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74)
88. 굴레 (8)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삶과 죽음의 경계.
그곳의 윤회의 굴레를 지키는 파수꾼은 긴 시간을 체험해 왔다.
그 아득한 시간 속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혼은 없었고, 파수꾼에게 이런 말을 해 주는 이는 없었다.
파수꾼은 말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아름답고 강한 혼을 지니셨어요. 구세주에 어울리는 분이죠. 하지만 저는 이미 죽었는걸요.”
“죽은 자를 구하는 데에 무슨 문제라도? 너는 죽었지만 여기에 있지 않은가.”
파수꾼은 은빛 영웅이 한 말에 뭐라고 답하지 못했다.
잔잔했던 일상에 들이닥친 거대한 폭풍에 파수꾼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은빛 영웅은 파수꾼이 반박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나는 이 세계를 위협하는 자가 이계 충돌 후 제일 먼저 죽인 자를 찾고 있었다. 드디어 만났군.”
은빛 영웅의 말은 언뜻 듣기에 허무맹랑했다.
세계를 구한다, 세계를 위협하는 자가 있다는 등의 말은 보통 허황된 소리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세계가 위험에 처한 탓인지 아니면 발화자가 은빛 영웅이라서 그런 건지 모든 말에는 설득력이 넘쳤다.
“네 얼굴을 봤으니 이만 가겠다.”
예고 없이 나온 작별 인사에 파수꾼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렇게 특별한 혼을 타고난 자가 한가한 삶을 살 리가 없으니 바쁜 건 당연한데 마음이 좋지 않았다.
파수꾼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바로 물었다.
“또 오시나요?”
“물론이다. 너를 구한다고 했지 않았느냐.”
“윤회의 굴레에 오고 가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요.”
“쉽지 않아도 올 것이다.”
은빛 영웅의 대답에 파수꾼이 안도했다.
은빛 영웅을 배웅한 뒤, 홀로 남은 파수꾼은 아쉬움을 삼키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두르고 있던 은빛 그림자가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한 건 파수꾼의 체감상 며칠 정도의 시간이 흐른 이후였다.
‘나는 이계 발생에 휘말려 죽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걸까?’
은빛 영웅은 세계를 위협하는 자가 자신을 죽였다고 했다.
그 말이 거짓일 것 같지는 않았다.
파수꾼은 아주 멀게 느껴지는 죽음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이질적인 이능파가 느껴지고, 이상한 문양이 보인 직후에 죽었었지. 나는 에너미에게 당한 게 아니었나 보다.’
에너미와 싸운 건 처음이었고, 지식도 없었으니 확신할 수는 없었다.
파수꾼의 생각에 답을 줄 수 있는 건 은빛 영웅뿐이었으니, 지금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오는 게 쉽지 않아도 오신다고 했지. 무사히 오셨으면 좋겠다.’
파수꾼은 차마 은빛 영웅이 이곳에 오지 않도록 말려야 한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보고 싶었으니까.
그녀는 파수꾼을 구하겠다고 했는데,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해진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 끝에 은빛 영웅이 다시 나타났다.
“그사이에 풍경이 많이 바뀌었군.”
은빛 영웅은 느긋하게 윤회의 굴레를 둘러보며 파수꾼을 향해 걸어왔다.
윤회의 굴레는 망자들의 한(恨)에 따라 형태를 달리했는데, 거기에 맞춰 파수꾼도 제 모습을 바꾸곤 했다.
망자들이 원하는 모습을 하는 게 일이 더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파수꾼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몹시 당황했다.
파수꾼은 은빛 영웅의 말을 듣고서야 그녀가 없는 사이 윤회의 굴레가 모습을 바꾸었음을 인지했다.
“오래 기다렸나? 나는 최대한 빨리 온 건데.”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까요. 어쩔 수 없죠.”
“이곳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지?”
파수꾼은 은빛 영웅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둘은 잠시 시간의 흐름에 관해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은빛 영웅이 말한 현세의 오늘 날짜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이계 충돌이 일어나고 고작 수십 년밖에 안 흘렀나요? 아무리 시간 차이가 난다고 해도 수백 년은 훨씬 지났다고 생각했어요.”
“너는 그렇게 느꼈나? 이곳에서 긴 시간을 보냈나 보군. 혼자서 수고가 많았다.”
“제가 선택한 일인걸요. 오고 가는 혼이 많아서 혼자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어요.”
파수꾼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점차 그는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은빛 영웅이 현세로 돌아갈 때마다 쓸쓸하고 외로웠다.
그러나 은빛 영웅은 살아 있는 자였으니 윤회의 굴레에 길게 머무를 수 없었다.
은빛 영웅은 현세를 오고 갈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저를 어떻게 구하실 건가요?”
“지금 구하고 있다.”
어느 날, 파수꾼이 용기를 내어 한 질문에 은빛 영웅이 답했다.
물론 그녀가 곁에 있으면 파수꾼은 행복해지므로 구해졌다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은빛 영웅의 의도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윤회의 굴레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그자의 계획을 방해할 수 있다. 내가 있는 한 그자는 너와 이곳에 손을 대려 하지 않을 테니까.”
“어째서죠?”
“내 눈에 띄면 그가 둘 수를 읽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신중한 자이니 몸을 사리겠지.”
그자는 은빛 영웅이 머무는 동안에는 감히 흉계를 꾸미지 못하는 것 같았다.
파수꾼은 은빛 영웅이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오는 걸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짧게 느껴지는 만남과 긴 기다림을 반복하던 어느 날이었다.
“이런…….”
은빛 영웅이 한 방향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 너머에는 붉은 눈의 토족이 있었다.
옥토연을 발견한 파수꾼이 반갑게 말했다.
“아, 옥토연 님이 오셨네요. 전에 뵌 적이 있어요. 혹시 당신과 아는 사이신가요?”
“가족이나 다름없는 분이다.”
가족이나 다름없다는 말에 파수꾼은 긴장했다.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인사를 준비하는데, 어째 옥토연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옥토연은 토족답게 발이 빨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곤 파수꾼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파수꾼! 네가 우리 애를 꼬셨어? 어떻게 이런 먼 곳으로 불러낼 수가 있어! 파수꾼은 착한 줄 알았는데!”
파수꾼은 당혹스러웠다.
삼자대면은 처음인데 옥토연은 파수꾼이 품은 마음을 단번에 꿰뚫어 본 듯했다.
헛된 마음을 품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나 파수꾼은 그러지 못했다.
저렇게 멋진 존재가 나타나서 자신을 구하겠다고 하니 사랑에 빠지지 않고 버틸 수 없었다.
“파수꾼이 저를 부른 게 아닙니다.”
“하지만 쟤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리고 쟤 지금 내 말 듣고 엄청 얼굴 빨개졌어! 너한테 허튼 마음을 품고 있는 거라니깐!”
실제로 허튼 마음을 품은 파수꾼은 차마 거짓을 말할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을 돌려 화제를 바꿀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친 후였다.
은빛 영웅이 달아오른 파수꾼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요? 잘됐네요. 제가 꼬시는 중이었거든요.”
“뭐!”
옥토연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파수꾼과 은빛 영웅은 서로를 바라보며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옥토연이 의도치 않게 큐피드 역할을 한 결과 둘은 맺어졌다.
* * *
파수꾼과 은빛 영웅의 연애사 속 옥토연의 대활약을 들으며 감탄했다.
옥토연은 자리를 비우는 은빛 영웅을 걱정해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갔다가 둘을 이어 준 것 같다.
‘옥토연은 죽어서 뒤를 밟을 정도로 은빛 영웅을 아꼈나 보네.’
옥토연의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오긴 했지만, 은빛 영웅이 행복해졌으니 잘된 게 아닐까?
파수꾼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보니 옥토연은 결국 파수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듣기만 해도 입안에 단맛이 도는 것 같은 연애담 끝에 후예들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서호, 이호, 재호가 와 줬어.”
그렇게 얻기 힘들다는 후예가 셋이나 되는 건 놀라운 일이다.
제천대성이 속한 원족처럼 아예 후예를 보지 못한 진족도 있는데.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파수꾼은 더 굉장한 소리를 했다.
“아, 사실은 아이가 넷일 수도 있었대.”
그다음 이어진 말은 넷이라는 숫자보다 더 큰 충격을 줬다.
“그걸 알게 된 건 그녀의 수명이 다할 즈음이었어.”
* * *
막내 은재호를 임신하였을 때, 은빛 영웅이 말했다.
“아이 넷을 원했는데. 뜻대로 안 됐다. 결국 시기를 놓쳤군.”
“네, 넷이요? 저, 당신에게 부담만 안 된다면 재호에게 동생을…….”
파수꾼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은빛 영웅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하다. 이 아이를 낳고 나면 내 수명이 끝날 테니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말이었다.
수명이 끝난다는 말이 마치 이 행복한 나날이 끝난다는 뜻으로 들렸다.
덤덤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파수꾼은 저도 모르게 화풀이하듯이 말했다.
“당신에게는 아직 이름이 없죠. 이름 없이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신가요?”
“내게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 안다. 미안하구나.”
은빛 영웅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누군가가 이름을 붙여 주려고 해도 그녀가 거부했던 탓이다.
파수꾼은 언젠가 그녀에게 이름이 생기길 바랐는데 그게 이루어지기 전에 수명이 끝날 것이란 말에 속이 상했다.
파수꾼은 속상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긍정적인 면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면 이곳에 오시나요? 계속 곁에 있을 수 있나요?”
은빛 영웅은 윤회의 굴레가 정한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혼을 타고났으니 사후 함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파수꾼의 기대는 바로 무너졌다.
“아니. 현세에 머무를 예정이다. 죽은 채로 이곳에 와 봤자 너를 구할 수 없다.”
“……네?”
“내가 죽고 나면 그자가 윤회의 굴레를 노리고 움직일 거다. 너를 구할 자를 인도하기 위해서 현세에 남아야 한다.”
죽고 나면 은빛 영웅은 육신을 잃는다.
그렇다면 육신에 깃들어 있는 힘이 사라지니, 그자가 파수꾼과 이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일 거다.
은빛 영웅의 의도는 알았으나 파수꾼은 이에 찬동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혼의 형태로 현세에 남으면 언젠가 소멸하고 말아요!”
“대비는 해 놨다. 무거운 제약을 걸고 혼을 묶어 두면 그럭저럭 버티겠지.”
파수꾼은 은빛 영웅의 마음을 바꾸려 애썼지만 그녀의 뜻은 확고했다.
파수꾼은 부디 혼이 소멸되기 전에 여기로 와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와 저를 구하러 올 분은 대체 어떤 존재죠? 당신 말고 또 있나요?”
“아직 이 세계에 없다.”
설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인가?
파수꾼은 새로운 구세주에 관해 더 자세히 물어보았지만, 은빛 영웅도 이에 관해선 구체적으로는 모르는 듯했다.
“예언이란 늘 모호하고 불명확하지. 내가 첫째로 맞이하고 싶었던 아이가 결국 다른 곳에서 태어난 것처럼, 운명은 그 길을 걷는 자의 선택에 따라 변하는 법이다.”
그런 애매한 것을 믿고 은빛 영웅이 소멸할 리스크를 지고 있다는 사실에 파수꾼은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점점 웃는 얼굴이 무너지는 파수꾼을 뒤로하고 은빛 영웅이 말했다.
“그 아이는 언젠가 새벽 별에 의지해 어둠을 헤쳐 나가야 한다. 하지만…….”
은빛 영웅은 먼 곳을 응시했다.
맏이가 될 뻔한 누군가와 지금은 이 세계에 없는 구세주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직 새벽 별이 이 세계에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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