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93)
89. 선물 (12)
은광고 크리스마스 이벤트 입장이 시작되기 전, 선도부회관.
어제 선도부회관에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또, 학생들의 대피소로 이용되지 않았기에 피해가 거의 없었다.
전선을 유지시켰던 학생회, 거주 구역의 방어를 맡은 지익회, 각 동아리의 피해 상황을 집계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총동아리회에 비해 선도부원들은 비교적 할 일이 적었다.
제일 일찍 도착하여 산타 의상을 갖춰 입은 오혜지가 말했다.
“오늘 출석하겠다고 한 애들은 다 왔네. 그러면 크리스마스 의상으로 갈아입고 와. 그 사이에 인원 배치하고 있을게.”
“동하 형은 오늘 안 오시나요?”
“나중에 들를 거래. 바쁜 것 같더라. 아, 좀 전에 함근형 선생님이 오셨었어.”
1학년 0반 담임이자 학생부장, 선도부 고문인 함근형은 업무가 밀려 있다고 한다.
함근형은 출석한 오혜지를 보자 믿고 뒷일을 맡긴 후, 자리를 비웠다.
사실 함근형이 선도부회관에 들른 시점, 그 자리에는 오혜지 외에도 마진승이 있긴 했다.
하지만 마진승은 목소리만 컸지 일 처리는 영 미덥지 못했다.
만약 오혜지 없이 마진승만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함근형은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을 것이다.
오혜지는 순록 의상 차림의 마진승에게 말했다.
“이번엔 내가 돕지만, 앞으로 동하가 자리를 비우면 진승이가 대표로 움직여야 해. 알았지?”
“넵, 알겠습니다!”
“목소리 한번 우렁차네. 진승이는 정문에서 입장객들에게 인사한 다음에 바로 지익회 쪽으로 가. 너네 반에서 하는 직화구이 전문점 당번 시간은 오후였지?”
선도부원들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오혜지가 선도부원들의 일정표를 홀로그램으로 띄우며 업무를 분배했다.
오혜지는 마진승에게 그 과정을 보여 주며 눈에 익히게 할 생각이었는데, 마진승의 눈이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걸 보니 아직 갈 길이 먼 듯했다.
얼빠진 얼굴로 홀로그램을 보던 마진승이 말했다.
“어?”
“왜 그래?”
“혜지 누나가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점심시간은 따로 있는데…….”
마진승의 말에 뜨끔했지만, 오혜지는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이번 사건에서 전 학생회장 도원우는 진두지휘하며 리더십을 발휘했고, 전 지익회장 성시완은 교내에서 발생한 이계 공략의 최대 공헌자가 되는 등 대활약했다.
소심한 데다 이능이 약한 편이라 소문난 전 총동아리회장조차 방송을 듣자마자 동아리회관으로 뛰어가 학생들에게 사건을 알렸다고 한다.
방송 때문에 집중력이 깨지는 게 싫다며 스피커를 봉인한 괴짜들을 대피시키기 위해서였다.
‘……자치 기구 회장 출신 중에 별다른 활약을 못 한 건 나뿐이야.’
심지어 오혜지가 내심 라이벌로 꼽고 있는 유상희는 대체 뭘 하다가 온 건지 늦게 합류했으나, 치유 이능을 다룰 수 있는 귀한 인재답게 자잘한 부상을 입은 이들을 치료했다.
오혜지도 전투에 참가하긴 했으나 저들의 활약에 미치지 못했다.
어제 사건은 낮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달이 없었으니 오혜지가 사용하는 광림, 월하의 위태천(韋駄天)은 사용할 수 없었다.
기동력이 떨어지는 점을 고려해 오혜지는 학생회관에 남아서 전선을 지켰고, 그 결과 그다지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오혜지는 뒷수습에 열을 올리려 했다.
마진승은 계속 그 점을 지적하려 했으나 오혜지의 말 돌리는 솜씨를 당해 낼 수 없어 제대로 말을 못 했다.
마진승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선도부원들이 돌아왔다.
“다들 갈아입었어? 나중에 자가 수선하기 싫으면 지금 점검해! 아…….”
오혜지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제일 앞장선 인물인 주수혁과 눈이 마주쳤다.
오혜지는 주수혁과 주오 그룹으로 엮여 있어 오래 알고 지냈는데도 새삼 그의 훤칠함에 감탄이 나왔다.
나름 멋을 고려해 디자인했다고 해도 붉은 산타 퍼 코트가 안 어울리는 이들이 많은데, 주수혁은 이를 멋지게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저 주수혁 그 자체로도 멋졌는데, 오혜지의 머릿속에는 그의 육촌 형인 주수겸이 겹쳐져 보여 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주수겸은 어제 사건 때문인지 안부 확인차 연락을 했는데, 사무적인 어조로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고 한 말을 떠올리면 귀가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좀 닮았다고 해서 수혁이를 두고 수겸 오빠를 생각하면 안 되는데. 수겸 오빠는 전혀…….’
오혜지가 뻣뻣한 얼굴로 간신히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주수혁은 오혜지의 이상을 눈치채지 못하고 태연하게 말했다.
“어제랑 의상이 좀 다른 거 같아요. 바뀐 게 아닐까요?”
“음…… 수선하면서 좀 고쳤다고 들었어! 네 게 맞아.”
주수혁이 이브 사이에 격렬한 전투를 거친 탓에 의상을 많이 고쳐야 했다.
은광고 학생 중,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장 많은 에너미를 쓰러뜨린 건 주수혁이었다.
플레이어 위성 정보 수신이 가능하게 된 직후, 은광고 주변에서 공략된 이계와 토벌된 에너미, 최대 공헌자들의 정보가 수신되었다.
수신된 정보 중, 교문 주변에서 싸운 프로 플레이어들과 진족들을 제외하면 주수혁의 이름이 가장 많이 보였다.
주수혁이 연구동 구역의 은광고인을 대피시키고, 조의신을 찾으러 가는 사이 꽤 많은 에너미를 상대한 덕이었다.
주수혁에 이어 맹효돈의 이름이 꽤 보이긴 했으나 그에 비해선 수가 부족했다.
“수혁이는 반에 잠깐 들른다고 했지?”
“네, 부반장인 새론이가 신문부 일로 바쁘다고 해서 카페 일을 돕다가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 끝나고 학생회 쪽으로 가 줘.”
오혜지는 학생회라는 단어에 조금 힘을 주며 말했다.
학생회 쪽으로 가라는 말에 주수혁의 얼굴이 밝아졌다.
주수혁은 자신이 토벌한 에너미 수가 화제가 되는 것보다, 학생회 쪽으로 일하러 가는 게 훨씬 기쁜 것 같았다.
안다인과 조금이라도 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듯했다.
다른 선도부원들이 주수혁의 그런 생각을 읽고 싱글벙글해하는 걸 전혀 몰랐다.
‘다인이랑 약속한 시간보다 더 많이 같이 있을 수 있겠다!’
주수혁은 밝은 얼굴로 1학년 2반에 들렀다.
주수혁의 이름이 신문 기사에 퍼진 탓도 있는지 그들의 베이커리 카페는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인 점을 고려해 케이크 위주로 준비했는데, 오전 영업 시간이 끝날 때쯤에는 화이트 초콜릿이 들어간 케이크는 전부 동이 났다.
“수혁아, 이제 가 봐야 하지 않아?”
“학생회 쪽에 일이 있다고 들었다.”
카페가 바쁜 것 같아 예정된 시간보다 더 오래 있었는데, 반 아이들이 주수혁을 보내 주려 했다.
어떻게 주수혁이 학생회를 도우러 갈 예정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겠지만, 주수혁은 반 아이들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1학년 2반 아이들 절대다수가 주수혁과 안다인 사이를 은밀히 응원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채로, 주수혁은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베이커리 카페에서 서빙하는 동안 입었던 허리형 앞치마를 사물함에 보관할 때, 손바닥만 한 얇은 상자가 보였다.
‘선물은 가지고 가야겠지? 나중에 교실에 들를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주수혁이 준비한 크리스마스는 몹시 소박했다.
안다인은 독서할 때, 읽던 페이지를 책에 첨부된 가름끈을 이용해 표시하곤 했다.
하지만 가름끈이 없는 책의 경우, 페이지를 그냥 외워 버렸다.
안다인이 페이지 숫자를 잊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책갈피가 있는 편이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주수혁이 직접 책갈피를 만들었다.
주수혁은 안다인을 보며 생각난 두 꽃, 동백꽃과 수선화를 이용해 압화 책갈피를 준비했다.
‘좀 더 좋은 걸 준비할 걸 그랬나? 하지만 너무 과한 선물은 부담스러워하던데…….’
안다인은 팬이 많아 선물을 받곤 했다.
이명이 알려진 초반, 처음에 받은 가벼운 선물은 기꺼이 받아들였으나 점점 선물의 수준이 과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팬들이 조공을 한답시고 작은 상자를 내밀었는데, 그 상자 안에는 플레이어카의 키로 추정되는 열쇠와 차가 보관된 주차장의 위치가 쓰여 있었다.
플레이어카 열쇠 사건 이후, 안다인은 일괄적으로 선물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그 점을 고려해 주수혁은 온갖 지혜를 동원해 선물을 준비했다.
‘이 정도면 실용성도 있고 부담스럽지 않겠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줘도 될 거야.’
주수혁은 코트 안 주머니에 납작한 선물 상자를 넣고 학생회관 쪽으로 향했다.
바로 안다인과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속을 잡았으니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 생각만으로 주수혁은 하늘을 날 것 같았다.
주수혁은 가볍게 걸었는데, 지나치게 들떠 있고 그의 신체 능력이 우수한 탓인지 중앙 구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마치 스킬을 쓴 것처럼 빨랐다.
막 중앙 구역에 돌입해 학생회관으로 향할 때였다.
“잠깐, 너. 어디로 가는 거지?”
처음 듣는 여성의 목소리가 주수혁을 멈춰 세웠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주수혁에 비해 꽤 작은 키와 체구를 가진 여성이 보였다.
여성의 얼굴을 본 순간, 세로로 열린 동공과 마주쳤다.
‘진족이다!’
주수혁은 곧바로 경계 태세를 갖추고 멈춰 섰다.
교내라고 해서 안전하지 않다는 건 어제 사건으로 뼈저리게 배웠고, 이 정체불명의 진족 여성은 주수혁을 호의적으로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묻고 있어.”
그 말에 주수혁의 경계심이 순간 최고조에 달했으나, 무기를 꺼내거나 이능을 사용하는 허튼짓을 하지는 않았다.
힘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으나 저쪽이 마음을 먹고 덤벼들면 주수혁은 당해 낼 수 없었다.
시간은 끌 수 있을지언정, 이기거나 도망갈 자신이 없었다.
주수혁은 순순히 상대의 질문에 답하기로 했다.
“학생회관으로 가고 있어요. 혹시 길 안내가 필요하시면 안내해 드릴까요?”
“학생회관이면 저쪽? 이쪽?”
“두 번째로 가리킨 방향과 반대쪽이에요.”
주수혁이 성실하게 답하자 진족 여성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안심과 만족이 묻어나는 분위기에 주수혁이 의아해했다.
마치 저 진족 여성은 주수혁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소개가 늦었네. 나는 사족의 수장이야. 너는 주수혁이지?”
사족의 수장이라는 말에 주수혁은 곧바로 납득했다.
사족의 수장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와 기백은 12지 진족의 수장 중 하나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기사를 통해 접했을 가능성이 컸지만, 어쩐지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수혁이 추리를 거듭할 때였다.
“이 학교에서 가장 등신 같은 놈을 통해 너의 존재를 봤어. 그놈은 아직 너랑 얼굴을 마주칠 준비가 안 됐다.”
사족의 수장이 ‘등신 같은 놈’이라는 표현을 쓴 순간, 주수혁의 머릿속에 방윤섭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하는 생각은 사족의 수장이 말을 이을수록 굳어졌다.
“네가 잘못한 건 조금도 없지만, 내 가호를 받은 놈을 위해서 접근을 삼가 줘. 접근하면 보복하고, 접근을 삼가 주면 언젠가 보답할게. 그럼 이만.”
사족의 수장이라고 밝힌 여성은 그대로 중앙 구역 제1양호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수혁은 그제야 방윤섭과 최영희가 현재 양호실에서 정밀 검사를 받는 중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이어서 그 모든 것을 잠시 잊고 행복에 빠져 있던 자신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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