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83)
89. 선물 (2)
‘그 단어’와 형의 조합이 가진 위력은 상당했다.
하필 은호가 천성헌, 아니, 천은하의 성장 버전으로 그 단어를 말하니 더 타격이 심했다.
저 말을 하는 은호의 얼굴을 보니 기시감이 느껴졌다.
예전 세계에서 천성헌은 가끔 민망해질 정도로 칭찬의 말을 오래도록 쏟아 낼 때가 있었다.
지나친 칭찬 세례에 정신이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는데, 그때 천성헌이 지금의 은호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은호가 천성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다른 사고를 통해 ‘그 단어’의 충격을 잊으려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다음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적벽괴도 형이라고 불러서 많이 놀라셨나요? 아니면 이 모습을 해서 적벽괴도 형이 놀라신 건가요? 하지만 저도 많이 놀라서요. 적벽괴도 형이 이해해 주세요.”
왜 자꾸 말에 ‘그 단어’와 형을 붙이는 것인가!
그런데 이번에는 딱히 괴도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불려야 하는 거지?
호족의 신보를 들고 명계로 가서 그런 건가?
그러면 어쩔 수 없긴 하다.
하지만 명계의 문을 끌고 오기 위해선 에레쉬키갈의 도움뿐만 아니라 강력한 힘의 매개가 필요했다.
게다가 그 향로는 오염되어 있어서 그대로 두기에는 위험했기에…….
“적벽괴도 형이 보내셨던 예약 메시지는 잘 읽었어요. 하지만 여러 번 읽어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았어요. 적벽괴도 형이 굳이 그 타이밍에 사전 예고 없이 명계에 가셔야 할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
안 되겠다.
‘그 단어’가 들릴 때마다 사고가 자꾸 뚝뚝 끊긴다.
평소라면 황지호가 ‘하하하하!’ 하고 처웃었을 텐데 웃지도 않고 듣고만 있다.
호랑이가 여럿 있는데도 지나치게 조용해서 ‘그 단어’가 더 잘 들린다.
가끔 황지호 주변에서 산령이 도망치려고 꿈틀거리긴 했으나 틈을 엿보고 있는지 도통 행동하지 않는다.
조용한 호랑이들 사이에서 은호만 입을 열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 단어’와 형을 계속 입에 담았다.
‘한 번 말을 할 때마다 ‘그 단어’를 쓰는구나.’
넋이 나간 상태로 은호의 말을 듣다가 ‘그 단어’가 튀어나올 때마다 손과 발이 오그라드는 현상을 한참 동안 견뎌야 했다.
실내 온도는 적절하고 어깨에 두른 담요는 따뜻한데 지나치게 손발이 오그라든 탓에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은호의 말을 듣는 동안 명계의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것 못지않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적벽괴도 형, 디바이스 메시지에는 없던 내용에 관해 말씀해 주세요.”
기나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내게 발언권이 주어졌다.
호랑이들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은 것 같으니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수를 둬야겠다.
이를 위해 카드화된 호족의 신보를 꺼냈다.
UR급 희귀도임을 나타내는 카드 테두리 안에 호랑이가 조각된 향로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우마왕이 노렸던 호족의 신보야.”
“황호 님께 들었습니다. 이게 그 신보로군요.”
황지호는 호족의 신보에 관해 기억하고 있었나?
아무리 그때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터져 복잡한 상황이었다 해도 호족의 수장이 신보를 주시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손거울을 통해 대화를 할 때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아서 잊고 있을 가능성도 생각했었다.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왜 호랑이들이 호족의 신보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지?’
호랑이들은 호족의 신보를 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호족의 신보가 명계에 떨어지는 바람에 기분이 안 좋았던 게 아닌가?
내 걱정도 좀 있겠지만 신보의 영향이 큰 줄 알았는데.
“그래서요? 적벽괴도 형의 명계행과 호족의 신보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나요?”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날아오는 ‘그 단어’에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또 ‘그 단어’가 나오기 전에 얼른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호족의 신보가 오염되어 타락한 자 외에는 얻을 수 없게 된 것.
우마왕이 호족의 신보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
타락한 우마왕이 호족의 신보를 노린 이후를 노렸다는 것.
매개로 사용할 겸, 이 땅에서 멀리하여 정화시킬 겸 호족의 신보를 들고 명계로 향한 것.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 호랑이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적벽괴도 형,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명계에 다녀오신 건가요?”
“겨우 그까짓 일로 네가 그렇게 큰 위험을 감수했단 말이냐.”
호족의 전 수장과 현 수장이 동시에 나를 나무랐다.
호족의 신보가 걸려 있는데 호랑이 수장들이 저런 소리를 해도 되나?
다소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플마고 속 황지호는 가면을 쓴 호족 부부가 신보를 가지고 있는 걸 보고 엄청 화내지 않았나.’
옛 한국 지부장이 보여 준 ‘계’새끼의 기억 속, 안다인의 히든 퀘스트.
가면을 쓴 호족 부부는 권속을 부려 안다인을 습격하였다.
안다인이 권속을 모두 격퇴하자 호족 부부가 직접 나서는데, 그때 호족의 신보로 추정되는 물건이 든 상자의 봉인을 풀려 한다.
그때, 황명호의 모습을 한 황지호가 등장한다.
―네 손에 들린 게 무엇인 줄 알고 있는 거냐.
―화, 황호 님······.
―2천 년 동안 신보(神寶)가 나타나지 않는다 했더니, 이런 곳에 있었군.
황지호는 이를 두고 분노와 살기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신역에서 아이를 해하기 위해 우리의 보물을 사용할 생각이었나?
황금빛이 천익산을 뒤덮을 기세로 치솟는 장면은 액정 너머로 봐도 긴장할 만큼 박진감이 넘쳤다.
안다인이 말리지 않았다면 황지호는 그 자리에서 호족 부부를 죽였을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면 황지호가 호족의 신보를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 알 수 있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런 취급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무단으로 신보를 가져간 건 내 잘못이니까 억울해할 자격이 없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적벽괴도 형, 아직 반성하지 않으셨군요.”
“조의신…….”
그러고 보니 사과의 말이 아직이었다.
“허락 없이 호족의 신보를 명계로 반출했어. 미안해.”
“전혀 모르는군!”
황지호가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신보가 없어도 호족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모이는 일은 없었겠지.”
황지호는 언뜻 보기에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아닌 것 같았다.
황지호는 나한테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호족의 신보 때문에 내가 명계로 간 것처럼 변명해서 책임감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딱히 호족한테 은혜를 베풀고 빚을 지우기 위해 그런 건 아니었는데, 말실수를 한 것 같다.
“이 몸은 호족의 신보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여기에 있는 호족 모두가 그랬다. 호족의 신보보다 네가 더 귀하다.”
황지호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마치 황지호가 한 말에 동의한다고 의사 표현을 한 것처럼 보였다.
“황호 님과 백호 형님께서는 명계의 문이 남긴 균열에서 계속 기다리셨어요.”
은호는 두 호랑이가 무엇을 기다렸는지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 둘은 밤을 지새우며 그 추운 천익산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그것도 격렬한 전투를 치른 날의 밤, 크리스마스이브에.
‘계속 기다리다가 온 거구나.’
내가 호족의 정수가 솟는 샘에 도착하자마자 백호군이 손을 뻗었다.
샘 주변에 있을 결계에 내가 감지되어 바로 온 건가 싶었는데, 그냥 그 주변에 있었기에 빠르게 올 수 있던 걸까.
미안해해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러 감정이 동시에 느껴져 반응하기 어려웠다.
“두 분뿐만이 아니라 신수도 옆에서 기다렸어요.”
뭐, 올무가 이 추운 날에 밖에서 나를 기다렸단 말인가!
휘몰아치던 감정이 순식간에 하나로 정리되었다.
나에 대한 분노였다.
어째서 나는 우리 올무가 기다릴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기다리지 않아도 되도록 안심시켜 주거나 쾌적하고 안전하고 따뜻하게 기다릴 만한 공간을 마련해 뒀어야 했는데.
내 자신의 어리석음에 깊이 실망하고 화가 났다.
그런데 나를 기다렸다는 착하고 장한 천재이자 전사이자 천사인 우리 올무는 어디에 있는 거지?
“신수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신가요? 적벽괴도 형이 크리스마스 선물에 섞어 보낸 메시지를 발견했을 때 몹시 슬퍼했죠. 기다리긴 했어도 슬픔에 못 이겨 얼굴을 보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닐까요?”
분노에 이어 절망과 슬픔이 차올랐다.
이유가 어쨌건 올무를 슬프게 한 내 잘못이다.
지나친 충격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몸이 젖은 채로 오래 있었군. 더 들을 얘기가 있다만 나중으로 미루지. 씻고 예비 교복으로 갈아입고 와라.”
그래, 올무에게 사과를 하려면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단정한 옷차림을 갖추고 사과의 말을 생각해 오자.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기숙사로 가기 위해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 꼴로 이 엄동설한에 나가겠다는 거냐? 지금 지나치게 힘을 소모한 상태라 이능파로 네 몸을 보호하지 못할 텐데.”
황지호가 먼저 교복을 갈아입고 오라고 하지 않았나.
일단 멈춰 섰을 때, 은호가 말을 걸었다.
“이 저택에 은광고 교복이 있다는 걸 잊으셨나요? 기숙사 방에 가시게요? 적벽괴도 형이 그러시겠다면 말리진 않을게요.”
은호가 말리지 않는다고?
‘그 단어’에 좀 움찔하긴 했지만, 은호가 보내 준다니 마음이 놓였다.
은호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황지호도 눈살을 찌푸리며 은호 쪽을 바라봤다.
은호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웃으며 온화하게 말했다.
“행여 적벽괴도 형이 감기에 걸리시면 이곳으로 모셔서 제가 직접 간호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 소리를 들으니 없던 걱정이 더 늘어났다.
‘그 단어’+형에 유독 힘을 주어 말하는 게 간호하는 동안 실컷 저 말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애초에 감기에 걸릴 예정은 없었으나 걸릴 확률을 줄이기 위해서 기숙사 방에 돌아가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 감기에 걸리는 일을 피해야겠다.
“……예비 교복은 어디에 있어?”
“네 방에 있는 의류 관리기 안에 있다.”
“내 방?”
기숙사 방에 가지 말라면서 내 방이라니.
잠시 혼란스러워하자 황지호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네가 여기에 올 때마다 머무는 방 말이다.”
객실 말인가.
호랑이들이 편의상 내 방이라고 부르나 보다.
은호가 머무는 현대식 별채에는 누굴 초대하기 어려울 테니 객실을 임시로 그렇게 불러도 혼선이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납득하고 객실로 향하는데 또 황지호가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모르겠다.
‘일단 씻고, 예비 교복으로 갈아입고, 그다음에 우리 올무에게 사죄할 계획을 세우고…… 어?’
객실 문을 연 순간, 눈에 들어온 것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객실에는 빈 공간이 거의 없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객실의 공간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뭐지?’
객실의 크기에 비해 그 무언가가 지나치게 커서 바로 정체를 알아채기 어려웠다.
그러나 곧 벅차오르는 감정을 담아 이름을 불렀다.
“올무야!”
거대한 호랑이, 나의 천재 전사 올무가 몸을 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