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72)
88. 굴레 (6)
은광고 거주 구역 지익회관 중앙 홀.
긴 하루가 끝나 가고 있었으나 기숙사생 대다수가 잠들지 않고 모여 있었다.
이들 중 부상자는 아무도 없었다.
전투에 참가한 학생들 전원 오후 즈음엔 양호실에서 실시한 치료 및 검사를 마쳤다.
은광고의 양호실과 황명은광병원의 물 흐르는 듯한 연계에 학생들은 어리둥절했다.
이들은 마치 전투가 일어날 것을 상정한 것처럼 빠르게 대응했으니까.
학교 측에선 연초에 실시할 체력 검사에 맞춰 인력과 비품을 사전에 준비했다고 둘러댔으나 이는 모두 조의신의 안배 중 하나였다.
“사람 엄청 많다. 검사 끝난 사람들은 다 중앙 홀로 온 걸까?”
“기숙사 건물 불 꺼진 걸 보니까 아마도.”
지익회 소속 1학년 기숙사생, 박승현과 김현구는 학생들로 가득한 중앙 홀을 둘러보며 잡일을 했다.
그들이 담당한 업무는 전투 준비의 흔적이 남은 중앙 홀을 청소한 후, 다시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게 꾸미는 것이었다.
작업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둘을 제외한 지익회 부원은 다른 업무를 하고 있어 일손이 모자랐던 탓이다.
이대로 가다간 자정이 될 때까지 성탄절 분위기로 꾸미기는커녕 청소를 끝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저도 도와도 되나요?”
“나도 하고 싶어!”
“나도.”
그때, 1학년 0반 학생들이 돕겠다고 말을 꺼냈다.
사월세음, 권레나, 한이, 맹효돈 넷이 두 사람 앞에 서 있었다.
둘은 기꺼이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 고맙다.”
“0반 애들이 다 도와주는 거야? 아, 의신이랑 우람이가 안 보이네.”
“우람이는 공방에서 작업할 게 있대요. 의신이는 학교 밖이라고 연락이 왔고요.”
“의신이가 빨리 돌아올 수도 있다고 해서 기다려 봤는데 오늘은 못 오나 봐.”
1학년 0반의 네 학생이 합류한 데에 이어 다른 기숙사생들도 하나둘 돕겠다고 나섰다.
그러다 보니 크리스마스 기간에 기숙사에 남기로 한 학생들 대부분이 작업에 참가했다.
싸우느라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쉬워 놀고 있는 학생.
결계 안에서 긴 시간을 보냈기에 수면 리듬이 엉망이 되어 잠이 오지 않은 학생.
아직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워서 사람이 많은 곳에 있고 싶은 학생.
그리고 사건 뒷수습을 도우려고 남아 있던 학생 등등.
이들이 모두 참가한 덕에 중앙 홀은 지익회 부원들끼리 꾸몄을 때보다 더 멋지고 화려해졌다.
“와, 끝났다!”
“밖에 나갔던 선배들 오고 있네. 부서진 설비 교체 끝났나? 이제 우리 쉬어도 되냐?”
“안될걸. 재단 홍보팀에서 아침까지 진술서 보내 달라고 했대.”
“그건 시완이 형이 대표로 작성하는 거 아니었냐?”
“시완이 형이 공격대를 맡고, 이담이 형은 수비대 최전선에 있었잖아. 그때 지익회관 상황은 우리가 더 잘 알걸.”
“아…… 귀찮다…….”
김현구는 의욕이 없는 얼굴로 종이로 된 구체 오너먼트에 이능파를 불어넣고는 툭툭 발등으로 쳐서 올렸다.
몇십 시간 동안 축구를 안 했더니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박승현은 오너먼트로 트래핑하는 김현구를 잠시 지켜보다가 말했다.
“내가 할게. 나는 별거 안 해서 체력이 남아돌아.”
박승현은 전투 때 무력했던 모습을 회상했다.
은광고의 전투 커리큘럼을 충실히 따라갔으니 실전에서도 보통 이상은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초반엔 그럭저럭 싸웠으나 조금 강한 에너미가 등장하자 곧바로 위기를 맞이했다.
‘그때 의신이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중상을 입었을 거야.’
박승현은 중앙 구역 쪽에서 벌어진 격전들에 관해 들었다.
마족과 그 권속들을 상대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박승현은 겁에 질렸다.
진족은 천익산 쪽에서도 나오지 않았던가.
만약 박승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다치는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지익회관에 함근형과 3학년 0반이 합류한 이후엔 박승현을 비롯한 1학년 학생은 대기 명령을 받았다.
말이 대기지 박승현의 차례는 사태가 종결되는 순간까지 오지 않았다.
‘내가 의신이나 수혁이 정도로 싸울 수 있었다면 대기 명령을 받진 않았겠지. 하지만 그게 별로 분하지도 않고, 아쉽지도 않아. 그래도 뭔가를 하고 싶긴 한데…….’
박승현은 어정쩡한 마음을 품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같은 1학년이면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운 조의신이나 주수혁이 굉장하다고 생각하지만, 딱히 자신도 그만한 실적을 내겠다는 의욕이 나질 않았다.
애초에 박승현은 훌륭한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서 은광고를 택한 게 아니라 지독한 괴롭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결국 괴롭힘은 은광고에서도 이어졌지만, 이는 만우절에 나타난 조의신에 의해 해결되었다.
이제 박승현을 괴롭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은광고 입시를 준비할 때처럼 절절한 마음이 없었다.
그래도 다른 애들이 싸울 때 지켜보고만 있는 건 싫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나도 보고서 쓸게.”
어느 사이엔가 김현구가 트래핑하는 걸 멈추고 박승현을 멀뚱하게 보고 있었다.
그러자 박승현은 문득 김현구의 사촌, 김철이 자신을 붙잡고 한 얘기가 떠올랐다.
김철은 박승현과 아주 유사한 광림을 쓰는 누군가를 찾고 있다고 했다.
서포트, 치유 계열 광림은 공격형 광림보다 드물기에 의외라고 생각했다.
‘현구네 사촌 형이 한 말에 의하면, 누군가의 그 광림은 내 것보다 더 굉장했어.’
김철은 키모폴레이아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밝혔다.
자연 이능파 방출 현상으로 인해 키모폴레이아호는 전복될 뻔했다고 한다.
이능파의 위력에 비해 충돌까지 남은 시간이 촉박하여 주오와 TC의 경호팀은 전멸할 각오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귀에 정체불명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고, 평소보다 강력한 이능파를 방출해 살아남았다.
‘이능파 출력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휘파람 소리가 커졌다고 했지. 철이 형이 묘사한 그 음과 흐름을 고려하면…… 아, 잘 모르겠네. 그때 더 자세히 들어 둘걸.’
김철이 박승현을 붙잡고 질문 세례를 했을 때, 박승현은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
어쩐지 김철이 제시하는 키워드를 들으면 자꾸 박승현을 구한 은인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박승현은 그와 비슷한 광림을 다룬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도원우의 ‘철쇄연쇄(鐵鎖連鎖)’와 같은 사슬의 광림을 다루던 조의신을 떠올렸다.
조의신은 키모폴레이아호에서도, 스포츠 교류전 개막식에도 있었다.
조의신은 교사도 알아채지 못한 괴롭힘을 파악하고 박승현을 구했고, 아무런 증거를 남기지 않고 부정 입학자의 이능을 지워 버린 은인이다.
그러니 무언가가 더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확실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는데 박승현은 자꾸 조의신이 떠올랐다.
‘철이 형 수준의 플레이어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진군가를 부르면, 나도 전투에 도움이 될 텐데. 철이 형이랑 다시 얘기해 봐야 하나? 아니면…….’
박승현의 고민이 깊어질 때, 성시완의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중앙 홀에 크게 울려 퍼졌다.
“자, 여기 주목!”
각자 무리 지어 흩어져 있던 기숙사생들이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거대한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지익회장인 계이담이 대표로 행사용 커팅 나이프를 들고 케이크 뒤에 섰다.
“다소 지연되었으나 지익회에서 준비한 크리스마스 행사를 진행하겠습니다. 기숙사생 수에 맞춰 케이크를 자를 예정입니다.”
본래 지익회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행사는 전부 취소된 상태였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학생들이 모이고, 뒷수습이 빨리 마무리되어 상황이 바뀐 듯했다.
마침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져 크리스마스이브가 끝나 가고 있었다.
시계 초침을 보며 카운트다운을 한 학생들이 일제히 외쳤다.
“메리 크리스마스!”
갑자기 시작된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는 기숙사생 사이에는 1학년 0반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잘됐네요! 여기 중앙 홀 닫으면 휴게실 가야 하나 싶었는데, 여기서 밤새도록 놀아도 될 것 같아요.”
“어…….”
“효돈아, 크리스마스 케이크 받으러 가요! 아까 간식도 잘 안 드시던데, 케이크라도 먹어요.”
조용히 제일 먼저 케이크 그릇을 받으러 간 한이가 고개를 휙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한이의 시선 끝에 전력으로 달려서 온 듯한 목우람이 있었다.
“우람이 왔다.”
“딱 자정에 맞춰서 왔네. 메리 크리스마스!”
권레나가 웃으며 목우람을 맞이했다.
목우람이 숨을 가다듬고 곧게 권레나를 향해 걸어갔다.
권레나의 미소를 마주하며 걸어가는 동안 목우람은 만감이 교차했다.
‘소중하게 여기던 바이올린이 산산조각 나 그렇게 슬퍼하셨으면서 웃어 주다니.’
권레나는 부서진 이능 바이올린을 두고 반 아이들 앞에서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권제인 앞에서는 달랐다.
재러드 리에게 인사하기 위해 영원의 호수가 대기한 회의실로 향하다 우연히 그 장면을 목도했다.
―선배님이 선물해 주신 바이올린을 잃었어요, 죄송해요.
―왜 레나가 죄송해하는지 모르겠어.
권제인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투로 물었다.
권제인은 그저 권레나가 무사한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한데 왜 사과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권레나의 안위에 비하면 이능 바이올린이 부수어진 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이후 권레나는 머뭇거리다가 바이올린이 부수어진 과정에 관해 자세히 말했다.
그 과정을 들은 권제인은 권레나와는 다른 이유로, 감격과 감동으로 인해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바이올린을 희생한 건 후회하지 않아요. 하지만…….
―……하지만?
―그 순간, 바이올린을 켜서 친구들을 구한다는 선택을 할 수 없을 만큼 실력을 키우지 못한 걸 후회해요. 바이올린이 부수어진 건 저 때문이에요.
권레나는 반 아이들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목우람은 권레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박차고 공방에 틀어박혀 권레나에게 줄 선물을 만들었다.
목우람의 뜻을 안 민그린은 귀가하기 전까지 조력해 주었다.
“레나, 좋은 성탄절입니다. 이걸 받아 주시겠습니까?”
목우람은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권레나는 목우람이 내민 작은 상자를 보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혹시 낯선 사람이 권한 비싼 물건을 산 건 아니지?”
“아닙니다. 이건 직접 제작한 물건입니다.”
“다행이다. 그랬구나! 그런데 크리스마스 선물은 나중에 다 같이 반 아이들이랑 교환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도 목우람은 선물을 내민 손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이건 성탄절 선물이 아닙니다. 그래도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목우람의 진지한 태도에 권레나가 조심스럽게 나무 상자를 받아 들었다.
상자를 받아 들자 목우람은 이번엔 상자를 열어 달라며 재촉했다.
권레나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지만, 저렇게 권하니 내용물이 신경 쓰였기에 일단 열어 보기로 했다.
“아…….”
상자의 뚜껑을 연 순간, 권레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상자 안에는 백금색의 바이올린이 있었다.
권레나가 기억하는 이능 바이올린의 모습 그대로였다.
기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바이올린은 손바닥에 올릴 정도로 작다는 점이었다.
“이거 우람이가 만든 거야……?”
“저 혼자 만든 게 아닙니다. 세음이를 비롯해 파편을 모으는 데에 도움을 준 분이 많습니다. 그린이는 귀가하여 작업에 직접 참가하지 못했지만, 도색에 사용할 염료와 광택제를 골라 주고 도안을 스케치했습니다.”
권레나는 작은 바이올린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목우람은 그러는 동안에도 성심성의껏 선물에 관해 설명했다.
“소리도 잘 안 나고 카드화도 안 되는 단순한 장식품이지만, 잔해를 모아 만든 바이올린 미니어처입니다.”
권레나가 말없이 상자째로 바이올린 미니어처를 품에 안았다.
입을 더 열면 눈물이 나올까 봐 권레나는 고맙다는 말을 한참 동안 하지 못했다.
목우람은 권레나가 기뻐하는 걸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정말 주고 싶은 선물은 따로 있었는데…….’
목우람은 교복 안주머니에 든 이능 바이올린 카드가 갑자기 무거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를 모르는 척했다.
돌아가기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