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52)
86. 검은 눈 (5)
아시아 남서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속.
사랑과 전쟁, 땅의 여신 이쉬타르는 원정을 끝내고 우루크에 귀환한 왕 길가메쉬 왕에게 청혼했다.
길가메쉬는 이쉬타르의 유혹에 넘어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이들을 언급하는 등 거침없이 야유하며 거절했다.
그 거절을 치욕스럽게 받아들인 이쉬타르는 4주신(四主神) 중 한 명인 아누에게 간청했다.
자신을 모욕한 길가메쉬를 죽이기 위해 하늘의 황소, 구갈안나의 힘을 빌리고 싶다고.
이쉬타르와 지상에 온 구갈안나는 우루크의 초목을 말려 버리고, 유프라테스강의 수위를 낮춰 버릴 정도로 물을 마셔 댔으며, 콧김만으로 땅에 구멍을 냈다.
신화 속에서 7년 동안 가뭄을 부른 구갈안나의 힘이 지금 우마왕에게 깃들어 있었다.
‘이 힘을 바로 알아보다니……!’
우마왕은 황호의 일갈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그가 느낀 동요를 일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에서 우마왕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다면 그가 구갈안나의 힘을 사용하고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 된다.
초목을 말려 버리는 힘은 흔치 않지만 구갈안나만이 보유하고 있는 힘은 아니다.
다른 신화 체계 속에서 기근을 부른 존재도 있고, 유사한 효과를 지닌 광림이나 스킬도 있다.
그러니 우마왕은 지금 자신이 증거만 남기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호족이 잘못된 추론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호의 태도가 묘하게 마음에 걸리긴 했다.
‘황호가 바로 구갈안나의 이름을 대고, 확신을 굳힌 게 이상하군. 그러나 이 힘을 꿰뚫어 봤다 해도 알아본 것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터!’
우마왕은 머릿속에 심어 둔 구갈안나의 뿔에 이능파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우마왕의 머리카락에 가려진 청금석의 뿔에서 힘이 넘쳐났다.
우오오오오!
우마왕의 머릿속에서 황소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참기 어려운 고통과 분노, 저주와 복수를 결의하는 비명이었다.
하지만 그 비명은 우마왕에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처음에는 듣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소리였으나 점차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무기를 휘두를 때 바람을 찢는 소리가 좀 난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동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마왕은 어느 순간부터 구갈안나의 힘을 단순한 무기로 여겼고, 그 무기의 강력함에 취했다.
우마왕은 자신의 발밑에서 힘을 잃고 시든 초목과 퍼석해진 땅을 보며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구갈안나의 힘을 쓰고 있다고 시인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군.”
그러나 황호의 반응은 우마왕의 예상과 달랐다.
황호는 이상할 정도로 냉정하고 기민하게 반응했다.
파아아아……!
황호가 손을 놀리자 주변의 마력이 요동치며 땅에서 황금의 빛이 솟아올랐다.
황호가 땅에 전개한 결계가 움직이자 우마왕이 급히 몸을 날렸다.
우마왕이 발을 뗀 곳은 곧바로 황금빛으로 뒤덮였다.
황금의 결계가 말라붙은 초목과 메마른 땅을 감싸 구갈안나가 부른 기근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이 땅에 결계를 깔아 둔 것과 바로 아낌없이 힘을 쏟아 결계를 움직인 것에 우마왕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째서 황호는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대응하는 거지? 호족이 어디까지 정보를 얻은 거지?’
우마왕은 구갈안나의 힘을 개방하며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을 되뇌었다.
우마왕이 황호와 호족에 관해 떠올려 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가 구갈안나의 힘을 사용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조의신이었으니까.
―우족의 수장이 구갈안나의 힘을 사용하는 걸 보고 생각했는데…….
작전 회의 중, 조의신은 여러 가능성을 제시했다.
첫 번째 가설, 게임 속에서는 우족의 수장이 우마왕에서 구갈안나로 교체되었다.
황호가 그 가설에 반박했다.
―그럴 가능성은 적군. 우마왕은 우족 사이에서는 명망이 깊다. 옥황상제와 부처가 병사를 파견하고, 나타와 제천대성이 협력한 후에야 겨우 쓰러뜨린 거물이다. 구갈안나가 단기간에 다른 우족의 반발을 누를 수 있을 것 같지 않군.
―12지 동맹 회담에 출석한 우족의 수장이 우마왕이라면, 네 말대로일 거야.
조의신도 그 가설이 사실일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한 건지 황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가설, 우마왕이 상위 존재와 광림으로 이어져 설화에 없던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가설도 사실일 가능성이 낮았다.
―우마왕은 제천대성에게 패배한 후, 나타에 의해 옥황상제 앞으로 끌려갔어. 그런 우마왕에게 기근을 초래하는 강력한 광림을 내린다면, 옥황상제에게 싸움을 거는 거나 마찬가지야.
―의신이 형과 황호 님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적은 것일 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황호와 조의신의 대화를 듣던 은호가 말했다.
―짧은 시간 안에 구갈안나가 우족을 평정했을 수도 있고, 옥황상제와 대립할 각오를 한 상위 존재가 우마왕에게 힘을 빌려줬을 수도 있죠. 의신이 형이 말한 세 번째 가설도 그럴싸해요. 극히 높은 희귀도의 소모 아이템을 사용한다면 기근을 부를 수 있겠죠.
세 번째 가설, 우마왕이 구갈안나의 힘과 유사한 효과를 가진 아이템을 사용했다.
아이템의 희귀도를 고려해 봤을 때, 아주 가능성이 낮았지만 없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의신이 형한테는 네 번째 가설이 있는 것 같아요. 아마 의신이 형은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죠.
은호가 그렇게 말하자 조의신이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아주 조금 빨라졌다.
조의신이 겉으로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그걸 알았지?’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걸 본 호족들이 흐뭇해하는 표정을 숨기며 조의신이 네 번째 가설을 말하는 걸 기다렸다.
네 번째 가설은 다음과 같았다.
‘우마왕이 구갈안나의 힘을 사용했다’.
적호가 그 말에 의문을 표했다.
―아무리 같은 우족이라 해도 다른 이의 힘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같은 땅에서 오랜 기간 함께 힘을 갈고 닦아 유사한 능력을 가질 가능성은 있습니다만…….
적호는 황호 쪽을 보며 말했다.
황호는 먼 옛날, 청호를 이겨 보겠다며 태호권을 익혔다.
그 결과, 은광고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상대로 깽판을 칠 만큼 출중한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사례가 있긴 하지만, 다른 진족의 힘을 가져다 쓰는 건 불가능했다.
몇천 년간 친우로 지냈어도 황호는 백호의 벽사를 쓸 수 없고, 백호는 황호의 결계술을 사용할 수 없다.
설령 서로에게 가호를 내렸다 해도 말이다.
―상위 존재가 광림으로 힘을 빌려주는 것과 달리, 진족이 내리는 가호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기껏해야 기존에 가지고 있던 스킬이나 광림이 조금 변형되는 형태로 발현될 겁니다. 구갈안나가 우마왕에게 큰 가호를 내렸다 해도, 연이 없던 힘을 쓰는 건 불가능합니다.
현계에 없는 상위 존재는 이 세계에서 단 한 명을 택해 광림으로 힘을 발현시킬 수 있다.
치유의 신 아케아와 광림으로 이어진 유상희.
물과 연관된 상위 존재들과 광림으로 이어져 물을 폭주시키는 김유리.
두 사람의 경우 광림을 통해 상위 존재의 힘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상위 존재와 달리 현계에 머물고 있는 진족은 다르다.
가호를 통해 존재감을 새겨 힘을 줄 수는 있으나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용제건이 승천하여 상위 존재가 되어 김신록에게 힘을 주려는 것이다.
―가호가 아닌 방법으로도 다른 진족의 힘을 쓸 수 있어요.
조의신의 반박에 적호는 바로 답을 찾지 못했다.
제일 먼저 답을 알아챈 건 황호였다.
―무지기 건을 말하나 보군.
TC 연구소의 지하.
상위 존재 인공 강림 프로젝트에 엮인 유상희와 도원우를 구출하기 위해 간 그곳에, 무지기가 갇혀 있었다.
무지기는 도시후의 사슬에 묶인 채로 에너지원이 되어 힘을 뽑히고 있었다.
―내가 흑막이라면, 그런 기술을 무지기에게만 쓸 것 같지 않아.
자신을 따르지 않는 진족으로부터 힘을 마음껏 뽑아 쓴다.
위험하고 비도덕적인 발상이었으나 강력한 수였다.
―무지기를 봉인할 때, 도시후는 끝까지 협력하지 않았어. 그래서 강제로 도시후의 광림을 발동시켰지. 그 결과 불안전한 형태로 힘을 뽑을 수밖에 없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만약 온전하게 힘을 얻어 낸 사례가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게 무지기가 아니라 구갈안나고, 우마왕이 그 힘을 쓰게 되었다면 앞뒤가 맞았다.
황호는 조의신이 말한 네 번째 가설이 사실일 것이라는 전제하에 움직이기로 했다.
우족의 수장, 우마왕이 구갈안나의 힘을 쓸 것이라고.
실제로 눈앞에 있는 우족의 수장은 조의신의 가설대로의 힘을 사용했다.
우족의 수장, 우마왕은 제 본래의 힘인 변신술을 자유자재로 다루었으며 동시에 7년간 가뭄을 초래한 구갈안나의 힘도 썼다.
황호는 물기를 잃고 타들어 가는 땅을 결계로 묶어 기근이 퍼져 나가지 않게 마력을 운용했다.
‘구갈안나의 힘을 쓸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쉽지 않군.’
여전히 겨울 공기가 차가운데, 황호의 교복 옷깃에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신역의 수호자인 황호는 이 땅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며 땅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땅을 죽여 버리는 구갈안나와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그저 싸워야 하는 것뿐이면 모를까 신역을 지키면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니, 황호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천익산 백운봉 가까이에는 호족의 신보가 나타나는 샘이 있다. 구갈안나의 힘이 이곳에서 날뛰면 정수가 모두 말라 버린다.’
땅이 죽고 샘이 마르면 호족의 신역이 힘을 잃는다.
그 결과 지력마저 고갈하면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흑막이 이 땅에 이계를 부르고 동결형 이계를 심을 필요도 없이, 지력을 잃은 땅에 대이계가 열릴 게 분명했다.
세 기사의 맹세가 벌인 지력 약탈로 인해 맨체스터에 대이계 사태가 발발한 것처럼.
“신역의 지력을 가질 수 없으니 죽일 셈인가?”
파아아!
황호가 차갑게 분노하며 결계를 움직여 우마왕의 목을 옥죄려 했다.
그러나 우마왕이 부른 기근이 천익산을 좀먹기 위해 땅을 파고들자 힘을 재분배할 수밖에 없었다.
기근이 예상보다 빠르게 퍼져 나가자 황호가 혀를 차고 출력을 올렸다.
맨눈으로 보기 아플 만큼 강렬한 빛을 머금은 황금빛의 입자가 어지럽게 움직였다.
‘기근의 힘이 생각보다 무겁군. 어서 승부를 내야 한다!’
황호가 결계술에 힘을 더 싣자 구갈안나의 힘을 묶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지금부터 황호는 결계술 없이 우마왕을 상대해야 한다.
우마왕은 포위당한 후, 목을 수차례 잘려도 항복하지 않은 강적이었다.
황호의 무(武)로 어디까지 상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몸을 쓰는 게 특기는 아니거늘.’
그럼에도 황호는 봉을 들어 우마왕을 겨누었다.
우마왕은 황호의 뜻을 안 건지 멈춰 서서 쌍검을 꺼내 들었다.
이제 정체를 감춰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안 건지, 우마왕의 실루엣은 우족답게 변해 있었다.
구갈안나의 힘을 사용하는 중에는 그 영향을 받는 건지, 머리카락 사이로 청금석으로 된 뿔이 길게 드러나 있었고 외피는 두터워졌으며 굵은 꼬리가 드러나 있었다.
카아아앙!
황호가 휘두른 봉과 쌍검이 격돌한 순간.
황호는 우마왕 뒤에 보인 것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바람처럼 나타난 누군가가 우마왕의, 구갈안나의 꼬리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손을 뻗는 자는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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