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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58화 (654/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58)

86. 검은 눈 (11)

갈래에 꿰뚫린 우마왕이 무너져 내리고, 이 땅에 퍼져 있던 구갈안나의 힘이 사라졌다.

황지호가 결계술로 묶어 두고 있던 기근의 힘과 우마왕에게서 느꼈던 위압감이 옅어졌다.

툭.

쓰러진 우마왕의 머리에서 청금석으로 된 뿔이 툭 하고 떨어졌다.

우마왕이 제 몸에 묶어 둔 구갈안나의 힘이 떨어져 나왔다는 증거였다.

‘거의 다 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내가 할 일을 하면 돼.’

시선이 따갑게 느껴져 고개를 드니 황지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황지호는 뭐가 좋은지 혼철곤을 든 우마왕 뒤에 있는 나를 볼 때처럼 웃고 있었다.

내가 은빛의 그림자, 이름 없는 영웅이 부탁한 일을 하고 나면 황지호는 웃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좀 찔리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갑자기 황지호가 얼굴을 굳혔다.

“조의신, 귀를 다쳤나? 이 더러운 소를 처리하고 얼른 치료하도록 하지.”

황지호가 내 귓가에 남은 핏자국을 본 것 같다.

혹시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한 건가 싶었는데, 다행히 아니었다.

그때, 쓰러진 우마왕 쪽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우득, 우드드득.

살과 뼈가 돋아나 갈래로 꿰뚫린 부분이 메워지고 있었다.

나타가 목을 자르고, 목에 화륜을 걸어 지져도 죽지 않았던 우마왕의 재생력다웠다.

황지호가 혀를 차며 꼬리를 내던졌다.

우마왕은 구갈안나의 힘을 잃었으니, 구갈안나의 약점인 꼬리를 잡아도 소용이 없어진 거다.

이쪽으로 달려오던 주수혁과 맹효돈이 그 광경을 보고 주춤했다.

“재생되고 있잖아!”

“방금 지호와 의신이는 우마왕이 아니라 구갈안나를 쓰러뜨렸어. 아직 우마왕의 힘이 남아 있는 거야.”

주수혁은 긴장한 얼굴로 쌍검을 고쳐 쥐었다.

과연 타이틀 히어로답게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한 듯했다.

물론, 몸을 재생시켜 힘을 되찾는 꼴을 황지호가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파지지직!

황지호가 구두 밑창에 결계를 전개해 우마왕의 목덜미를 짓밟았다.

결계가 우마왕의 재생을 방해하는 건지 스파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우마왕은 황지호를 보다가 내가 든 상보심금파를 노려봤다.

눈이 벌건 꼴을 보니 이 모든 게 막타를 날린 상보심금파 탓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그, 그 돼지가 신물을 허투루 관리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헛소리 마라. 상보심금파가 없더라도 네놈은 절대로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황지호는 비웃으며 발에 실린 힘을 더했다.

우마왕은 숨통이 막히는지 ‘헉’ 하고 숨을 뱉으며 꿈틀거렸다.

악에 받친 우마왕이 숨을 어렵게 뱉으면서도 말을 계속했다.

“나는, 지지 않았다.”

“미친 소는 함부로 도축해선 아니 된다고 하는데, 난감하군.”

그때, 우마왕이 이능파를 뿜었다.

황지호는 놀라지도 않고 주변의 결계를 불러 모아 우마왕을 구속할 준비를 했다.

우마왕이 최후의 발악을 하기 위해 주변에 이능파를 폭주시킬 거라고 예상했지만, 달랐다.

우마왕의 이능파는 그의 품 안으로 흐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또 무슨 수작을 부릴 셈이냐. 그래 봤자 이 몸 앞에서 통할 리가…….”

그렇게 말한 황지호의 말문이 막혔다.

우마왕의 품 안에 있는 무언가를 매개로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 불길한 기운은 황지호가 펼친 황금의 결계를 무시하고 주변으로 뻗어 나가려 했다.

황지호는 급히 뒤로 물러나고, 우마왕은 불길한 기운을 두르고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준비한 수를 두기 위해 아이템 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황지호, 물러나. 저건 네 힘이 안 통해.”

“조의신……?”

우마왕이 호족의 신역 중심에 홀로 잠입하여 얻으려고 했던 것.

우마왕의 비장의 수.

그건 바로 호족의 신보(神寶)였다.

호족의 신보가 발휘하는 힘에는 호족의 힘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

은빛 그림자, 이름 없는 영웅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마왕에게는 구갈안나의 힘 외에도 비장의 수가 있다. 그러니 반드시 가야 한다.

―비장의 수요?

―우마왕은 그날 호족의 신보를 손에 넣을 거다. 호족의 신보가 발휘하는 힘은 호족이 대항하기 어렵다.

호족의 신보는 신역에서 천 년에 한 번 정도 만들어진다는 희귀 아이템 아닌가.

황지호의 말에 의하면 최근 2천 년 동안 신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걸 우마왕이 얻는다는 말인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호족이 미리 손에 넣을 수는 없나요?

―그럴 수 있다면 2천 년간 호족이 허탕을 치지 않았을 거다.

―호족이 아니라 제가 먼저 얻는 건요?

―너도 할 수 없을 거다.

은빛 영웅은 단호하게 답했다.

호족이나 내가 할 수 없는 걸 흑막은 할 수 있다는 건가?

은빛 영웅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 땅에 사는 인류가 늘어나며 땅에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감정이 깃들었다. 그 감정을 삼킨 신보는 오염되었고, 제 성질을 바꾸었다. 그리고…….

은빛 영웅은 말을 아꼈다.

혹시 호족의 신보가 오염된 이유에는 뭔가 더 있는 걸까?

은빛 영웅은 잠깐의 침묵 끝에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호족의 신보를 손에 얻을 수 있는 건 타락한 자들뿐이다. 너나 호족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

타락한 자만이 호족의 신보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마왕이 호족의 신보를 손에 얻을 때까지.

“조의신,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그르르르!

손에 든 아이템 카드, 영국에서 열린 포모르 마족의 경매에서 얻은 다누 신족의 신보 ‘루의 창’을 실체화하자 주변에 양귀비 향이 진동했다.

피를 요구하는 루의 창을 재우기 위해 양귀비로 오랫동안 재워 뒀는데, 그래도 부족한 건지 루의 창은 피와 살육을 원하며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지금 루의 창을 놓을 수 없었다.

“신보를 제압하려면 이쪽도 신보를 들 수밖에.”

루의 창이 겨누어지자 우마왕이 핏발 선 눈으로 외쳤다.

우마왕은 이 창의 정체를 알아본 듯했다.

“상보심금파의 갈래를 쓴 후에 그 창으로 신보와 겨루겠다고? 오만한 인간이구나!”

우마왕이 품에서 호랑이가 조각된 향로를 높이 꺼내 들었다.

루의 창을 쥔 손이 떨렸다.

루의 창을 들어 이능파를 발산하면 수는 완성된다.

그런데 우마왕의 말대로 내가 오만했던 걸까, 힘이 따라 주지 않았다.

‘한 수만 더 두면 되는데!’

루의 창을 휘두르더라도 우마왕의 기운을 누를 수 있을까?

우마왕은 내 망설임을 읽은 것처럼 향로에 이능파를 실어 사기(邪氣)를 주변에 퍼뜨리려 했다.

황지호의 결계술이 먹히지 않는 그 힘은 은광고까지 퍼져 나갈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파스스…….

“아니……?”

향로를 높게 들어 올린 우마왕의 손에서 무언가가 부수어지더니 흩어졌다.

우마왕이 착용한 반지였다.

가루가 된 반지는 우마왕의 왼손에 들러붙다가, 우마왕의 손과 함께 녹아내렸다.

주르륵…….

녹아내리는 손을 본 우마왕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은 꾸역꾸역 재생되려 했지만, 우마왕은 실성한 것처럼 외쳤다.

“어째서, 어째서냐! 왜 나를 배신한 거냐, 나비령!”

나비령?

의문을 품는 대신 먼저 몸부터 움직이기로 했다.

이 호기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루의 창을 들어 우마왕의 남은 손을 찔렀다.

파아아앗! 툭…….

우마왕이 두 팔을 잃자, 향로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향로가 손에서 떨어지자 황지호가 즉각 결계술로 우마왕을 제압했다.

황금의 결계에 갇힌 우마왕은 넋이 나간 얼굴로 사라진 왼팔을 보고 있었다.

황지호가 우마왕을 상대하는 사이 나는 바닥에 떨어진 두 개의 물체를 집었다.

하나는 호족의 신보인 향로.

다른 하나는 구갈안나의 청금석으로 된 뿔이었다.

나는 황지호, 주수혁, 맹효돈, 유상훈과 거리를 두고 말했다.

“잠깐 개인적인 일로 어디를 갔다 오려고 해.”

“뭐?”

“구갈안나를 해방시켜 주는 대가로 명계 구경이나 할까 해서.”

구갈안나는 명계의 여왕, 저승의 여신 에레쉬키갈의 첫 번째 남편이었다.

그리고 에레쉬키갈은 이계 충돌로 인해 이 세계에 거대한 위기가 닥쳤을 때, 은빛 영웅에게 말을 건 수많은 상위 존재 중 하나였다.

에레쉬키갈은 은빛 영웅에게 구갈안나의 해방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요청을 지금 내가 받드는 중이다.

황지호는 내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아챈 듯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조의신. 살아 있는 너를 죽음의 신이 다스리는 영역에 가게 내버려 둘 것 같으냐?”

황지호가 말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리 말할 수 없었다.

“명계의 문이 열리면 이 땅이 휘말릴 거야. 결계를 펼쳐서 보호해 줘.”

“조의신!”

쿠구구구…….

콰콰콰콰콰!

청금석의 뿔과 향로에 이능파를 불어넣는 순간,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고 땅에서 뿜어져 나온 힘이 요동쳤다.

갈라진 땅 사이로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에레쉬키갈이 약속대로 개입한 거다.

〈스킬 ‘운명력’이 발동했습니다.〉

굉음 사이로 들린 시스템 음에 피식 웃을 뻔했다.

이때 발동하려고 여태까지 기다렸나 보다.

갈라진 땅 사이로 명계의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명계의 입구에는 격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파아아아!

황지호는 어느샌가 견고한 황금의 결계를 펼치고 있었다.

결계 뒤에 있는 이들이 보였다.

이 모든 힘을 흡수할 생각인 건지 방패를 들어 올리다 주수혁과 맹효돈에게 제지당하는 유상훈.

그리고 뭐라 뭐라 외치고 있는 황지호.

이 정도의 결계를 순식간에 전개했으면 진이 빠질 법한데, 소리 지를 여유가 있는 게 과연 신역의 수호자다웠다.

저놈이 있으니 여기는 안심하고 맡기고 나는 다녀와도 될 것 같았다.

다녀온다는 인사를 남기고 입을 쩍 벌린 명계의 입구로 뛰어내렸다.

몸을 던진 순간.

휘익!

무언가가 내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굳게 붙잡은 손의 주인을 올려다보고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여기에?’

손을 잡은 건 백호군이었다.

“잘했다, 백호. 조의신을 놓지 마라. 명계의 입구가 닫힐 때까지 붙잡고 있도록!”

멀리서 황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들린 탓인지 백호군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휘이이…….

명계의 입구가 닫히려 한다.

운명력이 보조하고 있다 한들, 상위 존재가 현세에 개입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을 텐데, 초조해졌다.

“놔 줘.”

“…….”

그렇게 말해도 백호군은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내 신체 능력치로 백호군의 팔 힘을 떨쳐 내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은 광림을 사용할 수도 없고, 상보심금파나 루의 창으로 백호군을 공격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머리가 굳은 것처럼 수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다녀올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녀오겠다는 약속뿐이었다.

백호군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다녀와라.”

그 말과 함께 백호군이 손을 놓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멀어지고, 나는 밑으로 빨려 가듯이 떨어졌다.

명계를 부르는 매개로 호족의 신보가 사용된 탓인지, 명계의 입구에는 호족의 정수가 콸콸 흐르고 있었다.

풍덩!

호족의 정수에 빠진 후에 나는 끝없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명계로 향하는 바닥은 생각보다 깊어서 숨을 오래도록 참아야 했다.

저 멀리 샘물의 수면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어느덧 검은 눈이 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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