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76화 (672/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76)

88. 굴레 (10)

흑막은 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흑막이 가진 정보의 원천이 가진 비밀은 플마고 엔딩까지 잘 밝혀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 망겜에선 흑막의 정체조차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가 가진 능력, 정보원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파수꾼과의 이야기를 통해 한 가지를 알아냈다.

‘흑막이 가진 정보의 원천 중 하나가 살생부였구나.’

살생부란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릴 것인지가 적혀 있는 명부를 뜻한다.

하지만 윤회의 굴레에서 빼돌린 정보로 만든 책이니 표면 그대로의 뜻 외에 무언가가 더 있을 것이다.

그게 살생부 안에 포함된 정보인지, 살생부 자체가 가진 힘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정보원을 파악했으니 이쪽에서 둘 수 있는 수가 생겼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수는 두 가지다.’

첫째, 윤회의 굴레에서 새어 나가는 정보에 거짓 정보를 섞어서 혼선을 준다.

현재 무슨 방식으로 어떤 비밀이 유출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구체적인 수는 떠오르지 않지만, 파수꾼이 제공할 수 있는 정보량에 따라 둘 수 있는 수가 생길 거다.

둘째, 나도 흑막이 확보한 이 세계의 비밀에 관해 파악하는 것이다.

흑막이 무슨 비밀을 수집하여 살생부를 작성했는지 안다면 그자의 수를 막기 수월해지겠지.

우선 그 비밀에 관해 묻기로 했다.

“그자가 어떤 비밀을 알아냈는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알려 줄 수 있긴 한데, 음…… 어떡할까.”

내 물음에 파수꾼이 갈등했다.

아직 나를 믿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살아 있는 자라서 그런 걸까.

파수꾼이 망설이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일단 반응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네가 중요한 단서를 얻어서 그자를 잡을 수 있다면 소멸을 택해도 괜찮을까?”

뭐, 소멸?

파수꾼이 혼잣말하듯이 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파수꾼은 아주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혹시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과 소멸하는 것 사이에 관계가 있는 건가요?”

“응, 죽음의 비밀을 지키는 게 내 의무거든. 자의로 이를 행하면 명계의 주인들과 맺은 계약이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굳이 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파수꾼이 직접 비밀을 흘리면 소멸하나 보다.

그런 거면 바로 거절해야지 저 파수꾼은 뭘 또 고민하고 있는 건가!

“그러면 안 주셔도 돼요.”

“하지만 필요하지 않아?”

“아뇨, 괜찮아요.”

만약 내가 둔 수 때문에 파수꾼이 소멸하면 평생 은서호, 은이호, 은재호를 비롯한 호족들에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거다.

현세의 어딘가에서 혼을 묶어 두고 있는 은빛 영웅한테도 말이다.

어쨌든, 지금 파수꾼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걸 가족들이 알면 난리가 날 거다.

“제가 이 세계와 당신을 구하러 온 새벽 별이라면서요. 전 당신을 소멸시키러 온 게 아니에요.”

여차하면 비밀을 알려 주겠다고 하는 파수꾼에게 딱 잘라 말했다.

파수꾼은 구하러 왔다는 내 말에 머쓱해하며 웃었다.

“은인은 착한 아이구나. 우리 아이들이 형, 오빠처럼 따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당연한 소리를 했을 뿐인데 파수꾼이 과장하여 말했다.

파수꾼은 그 이후에도 과장된 소리를 더 하며 내 얼굴에 금칠을 했다.

‘호랑이들이 자주 하던 짓이네.’

누가 호랑이네 사위 아니랄까 봐 파수꾼은 호랑이들이랑 비슷한 짓을 했다.

실컷 칭찬을 쏟아붓고 난 후에 만족한 파수꾼이 말했다.

“그럼 충격파의 근원으로 가자. 이번 충격은 꽤 컸으니까 흔적을 더듬어 갈 수 있을 거야.”

드디어 칭찬 지옥이 끝났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나는 얼른 소파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였다.

“그곳에 가면 뭔가 알 수 있을까요?”

“응, 그럴 거야.”

앞장선 파수꾼은 방금 전에 소멸 운운한 주제에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파수꾼은 충격파의 근원에 단서가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파수꾼이 설명을 덧붙였다.

“윤회의 굴레에 충격이 갈 정도로 흔들기 위해선 강한 혼과 힘을 지녀야 해. 너처럼 강한 아이도 여러 도움을 받아야 올 수 있었잖아.”

바로 윤회의 굴레로 올 수 있었다면 명계에서 긴 시간을 기다리진 않았을 거다.

혼자 힘으로 명계에 갔다 해도 에레쉬키갈이 인도해 주지 않았더라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너와 적대하는 자의 부하 중에선 굉장한 실력자가 많지만, 그자만큼 강하고 교묘한 자는 없어.”

파수꾼이 거기까지 말하니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흑막의 부하 중에선 윤회의 굴레를 드나들거나 영향을 줄 만큼 강한 자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즉, 방금 경험한 충격파를 일으킨 원흉은…….

“설마 윤회의 굴레를 공격한 게 흑막, 그자의 짓인가요?”

“응, 너와 적대하는 그자가 직접 벌인 거야.”

끼익.

파수꾼이 그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기숙사 방과 흡사한 공간을 빠져나오자 세계관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인 풍경이 보였다.

얼음 절벽 위에 모래 폭풍이 휘몰아치고 숲에 철탑이 꽂혀 있는 등 매우 혼란스러운 광경이었다.

‘여기 오는 동안 배경이 계속 바뀌긴 했지만, 이렇게 어지럽게 합쳐져 있지는 않았어.’

파수꾼의 힘으로 직접 지켜지고 있던 기숙사 방 안은 평화로웠으나 밖에서 윤회의 굴레가 받은 충격은 꽤 큰 것 같았다.

뒤죽박죽인 풍경은 언제 붕괴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워 보였다.

‘윤회의 굴레가 이렇게 변할 만큼 충격을 받았는데 파수꾼은 괜찮은 걸까?’

파수꾼이 괜찮은 척하는 건지, 정말로 괜찮은 건지 구분이 안 갔다.

소멸 운운하는 걸 보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는 것 같긴 했다.

“그자는 윤회의 굴레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현세에서의 활동을 자제하고 있대. 그래서 보통 부하를 움직이고 있을 거야.”

여태까지 흑막이 사건에 직접 개입한 건 먼 곳에서 이계를 부르는 것 정도였다.

배신한 12지의 수장, 우마왕과 저강렵을 부릴 정도로 강한 흑막이 본격적으로 나섰다면 몇몇 사건은 내가 막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흑막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윤회의 굴레에 집착하는 걸까?

“윤회의 굴레가 부수어지면 굴레가 부활하고, 새 파수꾼을 뽑을 때까지 환생의 개념이 없어지겠지. 그리고 윤회의 굴레는 현재 죽은 자와 명계를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으니 많은 혼들이 길을 잃을 거고…….”

그 말을 듣고 파수꾼이 회상을 통해 설명한 내용을 떠올리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흑막의 계획대로 윤회의 굴레가 사라지면 죽은 자들은 환생도 못 하고, 명계에 가지도 못한다.

부활할 수단이 없는 한, 지상을 떠돌다 혼이 마모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은 길은 소멸뿐이다.

“그자는 상위 존재에 집착하고 있었지. 어쩌면 윤회의 굴레가 상위 존재와 가깝기 때문에 여기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걸지도 몰라. 여기서는 길만 찾을 수 있으면 걸어서도 상위 존재를 만날 수 있으니까.”

“상위 존재들이 여기에 가까이 있다면 당신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어려울 거야.”

파수꾼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를 파수꾼으로 임명하면서 많은 권능을 부여한 이유는 상위 존재들이 윤회의 굴레에 개입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야. 서로 이곳에 손을 대지 않기로 맹세했어.”

그 말에 뭔가 계속 마음에 걸리던 게 구체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충격파를 박수 한 번에 상쇄시킬 정도로 강한 파수꾼의 권능.

강력한 권능만큼 무거운 제약과 의무.

소멸을 각오하고 있는 파수꾼.

윤회의 굴레에 개입하지 않기로 맹세한 명계와 연관된 상위 존재.

그리고 묘하게 협력적이던 에레쉬키갈.

이것들을 종합해 보니 지금 윤회의 굴레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흑막은 상위 존재들이 윤회의 굴레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허점을 노렸군요.”

상위 존재는 그들이 한 맹세에 묶여 현재 윤회의 굴레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간접적인 형태로 도우려 했던 것이다.

은빛 영웅을 경유해 내게 명계의 출입을 허락한 게 그 일환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 파수꾼으로서의 권능을 받으면서 당신이 짊어진 제약을 노려 소멸을 유도하고 있어요.”

파수꾼의 권능은 지나치게 강력했다.

이런 권능을 그냥 줬을 리가 없다.

상위 존재는 파수꾼이 무능하거나, 윤회의 굴레를 지킬 의지가 사라졌을 때를 대비해서 보험을 들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걸었을 수도 있다.

자의로 죽음의 비밀을 흘리면 소멸.

자의가 아니더라도 흘러 나간 죽음의 비밀이 일정 이상 쌓이면 소멸.

‘이런 류의 계약을 나눴다면 흑막이 계약의 허점을 노려 파고들 여지가 충분해.’

파수꾼이 유능하고, 윤회의 굴레를 지킬 의지가 있더라도 긴 기간 혼자서 이곳을 지탱하다 보면 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다 보면 언젠가 계약대로 파수꾼은 소멸하게 될 것이다.

상위 존재는 개입할 수 없는 상태라 도움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와, 은인은 내가 파수꾼으로 임명되었던 순간을 본 것처럼 말하는구나. 정답이야.”

내가 예상한 바를 간략하게 전달하자 파수꾼이 감탄했다.

목숨이 걸린 일인데 지금 감탄할 때인가?

마침 파수꾼이 목적지에 도달했는지 멈춰 섰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푹 파인 땅에 깨진 유리창의 잔해와 시들거나 불탄 꽃이 널려 있었다.

유리 온실이 박살 난 흔적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가 충격파가 발생한 틈이야. 틈을 메우기 전에 한번 볼래?”

파수꾼의 손끝이 그을음 덩어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능파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안광을 사용했다.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시스템 음과 함께 이능파가 눈에 몰렸다.

환하게 열린 시야 속에서 그을음을 응시했다.

한참을 관찰한 끝에야 그 형태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다.

“문양이 남아 있어요. 일종의 진(陣) 같아 보이네요.”

“그래? 내 눈으로는 잘 안 보이네. 살아 있는 자가 남긴 힘의 흔적이라서 그런가.”

“그려 드릴게요.”

파아아…….

나는 허공에 이능파를 피워 올려 무엇을 보았는지 그렸다.

그림이 완성되어 가자 파수꾼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내가 죽을 때 본 문양이 이런 형태였어.”

흑막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과 파수꾼이 죽기 직전에 본 문양이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니.

흑막은 설마 파수꾼을 직접 죽인 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이 일그러졌다.

어그러진 풍경에서 무거운 이능파와 함께 뱃고동 소리와 비슷한 울림이 퍼져 나갔다.

우우우웅!

“또 충격파가 오는 건가요?”

“아니야, 신들이 부르고 있는 거야! 갑자기 왜…… 응?”

명계의 상위 존재들이 파수꾼을 부르고 있는 건가?

하늘을 올려다보던 파수꾼이 갑자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에 올라가는 크기의 작은 손거울을 꺼냈다.

“연락이 왔어!”

“죽음의 신들로부터 온 연락인가요?”

“아니, 이건 다른 곳에서 온 거야. 귀한 분이 연락을 주셨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럼 지금 하늘에서는 상위 존재가 호출하는 중이고, 거울을 통해선 다른 누군가가 연락한 걸까?

손거울의 테두리에는 달의 위상과 떡방아를 찧는 토끼들이 그려져 있었다.

어쩐지 달토끼를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토연 님이 선물해 주신 거울이야. 연락할 때 큰 힘을 소모해서 자주 쓸 순 없지만, 현세와 이어져.”

현세와 연락이 가능한 수단이 있었나?

선물한 건 옥토연이라고 하지만 지금 저 손거울 너머에는 다른 진족이 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니 손목에 새겨진 인장이 시큰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한순간 손거울에서 황금빛이 흘러나왔다.

[조의신.]

손거울 너머에서 황지호의 음성이 들렸다.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거기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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