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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80화 (676/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80)

88. 굴레 (14)

새로운 눈이 열리고, 막대한 정보량이 쏟아졌다.

넓어진 시야 속에 존재하는 상위 존재들이 품은 죽음의 무게가 느껴졌다.

‘삶과 죽음에 한정한다 해도 상위 존재를 가늠할 수 있는 눈이라니.’

지금 상위 존재 중 누군가가 나에게 죽음을 휘두른다면, 그것을 피할 자신이 있었다.

이능파가 허락한다면 그 죽음을 튕겨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반사시키는 게 아니야. 내 눈만으로도 죽음을 보여 줄 수 있을 거야.’

비유하자면 외눈 거인 발로르의 죽음의 눈, 사안(死眼)과 유사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발로르가 내게 죽음을 보여 준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죽음을 보여 줄 수 있다.

마왕 발로르처럼 보이는 것 전부를 죽일 수는 없어도 죽음을 체감시키는 것 정도는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잘못 사용하면 큰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수많은 죽음의 신들이 뜻을 모아 건넨 힘이 가벼울 리가 없는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지금 네가 얻은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겠느냐?]

생사의 안광 속에 비추어지는 사희공주가 물었다.

이 힘이 무엇이고, 얼마나 강력한지는 어느 정도 짐작하였으나 확실히 알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어디에다 시험할 수 없는 노릇이니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정보를 확인하기로 했다.

사희공주의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스킬 상세 설명을 확인할 수 있는 상태창을 열었다.

〈스킬 정보를 열람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에 이어 푸른빛의 윈도우가 눈앞에 나타났다.

[스킬명] 생사(生死)의 안광

[희귀도] UR

[스킬 레벨] 1

[효과] 시선에 이능파를 실어 특수한 현상을 일으킨다.

죽음의 신들의 뜻으로 삶과 죽음의 힘이 추가된다.

[설명]

죽음의 신들이 새긴 뜻이 담긴 안광.

그 뜻을 허락받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

기존 안광 스킬의 설명과 유사하지만,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었다.

희귀도가 SSR에서 UR로 오른 점.

죽음의 신들이 더한 새로운 효과.

하지만 여전히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스킬 레벨이 마음에 걸렸다.

‘고작 스킬 레벨1인데 죽음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스킬 레벨이 더 많이 오르면 죽음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고작 예상일 뿐인데도 눈에 품은 힘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스킬 정보를 읽은 후, 나는 스킬 사용을 중단했다.

그리고 솔직한 감상을 담아 사희공주에게 답했다.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사희공주가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사희공주의 말씨나 몸짓에서 얼마나 그녀가 어질고 슬기로운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덜컥 마음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눈은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내 속을 훤히 꿰뚫는 듯한 시선이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희공주가 나를 보며 말했다.

[우리가 준 힘에 두려움을 느낀 걸 안다. 모르겠다고 답했으나 어렴풋이는 알고 있는 게지.]

내가 한순간 느낀 공포를 알아챈 것 같았다.

힘을 건넨 당사자고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알아챌 수밖에 없었을 거다.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고르는 사이 사희공주가 말을 멈췄다.

마치 나를 기다려 주는 것 같았다.

잠시 말을 중단한 사희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의 뜻을 받든 자는 겸허하고 신중하구나. 현명한 선택을 하여 만족스럽도다.]

사희공주의 말에 동의하듯 상위 존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현명한 선택이라는 건 나에게 이 힘을 준 것 말하는 건가?

이 힘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게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가 부여한 힘의 무게를 이해한 것 같아 안심이다. 걱정할 필요 없겠구나.]

사희공주는 몹시 흡족한 말투로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사희공주가 회담장에 있는 모든 상위 존재들을 향하여 말했다.

[회담은 여기까지다. 오늘, 지금, 이 시간의 결정에 이의가 있는 자는 앞으로 나오라. 이 자리가 파하면 우리의 뜻은 이대로 굳어지리라!]

사희공주의 고함이 회담장에 울려 퍼졌으나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 대신 사희공주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처럼 동의의 말이 산발적으로 흘러나왔다.

[이의 없다. 우리는 좋은 눈을 얻은 것 같군.]

[만족한다. 내가 주재자가 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이미 큰 짐을 지고 있어 걱정했는데 기우였군.]

[원하는 바다. 그러면 물러나도 되겠나?]

[저 아이가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뜻을 맡기겠다.]

[불만이 있을 리가. 이런 인간이 나타나길 기다렸는걸.]

[오늘만큼은 사희공주가 부럽군.]

이해하지 못할 말이 섞여 있긴 하지만, 불만을 품은 상위 존재는 없는 것 같았다.

왜 사희공주를 부러워하나 좀 의문스럽긴 했다.

[이번 회담의 주재자로서 나는 다른 이들의 뜻을 모아 네게 힘을 부여하는 역할을 맡았다. 즉, 너는 나를 통해 그 힘을 얻은 셈이다.]

내 의문을 알아챈 건지 사희공주가 말했다.

사희공주는 시종일관 나를 볼 때마다 웃었다.

[네가 생사의 안광을 사용할 때마다 나는 그 눈의 빛을 감지할 수 있다. 일종의 감시역인 셈이란다.]

일종의 감시역?

그런 걸 맡으면 번거롭지 않나.

내가 사고를 치면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르는데 의무가 늘어난 게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가호까지 내리면 네 시야까지 공유할 수 있으련만…… 아쉽구나.]

사희공주는 몹시 아쉬워했다.

가호를 준다고 하면 내가 거절할 거라는 걸 알아서일까?

아니면 가호를 줄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희공주는 가호를 받겠냐는 제안은 하지 않았다.

[할 일이 많을 테니 붙잡아 둘 수 없지. 자, 그럼 우리가 너를 배웅하겠다.]

먼저 상위 존재가 자리를 뜰 줄 알았는데, 나와 파수꾼이 나가는 걸 기다릴 모양이다.

이제 물러날 때가 된 것 같다.

믿고 힘을 준 것에 대한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했다.

파수꾼도 인사를 마친 후, 함께 문밖을 나섰다.

선에서 멀어지자 파수꾼의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나는 여전히 별 차이점을 모르겠으나 파수꾼은 압박감을 심하게 느낀 듯했다.

휘이이…….

문밖을 완전히 나서자 바람이 한 줄기 불었다.

막힘 없이 흐르는 바람을 따라 시선을 돌렸는데, 방금까지 그 자리에 있던 문이 보이지 않았다.

죽음의 신들의 회담장으로 이어졌던 문은 어느 사이엔가 소리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고생했어, 의신아. 눈은 괜찮아? 그분들과 그렇게 가까이 갔는데도 힘들지 않아?”

파수꾼은 나오자마자 내 걱정을 했다.

몇 번이고 내 안부를 확인한 후에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분들이 너에게 의무를 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미안해.”

왜 파수꾼이 사과하는 걸까.

애초에 내가 이곳에 오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윤회의 굴레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오히려 상위 존재들과 접촉해 강력한 힘을 얻었으니 이득을 본 기분이었다.

‘안광 스킬에 새로운 힘이 더해진 데다가 차원 이해도가 올랐어. 리플레이 단계가 오른 건 좀 미묘한 기분이 들지만.’

나는 미안해하는 파수꾼에게 말했다.

“아뇨, 오히려 쓸 수 있는 수가 늘어서 좋은걸요.”

파수꾼은 내 말을 듣자 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파수꾼은 ‘수’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지금 당장 그 수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내려가기 전에 그자가 이곳에 만든 틈을 찾아내죠.”

“응? 쉬지 않고 바로?”

“힘들 만한 일이 전혀 없어서요.”

파수꾼이 준비한 공간에서 푹 쉬었고, 상위 존재들은 딱히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침 윤회의 굴레에서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해 있었기에 아래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윤회의 굴레를 응시하며 호족의 호의와 죽음의 신들의 뜻으로 얻은 힘을 발동시켰다.

〈스킬 ‘생사(生死)의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우우우우우……!

일변하는 시야 속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마치 이 공간 전체가 내지르는 소리 같았다.

눈으로 소리를 듣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그 비명 소리가 들리는 곳에 틈이 보였다.

비명을 지르는 틈 속에 어떤 문양이 남아 있었다.

‘그을음 속에서 본 진(陣)이다!’

이 눈에는 진(陣)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흑막이 새겼을 진(陣)으로 새어 나갔던, 새어 나가는 중인 이 세계의 비밀도 보였다.

윤회의 굴레로 이어지는 명계의 통로와 지름길.

삶과 죽음의 법칙을 초월하는 강한 혼들이 남긴 흔적.

입에 담기 어려운 죽음의 비밀.

그리고 무수한 이름들과 그 혼이 품은 단서들이 있었다.

그 이름들을 눈에 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이름이다……!’

어쩌면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저 이름들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이름이라 확신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만 아니라 플마고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NPC의 이름도 보였다.

그자가 훔친 정보를 책으로 묶어서 왜 ‘살생부’라 칭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절대 타락하지 않는 이들, 강한 의지와 혼을 품은 이들을 선별하여 죽이려 했던 거구나.’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을 때, 파수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신아! 괜찮아?”

내가 감정을 드러내는 걸 보고 걱정했나 보다.

마음은 둘째치고 몸은 문제없었다.

안광을 사용할 때보다 이능파 소모가 심하지만, 참을 만한 정도였다.

“당신은 윤회의 굴레를 수복할 힘이 있지만, 보이지 않아서 대처할 수 없던 거죠?”

“응, 충격파가 발생한 곳 주변의 틈을 메우고 있긴 하지만…… 흔적이 남지 않은 틈이 더 있을 거야.”

파수꾼이 직접 처리할 수 있다면 간단하다.

“지금부터 그자가 만든 모든 틈의 위치를 알려 드릴게요.”

“벌써 다 찾아낸 거야? 알았어! 말해 주면 바로 틈을 메울게!”

“말하는 것보다 더 간단한 수가 있어요.”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내가 지정한 캐릭터는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가장 보는 것에 특화된 인물, 천동하였다.

평소에는 천동하의 광림, ‘건곤(乾坤)을 품은 눈’을 주로 사용하지만, 이번에는 파생 스킬을 사용할 예정이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시야 공유’를 사용합니다.〉

천동하는 자신이 본 것을 공유하는 파생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건곤(乾坤)을 품은 눈’은 정보량이 너무 많아 공유할 대상을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생사의 안광을 쓰고 있고 시야 공유의 대상이 파수꾼이니 괜찮을 거다.

‘이 파생 스킬로 마진승과 협력해 염준열을 도망가게 했었지.’

염준열을 구했던 능력이 이번에는 파수꾼을 구하게 될 것이다.

파아아아앗!

파수꾼의 눈과 내 눈이 같은 빛으로 물들었다.

파수꾼은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정보에 당황하면서도 곧 표정을 굳히고 아래를 응시했다.

이렇게 많은 틈이 보이니 당혹스러울 법한데, 그는 곧바로 파수꾼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파수꾼이 두 손을 들어 올려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양손에서 뻗어 오른 힘이 허공 멀리 퍼져 나갔다.

마치 거대한 산을 양손에 올려 둔 것 같았다.

‘생사의 안광으로 보니 더 힘이 커 보여!’

파수꾼이 가진 권능은 죽음의 신들의 것이다.

그래서 이 눈으로 보니 그 굉장함이 더 잘 느껴졌다.

주변의 풍경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힘이 파수꾼의 손에 실린 순간.

짜악!

그가 크게 양손을 마주쳤다.

그러자 파수꾼의 손에서 터져 나온 울림이 윤회의 굴레 전체로 퍼져 나갔다.

파수꾼의 손에서 터져 나간 힘은 정확히 내 눈으로 본 틈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열 번의 박수를 쳤을 때, 윤회의 굴레에 새겨진 틈은 모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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