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64화 (660/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64)

87. 별이 없는 세계 (6)

은호의 입에서 옥토연의 이름이 나오자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으나 황호는 점차 냉정을 되찾았다.

은호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을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조의신이 명계로 향한 상황에서 갑자기 옥토연과 만나기를 청하는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황호는 그렇게 생각하긴 했으나 불쾌감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옥토연이 회토의 토끼이기 때문인가?”

“네. 토연 님은 죽음의 영역에 관해서 가장 해박한 진족이에요. 해박하다기보다는 경험이 많다고 표현해야 하겠지만요.”

“그 망할 달토끼를 죽여서 명계에 마중이라도 보낼 생각이냐? 그럴 계획이라면 찬성하마. 망할 달토끼가 우리에게 진 빚이 많으니 그 정도는 감당하겠지.”

어린 모습을 한 황호가 진지하게 말했다.

황호에게서 희미한 살기가 느껴지는 게 은호가 그러자 하면 바로 옥토연을 죽이러 갈 것 같았다.

“설마요. 제가 황호 님께 그런 걸 부탁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실행할 의사가 있다만.”

“농담이라고 생각할게요.”

은호는 옥토연을 죽이지 말라고 완곡하게 돌려서 말했다.

황호는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디바이스 메시지를 작성했다.

마침 옥토연은 한가했는지 바로 답했다.

어쩐지 기운이 없는 것 같기도 했지만, 황호의 속을 긁는 소리가 섞여 있는 걸 보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망할 달토끼] 나 이제야 협회에서 나가서 집으로 가는데 왜 불러내? 황호는 안 바빠? 한가해서 좋겠다.

옥토연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알았다. 꺼져라.’라고 답변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황호가 답하기 전에 옥토연이 메시지를 보냈다.

[망할 달토끼] 아, 잠깐. 서호랑 이호랑 재호 만나게 해 주는 거야? 크리스마스 파티 하는 거지? 애들이 나 보고 싶대?

[망할 달토끼] 바로 갈 거야! 선물 챙겨서 토윤 언니랑 갈게! 같이 가도 되지? 그치?

황호는 저택으로 오라는 말만 했는데 옥토연이 멋대로 착각하여 말했다.

황호는 그 착각을 정정해 줄 마음이 없었기에 답변을 안 적고 화면을 꺼 버렸다.

‘옥토윤과 함께 움직인다고 했나.’

옥토윤까지 부를 예정은 없었으나 어차피 그나마 토족 중에서 제대로 된 정신머리가 박힌 게 옥토윤이니 허락하기로 했다.

옥토연이 은호를 보고 놀라 나자빠지면 누군가 뒷수습을 해야 하기에 딱 적절했다.

은호도 옥토윤의 동행을 허락할 생각인지 황호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기다려 보죠. 토연 님과 토윤 님이 오시기 전까지 도착하면 좋을 텐데요.”

“무엇을 기다리는 거지?”

“의신이 형이 보낸 메시지요.”

황호는 은호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명계에 있는 조의신이 메시지를 보낼 수 있나? 조의신이 귀환 후에 보낼 메시지를 의미하는 건가?’

황호가 의문을 품자 은호가 설명을 덧붙였다.

“의신이 형이 이런 식으로 자리를 비울 때에는 항상 메시지를 남기거든요.”

“조의신이 메시지를 남긴다고?”

“네. 걱정을 덜어 준답시고 사전에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당황하지 말라면서 메시지를 남기죠. 의신이 형은 그걸 배려라고 생각하나 봐요.”

“많이 겪어 본 것처럼 말하는군.”

“몇 번 있었죠. 크리스마스 파티 때에도 겪어 봤어요. 미리 의신이 형이 말해 줬으면 과외하는 학생과 협상을 하거나 대타를 구하거나 파티 일정을 조정했을 텐데요.”

은호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며 말했다.

조의신은 은호가 그런 수고를 들이는 게 싫어서 말을 안 하는 게 분명했다.

한편, 황호는 은호의 말에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조의신이 영국으로 떠날 때 미리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던가.

―[조의신] 영국에 다녀올게.

그 무정한 메시지를 떠올리니 두통이 절로 솟아 황호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때보다 상황이 나빴다.

영국에 갈 때는 성국언과 전무영이 동행했으나 이번에는 명계에 조의신 홀로 떠났다.

게다가 방송국 사건보다 훨씬 큰일을 겪고 갔으니 황호의 근심은 더욱 무거워졌다.

다음에 이어진 은호의 말에 황호의 걱정은 극에 달했다.

“제가 마지막으로 받은 메시지는 유서였죠. 의신이 형은 이전의 세계에서 이곳으로 사라진 이후였고요.”

“……유서라고!”

딩동.

유서라는 단어에 황호가 분개한 순간, 황호와 은호의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 이 세계에 없는 이로부터 온 예약 메시지였다.

[조의신]

메시지 발신자를 보고도 황호와 은호는 곧바로 확인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    *    *

은광고 출입구 주변.

인파에 섞여 적호가 이동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어졌다. 은호보다 늦을지도 모르겠군.’

적호는 백호가 천익산으로 가 버린 이후, 쉬지 않고 일했다.

사태가 종료되어 결계가 재가동되기 전에 사로잡은 진족들을 치워야 했기 때문이다.

은광고 안에서 지맥을 뒤틀려던 무엄한 이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고, 끝까지 무의미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기에 작업은 쓸데없이 오래 걸렸다.

그들을 제압하고, 봉인하고, 옮기고, 분류하여 은영관 지하에 처넣는 일은 생각보다 번거로웠다.

물론, 아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그런 번거로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마지막으로 본 아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여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적호는 그 원인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용제건이 눈가리개를 착용하고 있었지. 곧 그 용은 승천할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면 용제건을 적뢰로 구워서라도 말리고 싶었으나 애써 참고 있었다.

김신록에게 웅족을 상대로 싸울 힘을 주겠다며 저러는 걸 보니 말리기 더욱 어려웠다.

‘이번에 웅족과 싸웠으니 그 결심이 더욱 굳어질지도 모른다.’

백호와 유상희가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하나 그 상황을 생각하면 아찔했다.

김신록은 웅족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물며 용제건은 그걸 제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이게 전부 그 망하고 썩어야 할 미친 웅족들 탓이라는 생각에 적호는 거칠고 사나운 생각이 들었다.

적호는 그 난폭한 생각 속에서 문득 번민의 곰인지 나발인지가 지껄였던 말이 떠올렸다.

―나는 네 아내가 몸을 담은 진웅팔선의 일각이니까 그자가 모르는 것도 안다.

―부부가 서로를 이렇게 애틋하게 여기는 중인데 떨어져 있어야 하다니, 참으로 괴로운 일이야. 안 그래?

번민의 곰은 마치 비탄의 웅녀가 적호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너무나도 고운 옛 정인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 실성한 곰의 미친 소리를 머리에 담아 둘 필요가 없다.’

적호는 수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상념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적호의 그런 의지와 다르게 묘하게 마음에 걸렸던 것들이 자꾸 떠올랐다.

키모폴레이아호에서 갈래를 맞고 잠시 실종되었던 저강렵이 돌아왔을 때.

저강렵에게는 갈래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으나 복부에는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비몽사몽한 와중 저강렵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붉은 드레스…… 죽인다…….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적호는 옛 정인을 떠올리고 말았다.

옛 정인은 적호가 다치고 올 때마다 붉은 천을 두르고 사냥에 나서서 어떤 식으로든 되갚아 주고 돌아왔다.

적호가 바위에 긁히면 바위를 부수고, 샘물에 사레가 들리면 샘물을 마르게 했다.

그리고 저강렵은 상보심금파로 적호의 배를 꿰뚫었고, 이후 역으로 배가 꿰뚫린 채로 붉은 드레스에게 적의를 드러내었다.

‘붉은색은 흔한 색 아닌가. 굳이 옛사랑을 떠올릴 이유가 없다. 다 허튼소리고, 근거 없는 망상이다.’

적호가 망상이라고 치부하는 상념에 흐릿한 광경이 하나 추가되었다.

조의신이 보여 준 리플레이 속, 진눈깨비 아래에서 고운 이가 적호를 내려다보며 울고 있었다.

그 고운 이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죽기 전에 헛것을 본 것이다. 조의신은 그날 눈만 내렸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풍백과 우사는 진눈깨비가 아니라 눈을 불렀다.’

적호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였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적어도 저택에 가기 전에는 생각을 지워야 했다.

적호가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을 때였다.

‘……뭐지?’

은광고의 출입문을 오고 가는 이들 사이로 레이스 양산을 든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구름이 없다고 하나 이 계절에 양산을 쓰는 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능이라도 쓰고 있는지 누구도 그 양산을 들고 있는 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적호가 안광 스킬을 사용해 그 누군가를 관찰하다가 경악하였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이가 레이스 양산을 기울였다.

부채로 가린 탓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 누군가는 적호를 살피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은 적호의 발 쪽으로 향해 있었다.

호랑이 덫, 물푸레나무 창애에 부수어졌던 발 쪽이었다.

지금은 멀쩡한 발을 보고 그 누군가는 안도하는 것 같았다.

“잠깐!”

그러나 적호가 붙잡기 전, 시야 속에서 그 누군가는 사라져 있었다.

*    *    *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건물, 후문 주변.

만일을 대비해 토족의 신역을 지키고 있던 옥토윤이 옥토연을 데려가기 위해 마중 나왔다.

옥토연은 에어 리무진에 냉큼 올라타며 말했다.

“언니, 빨리 가자!”

“그래. 애들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비령의 나비가 두른 불길한 기운에 꿈쩍도 못 하던 옥토연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을 풀었다.

무섭긴 했지만, 꺼림칙한 쥐와 쥐에게 가호를 받은 인간이 사건을 해결했고 불길한 기운은 사라졌다.

또, 크리스마스에는 못 만날 거라고 생각했던 은호의 후예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 옥토연이 더 이상 축 처져 있을 이유는 없었다.

‘위기의식이 금방 옅어지는 게 단점이긴 한데…… 토연이가 무사하니까 됐지.’

옥토윤의 속도 모르고 옥토연은 신이 나서 선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토족 측에서 준비했던 크리스마스 선물들이었다.

“이건 서호 거, 이건 이호 거, 저건 재호 거! 마지막은 은인 줘야지!”

“그래, 직접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두 토끼는 들뜬 마음으로 미친 호랑이 저택에 도착했다.

옥토윤은 달토끼떡에서 크리스마스 한정품으로 나온 트리 모양의 떡케이크를 들고 신중하게 걷고, 옥토연은 산타 모자를 쓴 토끼 모양의 무드등과 당근 모양의 꼬마전구가 포장된 상자를 들고 뛰었다.

미로 정원을 통과하는 셔틀에 올라타려 할 때, 어린 모습을 한 황호가 제지했다.

“이쪽이다.”

“왜? 저거 안 타? 짐 많아서 타고 싶은데?”

“따라오지 않을 거면 꺼져라.”

“안 꺼질 건데?”

옥토연은 구시렁거리면서도 황호 말대로 했다.

황호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지나치게 속을 긁었다간 정말로 후예 얼굴을 못 보고 꺼져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 날에 쟤는 왜 저래?’

‘……혹시 토연이가 선을 넘으면 황호가 죽이기 전에 데리고 도망쳐야겠어. 도망칠 수 있을까? 선을 넘기 전에 토연이의 등짝을 때리는 게 안전하겠네.’

황호는 현대식 별채 앞에 멈춰 섰다.

건물의 외견으로 보았을 때, 딱히 파티용으로 쓸 만한 곳은 아니었다.

“왜 여기로 왔어? 애들은 본채에 있을 거 아냐.”

“…….”

옥토연이 물어도 황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현관문을 열었다.

현대식 별채의 겉모습은 그저 그랬지만, 내부는 제법 잘 꾸며져 있었다.

가구와 벽지의 색과 곳곳에 걸린 크리스마스 리스가 적절히 조화되어 있었다.

리스와 장식품 몇 개만으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전부 수제 제품인데 누가 만든 거야? 애들 솜씨가 벌써 이만큼 늘었나? 아니야, 저번에 사진 보낸 거 보면 절대 아닌데. 황호가 이 바쁜 시기에 직접 했나? 많이 심심했나?’

옥토연이 붉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무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 두 토끼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뵙네요. 보고 싶었어요. 토연 님, 토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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