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97)
90. 가면 (1)
황명호 대저택 본채.
출발 직전에 연락을 받은 아이들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렸어요, 의신이 형!”
“의신이 오빠다!”
“늦어서 미안해. 어…….”
“가요!”
나를 발견하자마자 은서호와 은이호가 양팔을 한쪽씩 잡고 거실로 이끌었다.
아이들이 지나치게 들뜬 것 같은데 호랑이들은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와 같이 도착했는데도 찬밥 신세인 노친네는 물론이고,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백호군도 보고만 있었다.
부엌 쪽에서 잠시 얼굴을 보인 적호와 김신록 부자도 다시 제 할 일을 하러 가 버렸다.
그렇게 질질 끌려간 곳은 거대한 트리 앞이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하게 장식된 트리 같았지만, 오너먼트 전부가 귀금속으로 되어 있는 데에 반해 전구의 전선이 엉켜 있는 등 묘하게 배치가 엉성했다.
‘후예들이 직접 장식했나 보네. 그런데 뭐가 빠진 거 같은데.’
트리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온갖 종류의 장식이 다 있는데 토퍼가 없다는 점이다.
트리를 전부 살펴봤을 때, 막내 은재호가 뚜껑이 열린 상자를 내밀었다.
“의신이 형이랑 같이 장식하려고 기다렸어요.”
상자 안에 든 것은 검은 별 모양의 크리스마스 토퍼였다.
이계 금속으로 추정되는 물질로 가공된 별 안에 황금색, 적색, 청색, 백색, 은색의 펄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에 오색 빛깔의 별들이 빛나는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가 몇 시간 안 남았는데, 나와 이걸 장식하려고 계속 기다린 걸까.’
별 모양의 토퍼는 흔하지만 검은색은 드물다.
그래서 마침 별과 관련된 이명을 갖고 있고, 이능파가 검은색인 나한테 마지막 토퍼 장식을 맡기고 싶었던 걸까?
나를 기다리느니 다른 토퍼를 구하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조의신, 그 토퍼는 주문 제작 한 거다. 후예들이 모양과 색을 지정해서 만들었지.”
“맞아요! 의신이 오빠랑 호족분들을 생각하며 저희가 디자인했어요!”
은이호가 못을 박았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생각이 멈추고 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주춤거리다가 말없이 토퍼를 장식했는데 그사이에 황지호가 처웃고 막내 은재호는 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고작 토퍼 하나 장식했다고 힘이 죽 빠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어디선가 천사의 음성이 들렸다.
왕왕!
그 소리에 전신에서 힘이 솟아나 고개를 휙 돌려 보니 작은 모습을 한 천재 전사가 보였다.
천사는 산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붉은 옷 사이로 보이는 작고 하얀 발이 움직일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천재적일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게다가 등에는 내가 선물한 산타 인형을 짊어지고 있었다.
올무의 깊은 마음과 천재성에 감동하여 한참 찬사의 말을 뱉었다.
“진정해라, 조의신. 신수가 천재라기보다는 네 지능이 급락한 거다.”
노친네가 지켜보다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괜찮다.
황지호를 무시하고 올무의 천재성을 만끽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말했다.
“……나중에 이 별 나 가져도 돼?”
그 말을 하는 건 순록 복장을 한 산령이었다.
산령은 크리스마스 토퍼가 마음에 들었는지 안달 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산령은 집주인 황지호한테 말을 걸었는데, 노친네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산령은 내가 나타났을 때 즈음 묘한 행동을 보였는데, 끝까지 이유를 말하지 않아 황지호의 심기를 크게 거스른 상태였다.
딱 잘라서 안 된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황지호는 의외로 자비롭게 답하였다.
“이 토퍼는 내가 은호의 후예들에게 선물했으니, 너희가 정하도록.”
“그럼 의신이 형 의견을 들어야겠네요.”
“의신이 오빠, 어떻게 하실래요?”
왜 호랑이네 크리스마스 장식의 처분을 내가 맡게 된 거지.
애들이 저렇게 말하는데 모르는 척하거나 미루기가 뭣해서 일단 생각해 보기로 했다.
‘뭘 숨기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산령에게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 크리스마스 선물 하나 정도는 더 줘도 되지 않을까.’
일단 크리스마스 선물은 산령 몫도 줬는데, 하나 더 준다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저 토퍼는 원래부터 내 것도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품은 25일이 지나면 애물단지가 되는 게 보통이니, 아껴 줄 이의 손에 들어가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거실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치울 때 가져가면 되지 않을까?”
“고, 고마워!”
조마조마해하며 이쪽을 보던 산령이 기뻐했다.
순록 차림을 한 산령이 신나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니 어수선하기는 해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났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다들 식당 쪽으로 오십시오.”
그사이에 크리스마스 저녁 준비가 끝났는지 적호가 우리를 불렀다.
1학년 0반 뒤풀이 파티에서 이것저것 먹고 와서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준비한 정성을 생각해 한 번 더 먹기로 했다.
메뉴를 본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와, 곶감이 안 들어간 메뉴가 없는 것 같은데.’
웬일로 은호의 후예들이 요리를 안 하나 싶었더니 곶감 요리를 만들기 위해 그랬나 보다.
모든 메뉴에는 어떤 식으로든 감이 들어가 있었다.
곶감쌈을 시작해 샐러드, 음료, 케이크까지, 어디서 저 많은 감을 구하다가 요리를 했나 싶을 정도로 감투성이였다.
“메뉴 선정은 이 몸이 했다. 미리 만들어 둔 요리도 있지. 백호, 많이 들도록.”
이 짓거리를 한 건 황지호의 안배였나 보다.
황지호는 수북하게 음식을 담아 백호군 앞에 내밀었다.
설마 내가 명계에 가기 직전에 백호군이 황지호 말을 안 들었다고 저러는 걸까?
노친네가 유치하게 제 친우를 괴롭히는 걸 보니 어처구니없었다.
적호도 좋아라 하며 백호군과 김신록에게 곶감을 먹이고 있었는데, 호랑이 집안 꼴이 아주 잘 돌아갔다.
‘적호와 김신록은 처음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는 거겠구나.’
황지호는 몰라도 적호가 저리 들뜬 건 좋게 봐야겠다.
김신록은 다소 기운이 없어 보였지만, 아버지가 내미는 곶감 요리는 아주 잘 먹었다.
가족과 친구끼리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걸 보니, 문득 이렇게 활기찬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건 나도 오랜만이라는 걸 깨달았다.
10대 시절에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길 여력이 없었고, 대학생 시절에는 과외하느라 바빴고, 과외가 없을 때에는 하루하루를 사는 게 고단했으니까.
사고가 거기까지 도달하니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어서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너희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받은 게 있어.”
“이게 뭔데요?”
“풀어 봐.”
마침 음식도 거의 다 먹어서 말을 꺼내기 좋은 시점이었다.
투박하지만 잘 포장된 꾸러미를 본 아이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대표로 첫째인 은서호가 손을 뻗었다.
은서호가 리본을 가볍게 당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포장지가 벌어졌다.
윤회의 굴레를 지키는 파수꾼은 아이의 손에 저 꾸러미가 열리도록 이능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사진기로 찍은 게 아니라 이능 종이에 직접 이능파로 투사했군.”
황지호가 내용물을 보며 한마디 했을 때, 갑자기 후예들이 얼굴색을 바꾸며 기뻐했다.
사진을 손에 쥔 은서호가 눈물을 참으며 입을 뻐끔거리다 말했다.
“어, 어…… 이건 아빠 사진이에요! 의신이 형, 저희 아빠 만나셨어요?”
이능 종이에는 윤회의 굴레 속 풍경이 담겨 있었다.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은빛 영웅이 살아 있을 때, 파수꾼은 몇 번 사진을 전달했다고 한다.
파수꾼은 아이들이 직접 윤회의 굴레에 오거나, 손거울을 직접 사용할 수 없으니 은빛 영웅을 통해 사진이나 편지를 전하며 안부를 주고받은 듯했다.
사진 속에는 윤회의 굴레 풍경 외에도 파수꾼이 찍혀 있었는데, 아버지답게 보이고 싶었는지 내가 직접 봤을 때보다 나이가 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정교하게 풍경을 담아내려면 높은 집중력과 이능파 컨트롤 능력이 필요할 텐데. 파수꾼은 보통 존재가 아니구나.’
사진을 하나하나 살피던 중, 막내 은재호가 말했다.
“사진 전해 주고 싶은데…… 저는 아빠가 있는 곳에 못 가나요?”
은재호는 처음 봤을 때부터 유독 사진을 열심히 찍던데 아빠한테 사진을 주고 싶어서 그랬나 보다.
은재호가 태어났을 즈음에 은빛 영웅이 사망했으니 사진을 전하기 아주 어려웠을 거다.
옥토연도 윤회의 굴레에 오고 갈 수 있으나 은빛 영웅만큼 자유롭게 오고 갈 수는 없었을 테니 제약이 많았을 것 같다.
“나중에 갈 일이 있으면 전해 줄게.”
은재호의 마음을 생각해 그렇게 말했는데, 황지호가 곧바로 끼어들어 말했다.
“거기를 또 갈 생각인가? 조의신, 정신 차려라. 달토끼를 시켜서 보내는 게 좋겠군. 그 망할 달토끼는 호족에 빚이 많으니 마음껏 부려 먹어도 좋다.”
황지호가 툴툴거리긴 했으나 윤회의 굴레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닌지 사진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파수꾼에게 사진을 선물받고, 호랑이들이 제 아버지에게 관심을 갖는 게 좋은 건지 은호의 후예들은 말이 많아졌다.
화제의 중심은 파수꾼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후예를 셋이나 본 건 대단하군. 진족 집단 전체에서 후예를 하나도 얻지 못하는 경우도 꽤 있거늘.”
“그쵸? 굉장하죠? 어쩌면 저희는 4남매가 될 뻔했대요!”
“넷이라고……?”
4남매라는 말을 듣자 황지호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바로 어두워졌다.
현재 이 자리에 있는 건 셋이다.
그러니 네 번째 아이가 없는 이유를 두고 불길한 추측을 하는 듯했다.
황지호를 비롯한 호랑이들의 태도가 심상치 않을 때, 은이호가 말했다.
“엄마가 말해 주셨어요. 언니가 될 뻔한 분은 다른 곳으로 갔다고요.”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게 무슨 뜻이지?”
“다른 분 밑에서 태어나셨대요.”
비명횡사한 게 아니라는 걸 알자 호랑이들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너희를 제외하면 호족의 후예가 태어나지 않은 지 꽤 되었다. 대체 그 아이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거까지는 듣지 못했어요…… 아, 전에 이런 말씀을 하는 걸 들었어요. 누나가 될 뻔한 분은 호족의 아이로 태어날 가능성이 컸다고요.”
첫째 은서호는 은빛 영웅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래 은빛 영웅은 자신의 아이가 셋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아이를 더 맞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를 두고 은빛 영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호족의 아이가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게 가엾어서 내 아이로 맞이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연이 닿지 않았다.’라고.
“……그런 일이 있었군.”
“어떤 이와 인연을 맺었을지 모르겠으나 부디 잘 지냈으면 좋겠군요.”
은서호의 말에 귀 기울이는 호랑이들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후예인 김신록은 말을 한마디도 얹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고, 백호군도 평소대로 말이 없었다.
말은 안 해도 호족의 후예가 될 뻔한 아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걱정하는 게 뻔히 보였다.
‘호족의 후예가 될 뻔했으나 되지 못한 아이라…….’
플마고에서 얻은 정보, 이 세계에서 들은 것들.
이들과 오늘 들은 말을 합치면 떠오르는 가설이 하나 있었다.
호랑이들의 가족사에 끼어들 입장은 아니라서 말을 아꼈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가설을 확인할 방법이 있어.’
크리스마스 파티를 마친 후, 후예들이 잠들었을 때.
나는 가면을 쓴 부부와 만나기 위해 백호군, 황지호와 함께 죽림으로 향했다.
이동 중, 호랑이들에게 질문했다.
“질문할 게 있어.”
“말해 보도록.”
가능하면 적호에게도 묻고 싶은 질문이었지만, 지금 자리를 비웠고 너무 가혹한 질문인 것 같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둘에게는 물어보고 싶었다.
“그분들의 가면 밑 얼굴을 기억해?”
호랑이들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하지 못했다.
그 대답에 내 가설이 점점 굳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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