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검은 눈 (4)
먼 옛날, 개천신화에 이름을 남긴 신화계 호족.
천신의 뜻에 반해 힘을 제한당하거나 자취를 감추고 사라지는 일 없이 이 땅에 머문 신역의 수호자, 호족의 수장 황호.
황호는 힘, 이능, 재력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데다 천신이 내린 권능까지 더해져 분신을 부릴 수 있었다.
특히 신역의 지력을 사용할 수 있으니, 은광고에서 일을 벌인다면 1순위로 경계해야 할 상대는 황호였다.
그 말은 황호가 아군에게 있어 최강의 수라는 뜻이기도 했다.
조의신이 크리스마스를 대비하는 데에 있어 가장 신경 쓴 점은 황호를 숨기는 것이었다.
―내 생각대로 잘 풀리면, 네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거야.
황호에게 동문, 서문, 남문, 북문에 대기해 달라고 말하며 조의신은 이렇게 덧붙였다.
―내 수가 실패하지 않은 이상, 계속 기다려 줘.
황호는 조의신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래서 은광고에 이 사달이 나는 동안 계속 기다리고 지켜보았다.
결계가 망가지고, 수많은 진족과 에너미가 은광고를 더럽히고, 학생들이 싸우는 것을 보기만 해야 했다.
은광고의 안과 밖, 각지에 배치한 분신들이 그 모든 광경을 보며 감각이 공유되고 쌓이는 만큼, 황호는 크게 인내해야 했다.
저강렵이 천계의 수군들을 끌고 등장했을 때에는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조의신이 부른 수, 제천대성의 등장으로 받아쳤다.
제천대성이 상위 존재의 기적을 받아 냉기마저 지우고 나니 출입구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황호의 분신들은 개입할 여지가 사라졌다.
그렇게 황호는 적에게 노출되지 않은 상태로, 우족의 수장과 1대1로 대면하는 국면까지 버텼다.
황호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우족의 수장을 바라봤다.
‘조의신이 제안하지 않았다면 배신자가 활개 치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을.’
마음 같아서야 배신자와 적들이 신역을 밟기 전에 모조리 사지를 잘라 내어 나락에 처박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황호의 뜻대로 일을 진행한다면 당장의 위기는 넘어갈지언정, 그 뒤에 있는 거대한 악의와 언제 닥칠지 모를 적습에 대항하지 못하게 된다.
황호는 쓸개를 씹는 심정으로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
만약 은호가 모든 작전을 계획했다면, 황호의 마음을 고려하여 그가 활약해 적을 벨 기회를 더 늘려 주거나 특정 진족은 신역을 밟지 못하게 수를 뒀을지도 모른다.
은호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는 하나 황호의 심경을 생각해 호족의 위엄을 살리는 것도 고려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의신은 그 점은 도통 고려해 주지 않았다.
조의신은 적이 아닌 이들의 안전과 미래를 생각하며 수를 두었다.
―흑막에게 있어서 너는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일 거야. 그러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서 신중하게 움직여야 해.
그렇게 말하는 조의신은 황호를 똑바로 보고 있었는데, 어쩐지 그의 눈에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비추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는 흑막이 준비하고 있던 거대한 수 중 하나일 뿐.
흑막의 모든 수를 파훼한 것도 아니고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많았다.
조의신의 말에 의하면 플마고의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에서 비록 큰 희생이 났지만, 학생들의 저항과 외부의 개입 등으로 인해 흑막은 제 뜻을 전부 달성하지 못했을 거라고 한다.
그러니 퍼스트 크리스마스는 사실상 흑막이 실패한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플마고의 주인공들인 주수혁과 안다인이 3학년이 되도록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즉, 이번에 흑막이 실패한다고 해서 모든 사건이 끝나는 건 아닌 셈이다.
조의신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앞으로의 일들까지 염두에 두고 수를 두었다.
―네가 흑막의 뜻대로 해외에 가지 않고 국내에 남았다는 걸 알면, 앞으로는 너를 유인하는 대신 제거하는 방향으로 수를 쓰겠지.
조의신의 말을 들은 호족들이 속으로 깊게 감탄하였다.
조의신은 단순히 황호를 예비 전력으로서 아껴 두는 게 아니었다.
체스 피스를 안전하게 지키고, 상대의 수를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감탄하고 있는 황호를 향해 조의신이 아무런 악의 없이 뼈아픈 말을 던졌다.
―흑막의 눈에는 네가 여전히 태만해 보였으면 해.
그야 현대에 이르러 다소 태만해지기는 했다.
그 대가를 톡톡히 맛보았는데 조의신이 저렇게 대놓고 말하니 새삼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어쨌든, 조의신의 수는 전부 들어맞았고 우족의 수장은 겨우 동요를 숨기며 황호를 보고 있었다.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우족의 수장의 머릿속에선 온갖 의문이 쏟아지고 있었다.
‘황호가 어째서 여기에! 지금쯤이면 그분의 계책대로 한반도를 떠나 있어야 하지 않았나?’
비록 황호는 은광고 교복을 입은 10대 청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우족의 수장이 그 정체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맹수 같은 눈동자와 곱상한 눈매, 오만한 말투와 그에 걸맞은 맹렬한 이능파의 기세.
우족의 수장은 한눈에 그가 황호임을 알아봤다.
‘어째서 교복을 입은 거지? 학생 사이에 숨어 있었나? 아니, 그걸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고? 본신이 한반도 밖에 있어서 몸을 사리고 있던 건가?’
우족의 수장이 아무리 표정과 감정을 감추어도 황호는 그 속내를 꿰뚫어 보고 비웃었다.
“내게 의문을 품어 봤자 아무 소용 없다. 목숨 구걸이라도 하는 게 나을 거다.”
황호 주변을 감도는 황금빛 입자의 농도가 짙어졌다.
그 입자가 머금은 이능파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묻어났다.
‘쉽게 죽여 줄 생각도 없으면서 목숨 구걸이라니.’
눈앞에 있는 황호의 기운이 맹렬하고 사나웠으나 우족의 수장은 이를 상대거나 거기에 굴복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미 그가 받은 임무는 달성했다.
무사히 복귀만 하면 목표를 이루는데 굳이 황호와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다.
‘얼굴은 가리고, 이능파를 숨겼다. 아직 황호가 나를 단순한 침입자라고만 여길 가능성도 있다.’
우족의 수장은 자신이 목격당하는 경우도 생각해 실루엣과 얼굴을 숨기고 자신을 상징하는 무기도 들지 않았으며 이능파 사용을 자제했다.
괜히 여기에서 황호와 말을 섞거나 그와 교전하면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었다.
우족의 수장은 말을 섞는 대신 천익산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날렸다.
휘이익!
우족의 수장이 크게 뛰어올라 허공에서 한 바퀴 구른 순간, 그의 그림자가 구겨지듯이 줄어들었다.
다음 순간, 그는 백조가 되어 있었다.
백조가 되어 날개를 펼치는 우족의 수장에게선 우족의 그림자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친다면, 호족은 침입자를 ‘새’라고 단정 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백조와 연이 있는 진족을 후보로 조사를…….’
하지만 다음 순간, 우족의 수장이 품은 기대가 산산조각 났다.
황호는 마치 그가 백조로 변하리라는 것을 알아챈 것처럼 싸늘하게 말했다.
“그게 네 특기인 변신술이로군, 우마왕. 제천대성으로부터 달아날 때에도 백조로 변했었지.”
파앗!
황호가 박수를 한 번 치자 하늘에 녹아 있던 금색의 결계가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눈부신 황금의 벽이 백조로 변한 우족의 수장, 우마왕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벽에 가로막히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 하고 날개를 퍼덕이는 우마왕을 향해 황호가 말했다.
“백조로 변했으니 다음은 수리인가?”
우마왕은 속으로 경악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
호족은 처음부터 우족의 배신을 알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우마왕이 여기에 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황호는 우마왕을 직접 제 손으로 잡기 위해 여기에 있던 것이다.
“그다음으로 네놈이 변한 건 백학이었지. 하늘로 달아날 수 없다는 걸 알자 노루로 변했고…….”
백조, 수리, 백학, 노루…….
전부 제천대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마왕이 변신했던 대상이었다.
저걸 하나하나 꿰고 있다는 건 무엇으로 변하든 황호는 이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황호가 호랑이인 이상, 내게는 수가 있다!’
우마왕은 기억을 더듬어 호랑이로 변했던 제천대성으로부터 달아났을 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우마왕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아챈 것처럼 황호가 말했다.
“제천대성이 호랑이로 변했을 때, 네놈은 표범으로 변해서 그의 추적을 한 번 떨쳐 냈다.”
마침 황호가 그 말을 한 순간, 우마왕은 표범으로 변한 상태였다.
황호는 표범으로 변해 땅에 발을 디딘 우마왕을 향해 말했다.
황호의 손에는 그의 이능파가 결정체가 된 듯한, 황금의 봉이 들려 있었다.
“마침 나는 너를 쓰러뜨린 제천대성과 같은 무기를 쓴다. 게다가 호랑이이기도 하지. 시험해 보겠느냐? 표범으로 변했을 때 이 몸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
말을 마친 황호의 눈이 황금빛으로 불타올랐다.
동시에 땅을 박차고 우마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표범으로 변한 우마왕은 그를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호랑이에게 사냥당하는 건 두 번째였다.
결국 우마왕은 제천대성에게 패배했으나, 호랑이의 모습을 빌린 제천대성에게는 지지 않았다.
그는 그 생각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천대성과 달리 내 특기는 따로 있지.”
황호는 봉을 휘두르는 대신 그 봉을 매개로 허공에 결계를 전개했다.
그러자 결계의 빛이 땅을 타고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땅에서 빛이 나오자 우마왕이 빛을 피해 정신없이 발을 놀렸다.
‘지력인가! 지금 지력에 묶이면 끝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땅에 충만한 빛의 정체는 지력이 아니었다.
땅에 새겨진 건 전부 황호가 전개한 결계였다.
황호는 신역의 수호자로서 이 땅을 지키기 위해 결계를 깔아 둔 것이다.
“네놈이 이 이상 신역을 밟아 더럽히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우마왕은 발을 멈췄다.
그가 발을 디딜 수 있는 모든 곳이 결계로 덮여 있었다.
한 걸음만 움직이면 황호의 결계에 묶이게 된다.
황호는 어느덧 바로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우마왕은 목을 베도 다시 돋아난다고 했지, 지금 베어 둘까.”
황호가 움직이는 이능파와 마력이 거대한 칼날이 되어 그를 베려 하고 있었다.
우마왕은 급히 변신을 풀고 쌍검을 불러 손에 쥐었다.
채앵!
천계와 불계의 병사, 삼장의 호법신장을 상대한 쌍검과 신역의 수호자가 휘두른 금빛의 칼날이 쳤다.
‘어쩔 수 없다, 지금 당장 지력을 끌어 써야겠다!’
턱! 우우우웅……!
우마왕이 땅을 발로 크게 밟으며 이능파를 흘려 지맥을 더듬었다.
우마왕의 예상대로라면 뒤틀린 지맥은 그의 이능파에 반응해 지력을 쏟아내야 했다.
그러나 지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마왕은 일이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그들이 실패한 건가!’
지맥을 뒤틀기 위해 투입한 인원의 숫자를 떠올리며 우마왕이 믿을 수 없어 했다.
그 모습을 관찰하던 황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지맥을 쓰려고 하다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군. 지금 내리는 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지? 천익산에서 그 광경이 보이지 않을 장소라…… 어지간히 깊은 곳에 틀어박혀 있다 나왔나 보군.”
우마왕은 황호가 단순히 여유를 부리느라 그를 적당히 상대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싸우는 과정에서 정보를 뜯어내기 위해서인 듯했다.
우마왕은 황호와의 힘의 차이를 깨달았다.
적어도 이 신역에서 우마왕의 힘만으로는 황호와 정면으로 맞붙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곳에서 쓰고 싶지 않았거늘.’
우마왕이 각오를 굳힌 순간, 황호가 위화감을 느꼈다.
우마왕에게서 이질적인 이능파가 느껴졌다.
순간, 황호는 조의신과 나눴던 대화가 머리에 떠올랐다.
―별동대를 지휘하는 우족 말인데, 아피스의 화신이나 우마왕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해.
―우족의 수장이 우마왕이니, 아피스의 화신 쪽이겠군.
그 말을 들은 조의신은 순간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우족의 수장이 우마왕이라고?
―그래.
조의신은 뭔가 마음에 걸리는 듯 말을 아끼다가 말했다.
―게임 속에서 우족의 수장이 힘을 쓰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우마왕의 설화와 관련이 없던 힘이었어.
황호의 회상이 끝나기도 전에, 우마왕이 발산한 이질적인 힘이 땅 밑에서 퍼져 나갔다.
황호는 위험을 느끼고 급히 물러났다.
우마왕을 중심으로, 천익산의 초목이 힘을 잃고 말라붙기 시작했다.
조의신이 말한 것과 같은 힘이었다.
―그 힘을 보고 나는 우족의 수장이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하늘의 황소’라고 생각했었어.
기근을 일으키는 힘을 목도한 황호가 물었다.
“어째서 네가 구갈안나의 힘을 쓰는 것이냐, 우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