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75화 (671/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75)

88. 굴레 (9)

은광고 거주 구역, 1학년 기숙사 건물 10층.

자정을 훌쩍 넘기고 새벽에 가까워진 시각, 안다인이 기숙사 방문 앞에 섰다.

현재 지익회관에서는 밤샘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고 있었으나 안다인은 중간에 빠져나왔다.

‘기숙사 방에 오랜만에 돌아온 기분이 들어. 내일은 일정이 많으니까 이만 쉬어야지.’

문을 열자 자동으로 조명이 켜지고 물건이 별로 없는 방의 모습이 보였다.

눈에 띄는 거라곤 종류별로 있는 벌레 퇴치용 스프레이 정도였다.

안다인은 잘 준비를 하며 내일 일정에 관해 떠올렸다.

‘2학년 0반 선배님들이 학교 행사에 그렇게 열의를 보이실 줄은 몰랐어. 바빠지겠지만, 이번 사건으로 크리스마스를 그냥 넘기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사건이 마무리되기 무섭게 2학년 0반은 도원우를 찾아와 협상을 시도했다.

사실 2학년 0반이 한 짓은 협상이라기보다는 우격다짐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말하는 말에는 나름 일리가 있었고 긍정적으로 볼 만한 내용이 섞여 있었다.

2학년 0반 일당은 도원우에 이어 자치 기구를 설득한 후에 교사진, 황명 재단과도 의견을 나눴다.

그 결과, 내일 은광고에서는 예정대로 크리스마스 자선 이벤트가 열리게 되었다.

‘불참하는 학급, 동아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다들 참가하기로 해서 다행이야. 오히려 기획물을 추가한 곳이 나온 게 의외였어.’

신문부의 경우, 전시실을 추가로 대관하여 사건 중에 촬영한 영상과 사진을 모아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건 발생 당시 신문부는 취재를 위해 학교 곳곳에 흩어져 있었기에 각지에서 일어난 상황을 자료로 남길 수 있었다.

신문부뿐만이 아니었다.

현악부는 권제인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작곡한 즉흥곡을 편곡한 곡을 더 연주하기로 했다.

그리고 1학년 0반의 경우 등교를 건 의문의 대결을 펼치기 위해 운동장을 빌렸다고 한다.

‘함근형 선생님은 등교를 적극 권장하는 분이라 형평성이 어긋날 수도 있다면서 학생부 고문 선생님을 주심으로 모셨지. 시간이 되면 보러 가야겠다.’

이처럼 추가된 일정 덕에 우는 소리를 내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강행군을 마치고 아슬아슬하게 이벤트 개최 준비가 끝났다.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지원을 왔던 플레이어들이 적극 도와준 덕분이었다.

안다인은 아침까지 일할 각오를 굳혔는데, 지익회의 크리스마스 파티에도 출석했고 이렇게 기숙사 방에서 휴식을 취할 시간도 얻었다.

잠들기 직전, 안다인은 학생회에서 추가 연락 사항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디바이스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 중 가족이 보낸 것이 있었다.

‘부모님이 답장을 보내 주셨네.’

안다인은 사건이 종결된 후, 많은 안부 확인 연락을 받았다.

그중에 가족이 보낸 메시지는 없었기에 안다인이 직접 사건에 관해 전달하고 자신은 무사하다고 연락을 해야 했다.

그래도 안다인은 가족의 무심함을 탓하지 않았다.

안다인의 부모는 현재 해외 체류 중이었기에 소식을 몰랐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늦게 온 단문의 답장을 보니 아주 조금 서운함을 느꼈다.

남과 비교하는 건 의미 없는 짓이었으나 학교에 직접 찾아온 학부모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 어딘가에 금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옛날부터 변함이 없으시구나.’

안다인의 부모는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이었고, 이능을 빼고 보더라도 가족 사이의 그녀는 이질적이었다.

얼음을 깎아 만든 듯한 차갑고 고운 얼굴 어디에도 부모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두뇌, 운동신경, 예체능에 걸친 각종 재능 역시 무엇 하나 이어진 게 없었다.

그들은 무서울 정도로 아름답고 뛰어난 안다인을 경원시하였다.

김유리와 친구가 되기 전의 안다인은 고독에 지쳐 있었다.

‘정말로 내 태몽 때문에 부모님이 나를 멀리하시는 걸까?’

가족 사이에 섞이지 못하는 안다인이 불쌍하게 보인 건지, 먼 친척이 그녀에게 태몽에 관해 전했다.

꿈속에서 안다인의 부모는 신기하고 영묘한 산을 헤매었다고 한다.

그러다 달콤한 향에 이끌려 안개 너머 산기슭에 도달하였다.

도착한 곳은 꽃밭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꽃들이 곳곳에 피어 있었다.

[초대받지 아니하였는데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건가? 그래도 여기에 도착한 것도 인연이지. 마음에 드는 꽃을 가져가도 좋다.]

눈을 가린 노인이 남빛 저고리와 홑단치마 자락을 휘날리며 홀연히 나타났다.

노인은 가장 높은 곳에 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단, 저것에는 손을 대서는 아니 된다. 감히 넘봐선 안 된다. 너희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노인의 말에 안다인의 부모는 그들이 이끌린 달콤한 향기가 저 꽃에서 나왔음을 알아챘다.

그 꽃은 너무나도 탐스럽고 아름다웠다.

저 열매에 한 번 시선을 주고 나니 온갖 빛깔의 꽃들의 빛이 바래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욕심을 내어 가장 높은 곳의 꽃을 따 달아났다.

[어리석은 것들! 내 경고했거늘!]

인자했던 노인이 불같이 화내며 부부를 죽일 기세로 쫓아왔다.

부부는 꽃을 품에 넣고 뒤도 보지 않고 달렸다.

뒤에선 폭풍이 휘몰아치고, 천둥소리가 고막을 찢어 버릴 듯 울렸다.

부부가 구르듯이 달려 나가던 도중 품에 있던 꽃에서 빛줄기가 일어났다.

그 빛이 눈에 닿자 부부는 꿈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다.

깨어난 부부는 같은 꿈을 꿨다며 신기해하면서도 노인의 목소리가 떠올라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그게 안다인의 태몽이었다.

‘부모님이 내게 거리를 두는 건 상위 존재에게 진노를 산 게 두려워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했지.’

안다인의 부모는 뒤늦게 그 노인이 상위 존재였던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다시는 꿈에서 노인을 보지 못했다.

그 대신인지 알 수 없으나 안다인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는 같은 병에 걸렸다.

병의 후유증으로 그들은 생식 능력을 상실해 영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묘사를 들었을 때, 태몽 속의 노인은 상위 존재 중 삼신할머니일 가능성이 커. 그 정도로 고명한 상위 존재의 말을 어긴 거라면…… 병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아.’

어쨌든 안다인의 부모는 이질적인 그녀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안다인은 자신이 이 집에서 태어나면 안 되는 게 아니었을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하지만 아무 의미 없었다.

그녀의 고민, 노력, 선택으로 바꿀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으니까.

안다인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의식주를 제공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기로 했다.

‘……다른 메시지를 보자.’

안다인은 다른 메시지창을 열었다.

일부러 가장 많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는 1학년 1반 단체 메시지방을 택했다.

주요 화제는 안다인이 제안한 훈련에 관한 내용이었다.

[유상훈] ?

유상희에게 이끌려 일찍 귀가한 유상훈이 어리둥절해하자 반 아이들이 훈련에 관한 설명을 했다.

유상훈은 반 아이들의 열의에 질린 것 같았으나 일단 설명을 다 읽긴 한 것 같았다.

‘상훈이도 훈련에 참가하면 좋을 텐데. 농구부는 방학에도 활동한다고 했으니까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문새론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새론] (사진)

[문새론] 사진 정리하다가 님 사진 발견함! 이것도 전시해도 됨?

문새론이 첨부한 사진을 보자 안다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사진 속에는 주수혁과 안다인이 산타 의상을 입고 마주 보고 있었다.

아마 권제인이 즉흥곡을 연주하던 순간인 것 같았다.

안다인은 고민 끝에 그 사진을 저장하고, 주수혁이 동의한다면 괜찮다는 답변을 보냈다.

사진 속의 주수혁을 바라보던 안다인은 그가 보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주수혁] 다인아, 내일 봐.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열리는 날, 쉬는 시간을 맞춰 같이 교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성실하게도 주수혁은 저녁 즈음에 약속 확인 메시지를 보냈다.

‘수혁아…….’

주수혁과 나눈 약속과 내일 줄 크리스마스 선물 생각이 어두웠던 마음을 지워 주었다.

안다인은 몇 시간 전에 확인했던 주수혁의 메시지를 다시 열어서 읽고 눈을 감고 편안히 잠을 청했다.

*    *    *

‘예언, 새벽 별, 어둠. 전부 이 세계에서 들어 본 이야기인데.’

은빛 영웅이 했다는 말에 어느 예언이 떠올랐다.

적호의 리플레이 보고서에서 안다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능을 각성할 때쯤에 예언 이능을 가진 분을 만난 적이 있어요. 아니, 어쩌면 단순한 사기꾼일지도 모르지만요.

―주변이 어두워지면 새벽 별을 따라가라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그리고 중국에서 만난 현무는 목우람을 넘겨 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의 재능이 새벽을 부를 네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구나.

황지호는 그 새벽 별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새벽 별이라······ 현무가 너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는군.

정말로 그 새벽 별이 나일까?

내가 무명의 초신성이라는 별과 관련된 이명을 받은 것, 내 이름에 새벽 신(晨)이 들어가긴 했는데 그뿐 아닌가.

파수꾼은 은빛 영웅을 회상하다가 나를 보며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네가 이 세계에 왔고, 그분이 너를 인도하셨지.”

“제가 그 새벽 별이라는 뜻인가요?”

“응, 너 외에 누가 있겠어.”

왜 그렇게 딱 잘라서 단정 지을 수가 있지?

파수꾼은 확신을 품고 말했다.

“예언은 모호하고 불명확하다고 했잖아. 그분이 본 미래 속에서는 네가 새벽 별로 보였던 거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았지만, 일단 파수꾼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로 했다.

내가 질문을 멈춘 걸 확인하고 파수꾼이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쿠구구구…….

땅에 진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흔들림은 점점 거세지고, 가까워지고 있었다.

파수꾼은 소파에서 일어나 내 앞에 섰다.

“충격파가 도달하면 내가 막을게. 혹시 모르니까 잘 방어하고 있어.”

충격파가 온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윤회의 굴레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인 걸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윤회의 굴레가 흔들리고 있는 거야.”

“자연적인 현상인가요? 아니면 누군가가 일으킨 건가요?”

“후자야. 살아 있는 자가 알아선 안 될 이 세계의 섭리와 윤회의 굴레에 얽힌 비밀이 어딘가에서 새고 있어서 그래.”

섭리와 비밀이 새어 나가고 있다고?

윤회의 굴레에 관해서 잘 모르는 내가 들어도 몹시 심각하게 들었다.

순간 은빛 영웅이 이 세계와 파수꾼을 구하러 왔다는 말이 떠올랐다.

‘은빛 영웅은 10년 전쯤에 재호가 태어나고 사망했어. 윤회의 굴레를 오가며 흑막을 견제했던 은빛 영웅이 사라졌으니 움직인 거야!’

내 생각이 맞는지 파수꾼은 흑막에 관해 언급했다.

“굴레에서 새어 나간 것들은 네가 적대하는 자의 손에 들어가고 있어. 누적된 비밀이 쌓여서 윤회의 굴레가 물리적으로 흔들릴 만큼 영향을 주고 있는 거야.”

쿠구구구구구!

충격파가 가까워지자 파수꾼이 팔을 넓게 벌리며 이능파를 전개했다.

파수꾼은 방어할 태세를 갖추면서도 말을 계속했다.

“그자는 이곳에서 새어 나온 비밀을 모아 책의 형태로 묶고 있다고 해.”

“책이요?”

짜악!

콰아아아!

파수꾼이 충격파가 가까워질 때를 노려 박수를 크게 쳤다.

마주친 손바닥 사이에서 터져 나온 힘은 순식간에 충격파를 지워 버렸다.

‘저렇게 쉽게 충격파를 지울 정도면 내가 방어할 필요가 전혀 없겠는데.’

흑막의 흉계에 관해 추리하면서도 파수꾼의 힘에 감탄했다.

혹시 몰라 무명의 운명 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괜한 짓이었다.

파수꾼은 주위가 완전히 잠잠해지자 다시 말을 이었다.

“응, 그자는 그걸 ‘살생부’라고 부르고 있어.”

돌아가기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