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59)
87. 별이 없는 세계 (1)
황명호 대저택, 본채의 거실.
높은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트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트리가 지나치게 큰 탓인지 아직 꾸밀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 빈 부분은 현재 발붙임 사다리에 걸터앉은 은이호, 은서호, 은재호가 채우는 중이었다.
호족들은 은호의 후예들에게 밖에서 큰일이 벌어질 테니 저택 내에서 대기하라고 당부했는데, 심심해할까 봐 트리 장식을 맡기기로 했다.
아이들은 은광고의 크리스마스 이벤트에 참가하지 못하는 걸 애석하게 여겼으나 금방 트리 장식에 몰두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꼬마전구를 한 번 더 두르는 게 낫지 않아?”
“나는 장식용 볼을 더 달고 싶은데…….”
은재호가 들고 있는 상자에는 여러 가지 색의 오너먼트가 잔뜩 들어 있었다.
그걸 본 은이호가 밝게 말했다.
“그럼 외출하신 호족분들의 상징색을 하나씩 달자. 황호 님, 그래도 되죠?”
은이호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황호의 분신을 향해 물었지만,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현재 소파에 앉아 있는 황호의 분신은 60대 황명호의 모습이었다.
은광고 결계를 뚫는 데에 주력할 적이 황명호 대저택까지 노릴 가능성은 적었으나, 만일을 대비해 황호의 분신을 하나 배치한 상태였다.
현재 황호의 본신이 우마왕을 상대 중이었기에 분신의 반응이 느렸다.
뒤늦게 황명호가 은이호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인 게 고작이었다.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황호 님의 늙으신 분신의 반응이 많이 느리네.”
“아침부터 계속 자리에 가만히 앉아 계시잖아. 밖에서 움직이느라 힘드신가 봐.”
“의신이 형도 바쁘겠지? 마지막 별은 의신이 형이랑 장식하고 싶었는데.”
은호의 후예들은 아직 장식되지 않은 별 모양의 크리스마스트리 토퍼를 보며 아쉬워했다.
보통 트리 토퍼는 노란색이거나 빨간색인데, 그들이 준비한 건 검은색이었다.
검은 별에는 황금색, 적색, 청색, 백색, 은색의 펄이 들어가 있었다.
정교한 형태에 소재도 고급스럽고 호족들의 색이 골고루 들어가 후예들의 마음에 쏙 들었다.
“모처럼 주문 제작한 토퍼가 예쁘게 나왔는데, 아쉽다.”
“어디에서 주문한 걸까?”
“황호 님이 안 알려 주셨어.”
“그래? 다음에 또 주문하자.”
그 검은 별 모양의 크리스마스 토퍼의 제작자는 바로 은호였다.
크리스마스트리에 검은 별을 장식할 예정이라는 황호의 말에 은호는 바쁜 와중에도 바로 제작에 돌입하여 크리스마스 전에 토퍼를 완성했다.
후예들은 그 사실을 조금도 몰랐으나 결과물에 몹시 만족해하고 있었다.
상자에 담긴 토퍼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이 문득 시계를 보고 화제를 바꾸었다.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났어. 우리가 밥하자!”
“그래, 황호 님은 바빠 보이니까 우리가 준비하는 게 좋겠다.”
“산령에게도 도와달라고 할까? 응?”
주변을 둘러봤지만 산령이 보이지 않았다.
트리가 커서 그 사이에 숨었나 싶었지만, 꼼꼼하게 살펴보아도 산령을 찾을 수 없었다.
“산령은?”
“처음엔 같이 트리 장식하는 걸 도왔는데…….”
“장난치려고 숨은 거 아냐?”
“산령아, 어디 있어?”
은호의 후예들이 산령을 불러 봐도 답이 없었다.
평소에 산령을 잡아 오던 백호나 신수도 없어 난감했다.
그 이후로 그들은 본채 안을 수색했지만 산령은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은호의 후예들은 결국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한 채로 다시 트리 앞으로 돌아왔다.
온갖 장식이 달린 트리에는 여전히 별이 없었다.
* * *
은광고에 이상이 발생한 후 약 3시간이 지난 시점.
동문, 서문, 남문, 북문 각 출입구에서 발생한 이계의 공략이 완료되기 시작했다.
이계의 틈이 소멸할 기미가 보이자 수비대를 담당하던 이들이 희색을 보였다.
공격대로 선발된 이들은 전원 이능독 해독제를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정예 중 정예였으나,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이능독의 근원으로 추정되는 이계가 사라지고, 공격대 멤버가 돌아올 거라는 생각에 모두가 안심했다.
희소식은 더 있었다.
전서구 아이템을 사용해 연락을 취하던 플레이어가 디바이스를 보다가 크게 외쳤다.
“위성 정보 수신이 재개되었습니다!”
“나도 디바이스를 확인해 볼게요. 잠깐, 통신 상태도 원래대로 돌아왔나 봐요!”
드디어 플레이어 위성 정보 수신과 통신이 가능하게 되었다.
원인 불명의 통신 장애가 해소되자 플레이어들이 착용한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많은 메시지 중 가장 위에 떠오른 건 플레이어 위성이 보낸 경고 메시지였다.
밀려 있던 경고 메시지는 빠르게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되었다.
가장 위에 떠오른 메시지는 이계 공략의 완료를 알리는 메시지였다.
―해당 지역의 이계가 공략되었습니다.
공략 완료 메시지와 함께 소멸하는 이계의 틈에서 공격대가 귀환했다.
이능독의 해독제를 먹으면서 이계 공략에 임했던 탓인지 부상자가 꽤 보였다.
회복 아이템은 부작용으로 인한 내장 손상을 치료하는 데에 써야 해서 외상을 방치할 수밖에 없으니 예상보다 부상자가 더 늘어났다.
하지만 전원 생환하는 데에 성공했다.
공격대가 귀환하자 플레이어 위성이 추가적으로 메시지를 더 보냈다.
―플레이어SAT-K가 해당 지역의 기록 기기에 성공적으로 접근하였습니다.
―플레이어SAT-K가 공략 과정의 전후 관계를 분석합니다.
―공략 최대 공헌자: 무쇠팔
―공략 최대 공헌자: 홍염의 제왕
―공략 최대 공헌자: 청룡
팀 마스터의 이명, 용족의 수장이 최대 공헌자로 꼽힌 걸 보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에는 영원의 호수가 있으니 다음 최대 공헌자는 푸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다음에 떠오른 이름은 푸른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었다.
―공략 최대 공헌자: 검푸른 장막
검푸른 장막, Dark Blue Curtain은 재러드 리의 이명이었다.
권제인이 최대 공헌자가 아닌 걸 의외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으나 재러드 리도 우수한 플레이어였기에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은광고 주변의 모든 이계 공략이 끝나자 이능독이 사라졌다.
아직 결계가 정상화되지 않았으나 상황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통신이 정상화 되었으니 다른 지역에서도 이계가 공략되면 지원을 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수비대를 맡은 플레이어들이 밝은 목소리로 귀환한 공격대원들에게 말을 걸었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부상자를 수송하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뒤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를 뜨려 하는 공격대 소속 플레이어는 아무도 없었다.
부상을 입은 플레이어도 경상이라며 이 자리에서 버티려 했다.
각지의 공격대원들은 결계로 인해 외부와 단절된 상태인 은광고를 보며 비슷한 말을 하며 이 자리에 남았다.
“학생들의 안전을 확인할 때까지는 자리를 뜨지 않겠다.”
“하지만 결계가 언제 정상화될지 모르는데…….”
“…….”
귀환한 플레이어들은 확답할 수 없었지만, 곧 결계 문제도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믿고 있었다.
그들을 이 자리에 모은 은인, 조의신이 수를 뒀을 거라고.
* * *
은광고 서문 주변, 죽림.
김유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모든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리의 기다림에 보답하듯, 디바이스에서 알람이 울렸다.
아직 학교 안과 밖은 통신이 되지 않는지 안에 있는 아이들로부터 온 메시지는 없었다.
하지만 학교 밖에 있는 이들과 위성 간의 통신은 원활했다.
“저,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김유리는 제일 먼저 부모님께 자신은 괜찮다고 안심시켜 드린 후, 디바이스 메시지를 작성하며 안부를 전했다.
발이 넓은 김유리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유리의 메신저에는 친척,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의 반별 동아리별 동창, 외부 활동에서 친해진 친구 등등의 카테고리에 속한 이들이 보내는 메시지로 가득했다.
김유리가 디바이스 메시지를 작성하려던 중, 문득 가장 많은 알림이 도착한 그룹, ‘♡1학년 0반^▽^♡’이 눈에 띄었다.
그룹에 소속한 멤버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은데, 김유리가 몹시 걱정되었나 보다.
‘네온이랑 슬비도 소식을 들었구나. 국내에서는 통신 장애가 있었으니까, 오히려 해외에서 소식이 빨리 돌았겠지.’
갑자기 한국의 플레이어 위성이 제 기능을 못 하는 걸 플레이어 총본부에서 확인하고 경보를 울렸다.
총본부에서는 한국으로 파견할 플레이어를 선발해서 지원을 보내고, 이 과정이 뉴스화되었다.
그걸 본 관종 두 사람은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옹길동과 구슬비의 마지막 메시지는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는 내용이었다.
비록 둘이 사건 시각에 맞춰서 도착하진 못했지만, 크리스마스를 함께 즐기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김유리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게 되면 꼭 두 사람을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음 메시지를 읽었다.
다음 메시지는 은광한빛보육원에서 열리는 자선 행사에 참가한 독고미로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미로*゚▽゚♡] 공청훤 선생님이 갑자기 자리 비워서 좀 알아봤는데.
[미로*゚▽゚♡] 학교에 일이 터진 것 같더라.
[미로*゚▽゚♡] 나도 간다.
어쩐지 독고미로의 짧은 메시지에서 박력이 느껴졌다.
김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독고미로가 한 손으로 모닝스타를 들고 은광고로 쳐들어오는 장면을 떠올렸다.
하지만 독고미로의 시도는 실패한 것 같았다.
그 이유는 한이의 메시지로부터 알게 되었다.
[한이・▽<♡] 자원봉사자분들이 막아서 못 가는 중.
그 메시지를 보며 김유리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출입구 주변에는 플레이어 팀들이나 용족이 있으니 두 사람이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게 막아 줄 테지만, 그 주변 상황이 워낙 험하지 않은가.
독고미로와 한이가 오지 않고, 보육원에 두 사람을 말릴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는 사실에 김유리가 안심했다.
“이제 가자! 아, 개심심했다.”
메시지 작성을 마쳤을 때, 견족의 수장이 더벅머리 위에 후드를 덮어쓰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견족의 수장은 의욕에 차 보였다.
“개센 부부 때문에 몸 풀 기회가 없었거든. 뭐, 원래 싸우러 온 건 아니지만. 드디어 내가 힘을 발휘할 때가 왔네.”
견족의 수장은 죽림에서 싸우기 위해 부른 게 아니었나?
아무래도 김유리의 예측이 잘못된 것 같았다.
견족의 수장이 하는 말에 의하면, 죽림을 습격한 이들은 죽호와 호족 부부에 의해 처리되어 그녀가 나설 틈이 없었다고 한다.
“저, 어디 가시는 건지 물어도 될까요?”
“결계 풀려고.”
“……!”
그 말에 김유리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학교 안에 있는 애들과 만날 수 있어!’
김유리가 들뜬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이 따라가도 될지 안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죽호에게 물었다.
“저도 가도 될까요? 반 아이들이랑 친구들이 걱정돼서요. 의신이한테 선물을 전해야 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말하는 김유리의 손에는 엄중히 봉인된 호족 부부의 선물이 있었다.
죽호는 저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제자의 손에 있는 게 걱정되기도 하고, 친구들을 걱정하는 제자의 마음이 기특하기도 해서 얼른 허락하였다.
“물론이에요. 대신 나도 같이 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견족의 수장과 함께 움직이기로 한 동행자는 김유리, 죽호 외에도 더 있었다.
바로 호랑이의 모습을 한 견족의 신수였다.
크르르…….
“그래그래, 호족의 신수는 저 너머에 있을 거야. 금방 만나게 해 줄 테니 안심하라고. 빨리 보고 싶으면 나를 도와.”
크릉.
견족의 수장이 달래자 신수가 바로 진정했다.
그렇게 진족 둘, 사람 하나, 신수 하나가 죽림과 천익산이 맞닿은 결계의 경계로 향했다.
경계 주변에 도착하자 척 보기에도 상태가 안 좋은 결계가 보였다.
탁한 빛을 띠고 있었고, 결계에 등록되어 있어도 통과할 수가 없었다.
“이계 공략이 완료된 지 꽤 됐으니까 그놈의 이능독이 가라앉았겠지?”
“그럴 거예요.”
“좋아.”
죽호의 답변을 들은 후, 견족의 수장이 불투명한 결계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에서 이능파가 피어올랐다.
파아아아…….
뒤에 서 있는 김유리에게 견족의 수장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긴 옷과 후드 아래의 실루엣이 변하는 게 보였다.
12지 동맹의 약조에 따라 결계 조작을 위해 짐승의 화신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개의 귀가, 꼬리가 완전히 돋아났을 때, 견족의 수장이 외쳤다.
“결계를 재가동한다!”
컹!
견족의 수장이 하는 말에 이어 신수가 응했다.
신수는 어느샌가 호랑이가 아닌 개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김유리가 경악하고 있을 때, 은광고의 거대한 결계 테두리에서 일제히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빠른 결계의 재가동을 위해 견족의 수장이 사전에 은광고에 뿌려 둔 안배였다.
슈우우우…….
빛 사이로 결계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재가동된 결계는 김유리가 알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불투명했던 결계 너머에는 반가운 이도 있었다.
1학년 0반 소속의 돌아이, 황지호의 모습을 한 황호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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