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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85화 (685/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85)

89. 선물 (4)

검은 눈송이가 수놓아진 하늘과 은광고를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검은 눈을 내리게 했을 때에는 천익산에 있었기에 학교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꽤 오랜 시간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때 검은 눈은 그쳤을 텐데 왜 지금 내리고 있는 거지?’

명계의 입구로 이어진 균열에 떨어졌던 순간.

수면 위로 검은 눈이 그친 걸 똑똑히 보았다.

명계에 도착하기 전, 현세에서 본 마지막 광경이니 잘못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검은 눈이 내리자 에너미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지. 그렇게 검은 눈이 한차례 내린 후, 사건이 끝났다. 그걸 은광고의 모두가 보았다.”

검은 눈을 맞으며 황지호가 말했다.

지금 검은 눈을 맞고 있는 건 황지호뿐만이 아니었다.

은광고에 있는 이들 중 우산을 쓴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이건 눈이 아니었기에 피하거나 막을 필요가 없기 때문일 거다.

‘이건 보통 눈이 아니라 이능으로 만든 환상이구나.’

아무 효과가 없는 환상이라고 하지만, 은광고 부지 전체를 덮을 정도로 검은 눈을 뿌리는 건 쉽지 않았을 거다.

비유하자면 학교 전체에서 폭죽을 계속 터뜨리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아이템을 썼다면 상당한 비용이 소모되었을 거고, 그 아이템을 사용할 인력 또한 상당한 규모로 투입되었을 거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건가?

이런 짓을 할 능력과 재력이 있는 건 몇 명 없는데.

그 몇 명 중 하나가 마침 눈앞에 있으니 확인해 보기로 했다.

“네가 준비한 거야?”

“학생 자치 기구에서 먼저 제안했다.”

학생 자치 기구가 은광고에 검은 눈을 내리자고 제안했다고?

이해가 안 가는 소리였다.

현명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임원직을 맡고 있는 학생 자치 기구에서 이런 비효율적이며 낭비가 큰 행위를 하자고 제안할 리가 없는데.

하지만 황지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이 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우수해. 그들은 네 이능파가 서린 검은 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한 거다. 그래서 검은 눈이 이 축제에 어울린다고 판단한 거겠지.”

황지호는 학생 자치 기구가 한 그 제안이 몹시 마음에 든 건지 손바닥 위에 검은 눈송이를 모으며 웃었다.

시간이 지나면 검은 눈송이는 흔적 없이 사라져 쌓이진 않았지만, 잠깐이라면 그럭저럭 모아지긴 했다.

“자치 기구 측에서는 입장, 퇴장이 이루어질 때 잠시 뿌리겠다고 했지. 하지만 고작 그 짧은 시간 동안 뿌리면 못 보는 이도 많지 않겠나? 그래서 이 몸이 제안했다.”

말하는 걸 보니 지금 이 검은 눈이 내리게 된 원흉은 역시나 황지호인가?

황지호가 위풍당당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모든 비용은 이 몸, 아니, 학교가 부담할 테니 이벤트 내내 검은 눈을 내리게 하자고 말이다.”

왜 굳이 그런 짓을…….

이해가 안 갔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처음 제안한 건 학생 자치 기구였고 검은 눈을 맞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으니까.

검은 눈송이를 보면 이상하게 민망한 기분이 들었으나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하하하하! 역시 그런 반응을 보이는군.”

그런 나를 관찰하던 황지호가 처웃었다.

황지호가 처웃는 걸 아주 오랜만에 본 기분이 들었다.

황지호 입장에선 고작 하루나 이틀 만에 처웃은 거겠지만.

“의신아!”

그때, 검은 눈이 내리는 하늘에서 불꽃의 용이 하강했다.

홍룡을 탄 염준열이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염준열을 자세히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것 같았다.

염준열이 크게 다쳤으면 용족들이 학교에 순순히 내보낼 리가 없겠지만, 내 제자이자 선배가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치기는커녕 상당히 컨디션이 좋아 보여. 게다가 홍룡이 커진 것 같아.’

염준열은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를 겪으며 성장한 것 같다.

염준열은 밝은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넘쳐 보이는 표정을 보니 나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타닷!

홍룡이 지면에 도달하기까지 3미터 정도 남았을 때, 염준열이 소환을 해제하며 뛰어내렸다.

홍룡이 남긴 불꽃의 잔상 사이로 염준열은 완벽하게 착지했다.

염준열은 붉은 퍼 코트를 휘날리며 내 쪽으로 바로 달려왔다.

“당분간 연락이 안 될 거라고 해서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어. 크리스마스가 끝나기 전에 얼굴을 봐서 다행이야. 메리 크리스마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아니야, 내가 그냥 걱정한 거잖아. 아, 의신이가 보낸 크리스마스 선물 잘 받았어. 여기서 마주칠 줄 알았으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지고 오는 건데.”

염준열은 붙임성 있게 인사를 한 후 나를 살폈다.

물론, 나는 다친 곳이 없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이능파 잔량이 얼마 남지 않은 게 티가 나는 건지 염준열이 표정을 흐렸다.

“지금 이능을 쓰면 피곤하겠다. 혹시 모르니까 적습에 대비해 혼자 다니는 건 자제해. 내가 같이 다니면 좋을 텐데, 지금 학생회 일 때문에…….”

그렇게 말하던 염준열이 내 주변을 보다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황지호를 발견했다.

호족의 큰어르신을 발견한 염준열은 다소 당혹스러워했다.

염준열은 노친네에게 존댓말을 써서 인사해야 할지 후배를 다루듯 말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말을 골라 성탄절다운 인사를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좋은 성탄절이다. 수고가 많군.”

고뇌하는 염준열을 보는 게 재미있었는지 황지호가 씨익 웃었다.

처웃었으면 속으로 한마디 했을 텐데, 다행히 노친네가 자중했다.

“둘이 같이 다니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염준열은 안도 반, 아쉬움 반 섞인 얼굴로 말했다.

시간이 나면 같이 이벤트 구경을 하고 싶었나 보다.

“의신아, 어제 있었던 일에 관해 얘기하고 싶은 게 많아. 이 검은 눈이 내리게 된 과정에 관해서 듣고 싶고, 내가 겪은 일을 말하고 싶어.”

염준열이 ‘내가 겪은 일’에 관해 언급할 때, 어쩐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아마 홍룡이 성장한 것과 큰 관계가 있을 것 같다.

당연히 시간을 내겠다며 답하자 염준열이 몹시 기뻐했다.

저렇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기뻐하는 걸 보니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의신아, 디바이스가 꺼져 있던데 고장이 나거나 방전된 거야?”

“……아니요.”

어둠에서 버티는 동안 디바이스의 전력을 아끼기 위해 전원을 꺼 두었다.

힘이 들 때마다 켜서 사진을 보거나 저장해 둔 디바이스 메시지를 다시 읽으며 정신을 환기시키곤 했다.

윤회의 굴레에서는 디바이스를 사용할 일이 없었으니 현세에 돌아올 때까지 줄곧 꺼 둔 채로 방치했다.

호랑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디바이스를 켜 놓고 딴짓을 할 수도 없으니 켤 틈이 없었다.

“의신이도 깜빡할 때가 있구나. 그럼 디바이스 켜 둬. 나중에 연락할게!”

화르륵!

염준열은 상쾌하게 인사한 후, 다시 홍룡을 불러 하늘로 날아올랐다.

홍룡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멀리서 환호를 보내거나 사진을 찍는 게 보였다.

“조의신, 디바이스를 켜 둬라. 확인해야 할 게 많을 거다.”

확인해야 할 것이라니?

일단 그 말을 듣고 디바이스를 켰다.

전원이 들어온 디바이스에선 쉬지 않고 알람이 쏟아졌다.

삐잇! 삣! 삐이이……!

알람음과 동시에 홀로그램 화면이 연이어 떠올랐다.

화면에 떠오른 문자들을 읽은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거의 다 디바이스 메시지야.’

플레이어 위성 SAT-K가 보낸 알람 메시지도 있었으나 대부분 누군가가 나에게 보낸 디바이스 메시지였다.

은광고에 발생한 이상을 확인하고 안부를 묻는 메시지.

내가 예약 메시지로 발송한 크리스마스 인사에 대한 답변.

연락이 되지 않는데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걱정.

좋은 크리스마스를 보내길 기원하는 인사.

디바이스 주소록에 등록된 이들 중 몇몇을 제외하면 모두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렇게 많이 메시지가 밀려 있을 줄은 몰랐는데…….’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그걸 애써 무시하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중 가장 길고, 많은 메시지를 보낸 건 단연 장남욱이었다.

[장남욱] 의신아, 상훈아, 은광고 소식을 들었어. 두 사람 다 무사해? 당장 너희를 도우러 가고 싶은데 대기 명령이 떨어졌어. 사관학교 주변에도 이계가 발생했거든. 오늘 은광고 이벤트를 보러 갔으면 도우러 갈 수 있었을 텐데…….

[장남욱] 플레이어 위성 정보는 수신되지 않고 있지만, 사관학교 내에서 단독으로 사용하는 레이더에 이계가 감지된 상태야.

[장남욱] 지금 상급생을 중심으로 공략이 진행되고 있어. 만약 이계가 더 발생하면 1학년도 투입될 예정이래.

[장남욱] 은광고 주변의 통신은 마비되었으니까 이 메시지는 지금 확인할 수 없겠구나. 무사하지, 얘들아?

[장남욱] 지금부터 이계 공략에 투입될 예정이야. 희귀도는 높지 않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다녀오면 다시 메시지 할게. 나중에라도 이 메시지를 확인하면 연락 줘.

[장남욱] 이계 공략 끝났어. 이번에도 나는 별다른 활약을 못 했는데, 시후가 침착하게 다른 생도들을 이끌어 줘서 무사히 공략을 마쳤어. 위성이 정상화되면 시후가 최대 공헌자로 지정될 것 같아.

장남욱은 이계 공략에 성공한 후에도 주기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사관학교 주변에도 이계가 발생하는 바람에 은광고에 오지 못했지만, 장남욱은 우리를 도우러 오고 싶었나 보다.

‘일부러 이브에 오지 못하게 날짜를 조정했는데. 장남욱도 학교 밖에서 싸우고 있었구나.’

장남욱을 휘말리게 하지 않으려고 나름 수를 썼는데, 결국 어떤 식으로든 엮이고 말았다.

그래도 은광고 주변보다 사관학교 쪽이 안전했을 테니 나름 만족했다.

긴 문장들을 한참 스크롤한 후에야 장남욱의 메시지가 끝났다.

유상훈은 나름 긴 메시지를 보냈다.

[유상훈] 무사함

평소라면 ‘ㅇ’ 한 글자 쳤을 텐데, 세 글자나 치다니.

장남욱이 워낙 많이 걱정하다 보니 안심시켜 주고 싶었나 보다.

[장남욱] 다행이다, 상훈아! 의신이는 무사해? 상희 누나는? 다른 은광고 애들은 괜찮아? 통신이 재개되긴 했는데 아직 은광고 소식은 많이 없어.

[유상훈] ㅇ

[장남욱] 그렇구나. 아, 의신이가 보낸 개인 메시지가 도착했어! 읽고 올게!

[유상훈] ㅇ

아쉽게도 유상훈의 긴 메시지는 처음 한 번으로 끝났다.

나도 ‘무사함’이라고 적어서 장남욱에게 답장을 보냈을 때였다.

“조의신, 슬슬 중요한 이벤트가 시작될 시각이니 이동하지.”

묘하게 흐뭇해하는 얼굴로 나를 보던 황지호가 입을 열었다.

“중요한 이벤트?”

“1학년 0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이벤트지. 너도 분명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우리 반에서 준비한 건 저번 축제 때 한 것의 재연이니까 딱히 중요한 게 없지 않나?

황지호가 과장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황지호의 말을 들으니 바로 이해가 갔다.

“열네 번째 학생의 등교를 건 승부가 예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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