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81화 (677/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81)

88. 굴레 (15)

틈이 사라지자 윤회의 굴레가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변했다고 표현하기보다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을음이 사라지고 꿈틀거리던 지면이 안정을 되찾았다.

멋대로 변하는 풍경은 여전했으나 흐르고 있는 공기, 머금고 있는 기운이 온화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윤회의 굴레는 원래 이런 모습이었구나.’

생사의 안광을 통한 시야 공유를 중단하고 파수꾼 쪽을 바라봤다.

박수를 멈춘 파수꾼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 있었다.

방대한 힘을 여러 차례 사용한 탓인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표정이 밝았다.

“윤회의 굴레가 안정되고 있어! 그자가 만든 틈이 메워진 거야!”

파수꾼이 계단 가까이로 뛰어갔다.

신선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파수꾼이 환호했다.

휘이이이……!

파수꾼의 힘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빛의 입자가 바람을 타고 윤회의 굴레에 퍼지고 있었다.

파수꾼은 싱글벙글 웃으며 빛이 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파수꾼의 숨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물었다.

“이제 괜찮아진 건가요?”

“응, 그자가 새로운 틈을 찾기 전까지는 무사할 거야. 그래 봤자 네 눈을 피해 새 틈을 찾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흑막을 없앨 때까지는 안전하진 않겠구나.

한 번의 수로 흑막의 간섭을 막을 수 있다면 상위 존재들은 일회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줬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신들이 부여한 힘은 내 것이 되었다.

그 뜻은 즉, 앞으로도 흑막과 싸우고 윤회의 굴레를 지켜 내라는 뜻일 거다.

흑막은 건재하지만 오늘 둔 수가 무의미한 건 아니다.

‘은빛 영웅이 사망하고 약 10년, 흑막이 그 기간 쌓아 온 수를 무너뜨렸어.’

윤회의 굴레에 그만한 틈을 만들기 위해선 10년의 시간이나, 그 시간을 대신할 만한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수로 흑막의 정보원을 하나 틀어막게 되었다.

이건 단순히 발목을 잡은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제 살생부가 업데이트될 일이 없겠지.’

윤회의 굴레가 품은 비밀은 모래알처럼 조금씩 새어 나가고 있었다.

그 비밀의 누출이 지금 중단되었으니, 미래 시점의 플마고에서 흑막이 얻었어야 할 정보를 일부 얻지 못하게 된 셈이다.

즉, 흑막이 아직 손에 넣지 못한 이름을 가진 자들은 무사할 거다.

‘그런데 흑막이 여기에 손을 다시 쓴다면 알 방법이 있을까?’

이건 파수꾼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틈이 생겼을 때, 윤회의 굴레 밖에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충격파가 발생하면 바로 토연 님의 손거울을 통해 연락할게.”

손거울을 통한 연락은 일방통행이 아니었나 보다.

파수꾼 쪽에서 이상을 알릴 수 있다면 이쪽은 더 걱정할 게 없다.

파수꾼이 나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정말 고마워, 의신아. 윤회의 굴레가 다시 제 모습을 찾았어.”

순전히 내 덕분이라고 하기보다는 이곳으로 날 인도한 은빛 영웅의 덕이 큰 것 같은데.

은빛 영웅은 죽은 후에도 혼을 깎아 가며 현세에 남아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는가.

은빛 영웅이 인도하지 않았으면 명계를 거쳐 이곳까지 올 생각을 못 했을 거다.

이러한 요지의 생각을 전달했으나 파수꾼은 웃으며 반박했다.

“그분도 다 네 덕이라고 할걸? 그분의 몫까지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

은빛 영웅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게 실수일지도 모르겠다.

파수꾼은 온갖 감탄사를 동원해 내 칭찬을 하고 감사 인사를 했다.

호랑이들과 있을 때에도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데자뷔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우리 애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분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어. 고마워.”

감사 인사의 마무리는 가족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파수꾼은 언젠가 은빛 영웅이 이곳으로 오는 날을 기다릴 모양이다.

재회를 기다리는 것치곤 소멸할 각오를 굳힌 것 같았는데.

“그분을 기다리실 거면 이제 소멸하겠다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응, 그래야지! 네 덕분에 소멸할 일이 사라졌으니까.”

다소 신랄한 말투로 말했는데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고 있었다.

투명한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사이에도 파수꾼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안정을 찾은 윤회의 굴레의 모습이 더욱 가까이 보여서 기분이 들뜬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웃는 얼굴은 지면에 도달한 순간 사라졌다.

파수꾼은 씁쓸해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면 슬슬 준비해야겠다.”

“무슨 준비요?”

파수꾼의 주요 임무는 끝난 것 아닌가?

아직 할 일이 더 있는 걸까?

파수꾼의 눈에 눈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갑자기 눈물을 본 탓에 당혹스러웠다.

내가 뭔가 실수한 게 있나?

의문을 품고 있자니 파수꾼이 비장하면서도 슬퍼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너를 현세로 돌려보낼 준비.”

*    *    *

천익산 깊은 곳, 백운봉 주변.

이곳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지금은 호족에 의해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12지의 수장들이 부딪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게 하나 있었다.

명계로 이어졌던 지면의 균열이었다.

“…….”

“…….”

그 균열 앞에 호랑이 셋이 있었다.

둘은 호족이었고 하나는 신수였다.

황지호의 모습을 한 황호가 말했다.

“날이 새도록 한마디도 안 하는군. 변명을 하겠다면 들어 주겠다고 한 걸 잊진 않았겠지?”

“…….”

“아직도 할 말이 없나?”

백호가 입을 열지 않았지만 황호는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보나 마나 조의신이 놔 달라고 설득했을 것이고 백호는 그를 믿고 손을 놓았을 것이다.

백호가 자진해서 조의신을 명계에 밀어 넣은 게 아니란 걸 잘 알았다.

하지만 그 장면을 생각하면 황호는 화가 치솟았다.

‘만약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절대로 손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이 황호의 화를 부추겼다.

황호는 조의신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했으나 그런 긴급한 상황이 갑작스레 닥친다면 결국 그의 안위를 우선시할 것이다.

그랬기에 조의신이 사전에 말을 하지 않고 명계행을 결정한 듯했다.

조의신은 황호가 어떤 호족인지 잘 알았기에 말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조의신의 손을 놓지 않은 결과, 그가 둘 수가 어그러졌다면…….’

생각만으로도 은인을 볼 면목이 없었다.

애초에 조의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는 그의 자유다.

명계에 가지 못하게 막거나 그런 선택을 두고 황호가 뭐라 할 권한이 없었다.

그랬기에 황호는 손거울을 통해 조의신과 대화했을 때, 그가 말없이 명계에 간 걸 두고 추궁하지 못했다.

황호는 백호를 응시하며 말했다.

“내 본신이 조의신과 대화했다. 그 파수꾼하고도.”

끄응?

“무슨 얘기를 했는지 궁금하나?”

크르르!

조의신의 이름이 나오자 신수가 먼저 반응했다.

신수는 백호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번쩍 일어났다.

앞발로 지면을 매섭게 긁는 것이 황호에게 얼른 말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백호는 황호를 흘끗 보기만 할 뿐, 오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신수만 안달이 나 꼬리로 땅을 치고 신경질을 냈다.

“조의신은…….”

긴 침묵 끝에 백호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가 눈을 크게 뜨며 황호의 뒤를 바라봤다.

겨우 백호가 입을 열었나 싶었는데 뭐에 정신이 팔렸나 싶어서 황호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봤다.

뒤를 본 황호도 백호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색 이능파……!’

한국 기준으로 플레이어는 전 국민의 15%.

대략 수백만에 해당하는 숫자다.

그만한 숫자의 플레이어가 있다 보니 이능파의 색이 유사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러나 검은색의 이능파는 몹시 드물고, 검은색은 조의신의 이능파 색이었다.

‘아니, 조의신의 기척이 아닌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색도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조의신의 이능파가 밤하늘에 가까운 색이라면 저것은 먹물에 가까웠다.

하지만 조의신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그와 유사한 색의 이능파가 보이는 건 몹시 공교로운 일이었다.

멀리서 흔들리던 검은색의 이능파가 그들을 유인하듯 이동하였다.

휘익!

백호가 먼저 그 이능파를 따라 움직였다.

쏘아지는 화살처럼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진 백호를 따라 신수도 어리둥절해하며 쫓아갔다.

황호는 고민 끝에 그 뒤를 따랐다.

*    *    *

파수꾼은 울먹거리다가 현세로 향하는 길로 안내해 주었다.

파수꾼이 향한 곳은 기숙사 방의 모습으로 변했던 공간으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여긴 제가 묵었던 곳 아닌가요?”

“응, 맞아.”

“이 문이 현세로 이어지나요?”

“이어질 거야. 나는 문을 조작할 권한이 있거든. 문을 연 자가 가야 할 곳으로 보내 줄 수도 있어.”

이곳에선 공간 감각이 엉망이 되어서 어쩌면 다른 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문인가 보다.

파수꾼의 의지에 따라 저 문은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도,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길을 잃은 혼을 인도해 주는 것도 내 역할이야. 옛날에는 자던 중에 길을 잃고 여기까지 헤매러 온 혼이 꽤 있었어.”

그 말을 한 파수꾼의 얼굴이 흐려졌다.

흐려진 파수꾼의 얼굴에서 공포가 묻어났다.

파수꾼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의신아, 이번 회합에 출석하지 않은 상위 존재가 둘 있어.”

그렇게 많은 상위 존재가 모였는데, 전부 출석한 게 아니었나?

죽음과 연관된 상위 존재들 중 그 자리에서 보지 못한 신의 이름을 떠올리려 했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하나는 마족들이 섬기는 ‘죽음의 마신’이고 다른 하나는…… 악몽 인섬니움이야.”

둘 다 내 신화 지식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악몽 인섬니움도 이 회합에 올 자격이 있는 걸 보니 죽음과 연관되어 있나 보다.

죽는 것을 ‘잠든다’라고 비유하기도 하니 악몽과 죽음을 결부시키는 건 가능하긴 할 거다.

파수꾼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네게 힘을 허락한 죽음의 상위 존재 중에 그 둘이 없다는 걸 기억해 둬.”

“네.”

“그리고 저기, 부탁할 게 있는데…… 이렇게 신세 지고 또 부탁하는 게 있어서 미안한데…….”

파수꾼은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파수꾼이 두 손바닥에 올라갈 만한 작은 꾸러미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해 줄 수 있을까? 아, 의신이 선물도 있어! 에레쉬키갈 님이 주신 것처럼 굉장한 건 아니지만…….”

물론 괜찮다.

내 선물은 둘째치고 은호의 후예들이 아버지가 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는데 당연히 챙겨 가야지.

내가 선물을 받아 들자 파수꾼이 아주 기뻐했다.

오늘 세기 어려울 만큼 들었던 감사 인사를 또 들었다.

긴 감사의 말을 마친 파수꾼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의신이가 여기에 와 줘서 정말 반갑고 고마웠어. 뒤돌아보지 말고, 조심해서 가.”

파수꾼은 헤어지는 게 서운한지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녕히 계세요.”

파수꾼과 작별 인사를 마친 나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넘어가자 소리와 빛이 사라졌다.

어디가 앞인지 모를 만큼 캄캄했지만, 파수꾼의 말대로 앞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명계에서 윤회의 굴레까지는 열 걸음도 안 걸렸는데, 현세까지는 아무리 걸어도 닿을 기미가 없었다.

‘설마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뒤돌아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여태까지 걸어온 길을 믿고 나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걸었을 때였다.

‘어, 왜 무릎 밑이 젖어 있지?’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몸이 잠기기 시작하니 당혹감이 일었다.

순식간에 물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온몸이 잠겼다.

광림을 발동하려 했을 때, 문득 위쪽에 빛이 쏟아지는 게 보였다.

‘설마 여기는…….’

수면 위, 익숙한 광경이 보였다.

나는 위로 헤엄쳐 가서 손을 뻗었다.

누군가가 수면을 향해 뻗은 내 손을 붙잡아 끌어 올렸다.

촤악!

숨이 트이는 감각과 함께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밖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예상한 대로 이곳은 천익산이었다.

“…….”

수면 위에는 새하얀 범이 있었다.

나를 물 위로 끌어 올린 건 백호군이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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