하에 나비령은 순순히 붙잡히기로 했다.
그 누군가의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나비령은 손의 감각이나 체온으로부터 손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챘다.
‘당신이 뒤따라 올 줄이야.’
나비령은 웃음을 삼키고 당혹감과 공포에 젖은 얼굴을 가장해 고개를 돌렸다.
나비령을 붙잡은 인물은 홍보 1팀의 팀장이자 규정 집행부에 소속한 홍규빈의 부하.
윤 대리였다.
* * *
천익산 깊은 곳, 백운봉 주변.
모습을 감춘 진족이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진족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은광고의 결계를 망가뜨리고, 오늘 그 결계의 성질을 완전히 바꾼 주모자.
12지 동맹을 배신한 우족의 수장이었다.
우족의 수장은 부하들을 이끌고 은광고에 왔으나 지금은 혼자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가 단독 행동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부하들과 이번 임무의 공을 나눠 받기 싫어서.
둘째, 여차하면 부하들을 방패 삼아 탈출하기 위해서.
우족의 수장은 나비령 앞에서 큰소리를 치긴 했으나 모든 계획이 실패할 가능성과 탈출할 길을 열어 두고 있었다.
‘호족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하물며 최근 들어선 황호의 태만함이 줄었다는 말도 있다.’
우족의 수장은 호족을 주의 깊게 경계했다.
그래서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돈족을 방패로 철저하게 몸을 사렸다.
우족의 수장은 12지 동맹의 결계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게 몇 가지 있긴 했다.
그중 하나는 은광고의 한 교사에게 그림자를 보이고 만 것이었다.
‘그자에게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었다. 저강렵이 과시욕을 부리지 않았다면 그 인간이 내 그림자를 볼 일도 없었을 텐데.’
작년 입학 실기 시험 당시 김신록과 13조 학생을 처치하기 위해 웅족을 들여보냈다.
그러기 위해서는 12지 동맹의 결계를 쥐도 새도 모르게 조작해야 했고, 그 과정에 은광고 교사, 최편득이 협력했다.
최편득은 경비 시스템이 허술한 구역만 알려 주고 자리를 떠도 됐을 텐데, 그놈의 인맥을 쌓겠다며 끝까지 우족의 수장에게 말을 걸며 주변에 있었다.
최편득을 건드리면 저강렵과도 사이가 틀어질 수 있었기에 함부로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결과, 최편득은 우족의 수장이 결계를 조작하는 순간 그림자를 보고 말았다.
그날 실루엣을 감추긴 했으나 최편득이 무언가 봤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최편득은 그 건과 상관없이 은광고 앞에서 퇴폐 건물을 세우고 장난질을 한 게 들통나 호족에게 처리되었지만, 괜히 찝찝했다.
‘호족이 퇴폐 건물과 결계의 이상을 연결지어 생각하진 않았겠지.’
또, 마음에 걸리는 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그날 죽이지 못한 김신록이었다.
웅족이 방심하여 김신록을 놓칠 뻔했고, 그 결과 멀리서 지켜보던 우족의 수장은 김신록을 직접 공격해야 했다.
김신록과는 아주 짧은 대화를 나눴다.
너무 하찮은 내용이라 우족의 수장은 기억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힐 단서가 될 만한 말은 하지 않은 것 같지만,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눈 호족의 후예가 살아남았다는 게 몹시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우족의 수장을 안심시키는 사실이 있었다.
‘아니, 만약 내 정체를 알았다면 진작에 호족이 우족의 신역으로 쳐들어와 전쟁을 선포했을 거다.’
우족의 수장은 한반도의 개천 신화에 이름을 남긴 신화계 호족들을 생각했다.
황호, 백호 둘 다 배신자의 정체를 알고도 가만히 있을 이들이 아니었다.
그 둘의 행적을 고려하면 모든 호족이 전멸하고 혼자 남더라도 끝까지 우족의 목을 따기 위해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가만히 있었다는 게 말도 안 됐다.
황호가 태만하다고는 하나 12지 동맹 회담을 열어 이렇게 선언하지 않았던가.
―寅[호랑이님] “물론 당한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예정이다. 배신자가 밝혀지는 즉시, 12지 동맹의 약조에 따라 배신자는 퇴출하고 단죄할 것이다.”
그러나 돈족도, 우족도 모두 무사했다.
돈족은 멍청하게도 임무에 실패하긴 했으나 호족의 습격을 받지는 않았다.
‘호족이 눈치챈다면 이 땅의 지력을 써서 탈출하면 된다. 지금쯤이면 각지에서 의식을 마쳤을 것이다.’
우족의 수장은 은광고 곳곳에서 모습을 감추고 활약 중인 이들을 떠올리며 그리 생각했다.
그 의식이 끝나면 황호의 허락을 받지 않더라도 진족이라면 누구나 신역에서 지력을 끌어다 쓸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땅이 거부해도 그 정도로 지맥이 뒤틀린다면 힘을 내어 줄 수밖에 없겠지.’
우족의 수장은 은광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로 멋대로 그렇게 단정 지었다.
우족의 수장이 품은 자신감의 원천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것’이 내 손에 들어왔다. 이것과 지력이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나!’
우족의 수장은 품에 갈무리한 물체에 손을 올렸다.
그 손에는 나비령이 직접 만든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우족의 수장은 반지를 보며 저도 모르게 히죽였다.
파아아아…….
우족의 수장이 마음을 놓은 직후, 그의 주변에 황금빛 입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능파의 주인을 파악한 순간, 우족의 수장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황금빛 입자 너머 곱상한 눈매를 한 은광고 교복 차림의 누군가가 서 있었다.
“호족의 신역을 침범하고도 여유를 부리다니. 어리석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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