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73화 (669/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73)

88. 굴레 (7)

이계 충돌이 일어난 시점, 파수꾼은 예비 은광고생이었다.

사람들이 이계 충돌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전에 전 세계 중 한반도에 가장 먼저 이변이 일어났다.

이계와 에너미, 이능을 각성한 플레이어의 등장.

거대한 혼란 속에서 모두가 일상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

이계에 대응하기 위해 플레이어로 각성한 이들이 모여 협회를 세운다는 말이 돌기도 하고, 국방부에서 플레이어군을 편성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때 명계에 오기 전의 파수꾼은 플레이어로 각성한 상태였으나, 그저 은광고의 학생으로서 지냈다.

‘나는 광림과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플레이어야. 그런데 싸우지 않고 이렇게 평화롭게 학교생활을 해도 되는 걸까?’

세계가 변하고 파수꾼은 이질적인 힘을 얻었으나 전혀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은광고 안은 이계나 에너미가 나타나지 않았고, 가족이 없는 기숙사생인 파수꾼은 밖으로 나갈 일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누구도 그가 플레이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그에게 플레이어로서 힘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정부는 플레이어 육성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세우는 건 고사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정부가 제대로 기능을 하는 게 기적에 가까운 상황이었기에 대책을 요구하기 어려웠다.

은광고의 교사들은 학생의 본분은 공부임을 강조했다.

‘어른이 되면, 적어도 졸업하면 이 힘을 써서 싸우고 싶어.’

파수꾼은 얌전히 학생들 사이에 섞여 등교하면서도 늘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등굣길에선 늘 조간신문을 읽고 온 학생들이 철없이 학교 밖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에 관해서 떠들곤 했다.

저들이 저렇게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건 전부 은광고 학교 부지를 지키고 있는 결계 덕이었다.

“학교 안은 안전한 것 같아. 왜 그런 거야?”

“은광고 주변에 결계가 세워져 있대.”

“학교 이사장이 진족들과 계약을 나눈 거 아냐?”

은광고는 12지 동맹의 맹약으로 세운 결계로 지켜지고 있었으나 학생들은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결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긴 했다.

통찰계 이능을 개화한 일부 학생들은 정부 청사에 전개된 결계보다 은광고의 것이 훨씬 견고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그렇게 안온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중간고사 기간을 맞이했을 때였다.

파수꾼은 낯선 어른이 복도를 걷고 있는 걸 목격했다.

‘누구지? 처음 뵙는 분인데.’

그 교사를 목격한 다른 1학년 학생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교직원이라 생각하고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파수꾼은 은광고의 교직원,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전부 외우고 있었다.

그 낯선 교사를 관찰하던 파수꾼은 우선 인사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새로 오신 선생님이신가요?”

파수꾼이 말을 걸자 잠시 당황했으나 낯선 어른은 곧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낯선 어른은 교사 한 명이 에너미에 공격당해서 입원하는 바람에 급하게 뽑혀 부임했다고 밝혔다.

그 교사는 전체적으로 단정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한쪽 머리카락은 길게 내려와 있었다.

왼쪽 눈이 가려질 정도로.

자기소개를 마친 교사가 파수꾼에게 물었다.

“혹시 이능을 쓸 줄 아니?”

“네?”

“이능파가 느껴져서. 갈무리하는 법을 모르는가 보구나.”

신참 교사는 플레이어였고, 파수꾼이 이능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교사는 이능파를 흘리고 다니는 파수꾼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능파를 다뤄야 할지 가르쳐 줄까?”

*    *    *

나는 파수꾼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청했다.

그러자 파수꾼은 이계 충돌이 일어난 시점부터 이야기하였다.

거기부터 말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단서가 될 만한 사항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 그냥 듣기로 했다.

사실 그 시대의 이야기에 흥미가 있기도 했다.

‘이계 충돌 직후의 시대를 살았던 인간, 그것도 은광고 학생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건 귀한 기회야. 새겨듣자.’

은광고 이야기를 하던 파수꾼은 입학 후에 만난 어느 플레이어 교사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교사가 누군지는 단번에 알아챘다.

‘왼쪽 눈을 가린 친절한 신참 교사. 거기에 이능을 잘 다룬다면 김신록이겠네.’

이계 충돌이 일어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신록이 은광고에 교사로 부임했나 보다.

파수꾼은 김신록과 어떻게 만났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열심히 설명했다.

김신록은 파수꾼 외에도 플레이어들을 모아 방과 후에 이능을 다루는 법에 관해 가르쳤다고 한다.

“갑자기 용족이 선생님을 따라 나타났을 때는 많이 놀랐어. 처음엔 용을 직접 보는 게 참 신기했는데, 나중에는 그 용이 선생님을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서…….”

용제건은 그때도 김신록을 귀찮게 했나!

용제건이 김신록을 따라 교사가 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파수꾼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몇 달, 아니, 몇 주 정도 지난 시점에 바로 따라서 교사가 된 것 같은데.

참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100년 전에도 한결같았다.

‘김신록은 예나 지금이나 제자에게 인기가 많았고, 용제건은 금방 어그로를 끌었구나.’

파수꾼은 용제건의 방해를 곤란하게 여기면서도 적의를 품은 것 같진 않았으나, 다른 학생들의 반응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런데 파수꾼은 김신록이 호족의 후예라는 걸 알고 있을까?

의문을 품었을 때, 파수꾼이 금방 이를 풀어 주었다.

“그땐 몰랐지만, 그 선생님은 적호 님의 아드님이지? 내가 처가댁과 잘 지내면 가족처럼 지낼 수 있을까?”

파수꾼은 존경하는 선생님과 가족이 될지도 모른다는 게 기쁜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호랑이 처가댁이 파수꾼을 받아들인다 해도 김신록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먼 옛날,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제자가 알고 보니 호족의 초대 수장 은호의 사위였다는 걸 김신록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처가댁에 인정받기 전에 소멸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게 웃으면서 할 소리인가?

파수꾼은 가볍게 웃고선 다시 신나게 이야기했다.

시대와 이능에 관한 불안, 평온한 학교생활, 김신록의 자랑 등을 떠들던 파수꾼은 하복을 입은 이야기를 했다.

파수꾼이 여름에 겪은 에피소드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내가 죽은 건 여름방학 때였어.”

파수꾼은 갑작스럽게 삶이 끝나던 순간을 담담히 말했다.

*    *    *

여름방학 직전, 이계 발생 빈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곧 이계는 완전히 소멸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추측이 신문 1면에 등장하고 외출을 자제하던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은광고 밖으로 나가는 걸 자제하던 학생들은 몹시 들떴다.

특히 1학년들은 이계 충돌 이전의 고교생활이 어떤 것인지 맛보지 못했기에 여행 계획을 잔뜩 세웠다.

파수꾼이 소속한 반 아이들은 단체로 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이 여행을 나선 날, 아무런 전조 없이 이계의 틈이 열리고 에너미가 나타났다.

‘여태까지 선생님께 이능을 다루는 법을 배웠잖아. 싸워야 해!’

이때에는 플레이어 위성이 없었고, 통신 수단도 그리 발달하지 않았기에 주변 전황이나 지원이 언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파수꾼은 반 아이들을 도망치게 하기 위해 플레이어로서 싸웠다.

처음으로 경험한 실전이었지만 파수꾼은 굉장히 선전했다.

무기도 없이 주변의 모든 에너미를 제압한 건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끝은 갑자기 다가왔다.

파수꾼은 에너미의 것이 아닌 이질적인 이능파를 감지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에너미가 아니야. 누구지? 이상한 문양이…….’

하지만 판단을 마치기 전, 문양에서 뿜어져 나온 살기 어린 이능파가 파수꾼을 덮쳤다.

파수꾼은 생각을 매듭짓지도 못한 채로 사망했다.

파수꾼은 에너미와 싸우다 전사한 수많은 플레이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나는 죽은 거구나.’

먼 길을 걷고 또 걸었을 때 문득 파수꾼은 자신이 죽었음을 자각했다.

보통 망자는 자신의 죽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저 명계의 법칙에 따라 혼이 끌려가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혼을 타고난 파수꾼은 여러 법칙을 무시하였다.

파수꾼의 혼은 법칙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옳은 길을 택할 정도로 강력했다.

명계는 당시 이계 충돌로 인해 엉망이 되었기에 모든 혼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파수꾼은 혼자의 힘만으로 길을 찾아 윤회의 굴레에 도달했다.

[윤회의 굴레에 혼이 도착했다니!]

[드디어 명계의 법도가 제대로 세워진 건가?]

[아니다. 내가 다스리는 명계에 새로운 혼이 도달했다는 보고는 없다.]

[저자는 특별하구나. 수많은 신의 존재를 앞에 두고도 혼이 흔들리지 않는다.]

[강할 뿐만 아니라 맑고 깨끗한 혼이로다. 이런 혼은 먼 옛날 저승의 시련을 통과했던 그 아이 이후로 처음 본다.]

죽음의 신, 명계의 지배자, 명부의 주인들이 그의 혼을 보고 감탄했다.

명계와 이어질 윤회의 굴레는 누가 관리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는데, 순식간에 그들은 일치된 결론을 내렸다.

눈앞에 나타난 이자에게 파수꾼 역할을 맡기자고.

“네, 하겠습니다.”

파수꾼은 신들의 부탁에 흔쾌히 응했다.

정식으로 그를 파수꾼의 임무를 내리기 전에 신들은 그에게 권능을 나눠 주기로 했다.

아무리 맑고 강한 혼이라고 하나 육신 없이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웠기에 권능을 담은 몸을 선물해 주었다.

[명계의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주마.]

[언제 어디서든 망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받거라.]

[죽은 자를 인도할 수 있는 목소리를 줄게요.]

[어떤 강도 건너갈 수 있는 다리를 선물하마.]

파수꾼은 윤회의 굴레에서 새로운 육신을 얻고 새 삶을 시작했다.

신들이 준 육신과 권능을 짊어진 파수꾼은 더는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중대한 의무도 짊어지게 되었다.

[단, 명심하라. 강한 권능에는 무거운 의무가 함께한다는 것을.]

[우리와의 약속을, 명계의 법도를 저버리면 소멸할 수 있음을 잊지 말렴.]

파수꾼이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형태의 삶과 죽음의 경계는 제 기능을 하였다.

파수꾼은 경계에 서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삶과 죽음을 지켜보며 망자를 이끌었다.

아주 가끔 나타나는 강한 혼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날 때를 제외하면 파수꾼의 임무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살아 있는 자가 윤회의 굴레를 방문했다.

‘망자를 이끄는 목소리가 통하지 않아. 살아 있는 자다. 어떻게 온 거지?’

망자가 가야 할 길을 걷는 대신, 살아 있는 자는 파수꾼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살아 있는 자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은빛 그림자를 두른 여성은 파수꾼이 본 모든 혼 중 가장 강렬하고도 아름다운 빛을 지니고 있었다.

말 그대로 넋을 놓을 뻔했으나 파수꾼은 제 역할을 떠올리고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죽음의 법칙에 따라 여기에 온 게 아니군요. 무슨 목적으로 오셨죠?”

“구하기 위해서다.”

“무엇을요?”

그녀는 파수꾼을 곧게 응시하며 말했다.

“이 세계와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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