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02화 (702/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02)

90. 가면 (6)

호족의 신보는 이렇게 쉽게 넘기면 안 되는 물건이다.

신보는 단순히 귀한 아이템이 아니었다.

황지호 정도 되는 신화계 호족을 신보 하나로 제압하는 건 어렵겠지만, 보통 호족의 신보가 발휘하는 힘은 호족의 힘으로 대항할 수 없다.

우마왕이 호족의 신보를 손에 넣을까 봐 은빛 영웅이 걱정할 정도였다.

즉, 신보를 넘기는 짓은 호랑이가 목줄을 내 손에 쥐여 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도 하나도 아니라 두 개씩이나 넘기려 하고 있으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말로만 표현하기에는 은인에게 입은 은혜가 크다. 받아 다오. 네가 받지 않는다면, 이 신보를 사장(死藏)시킬 생각이다.”

거절해도 황지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받지 않으면 신보를 버려 두겠다는 헛소리까지 했다.

나는 무거운 기분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두 신보를 바라봤다.

향로 쪽은 명계에 다녀오며 정화를 시켜 뒀지만, 부부가 보관하고 있던 초혼의 보옥에는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저놈이 진짜 신보를 어디에다 버리기 전에 정화를 시킬 겸, 일단 내가 가지고 있을까.’

다행히 부부가 죽호의 가든에서 복수를 행하여 다소 마음이 진정되고, 이 땅과 괴리된 공간에 있던 탓에 생각보다 그리 오염이 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자리에서 부부와 안다인이 재회를 이루어 맑은 기운을 발산한 덕에 오염은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오염이 남아 있으니 정화가 완료될 때까지 호족으로부터 떨어뜨려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일단 보관하고 있을게.”

“그래, 계속 네가 보관하도록. 은인의 입장이 이로써 더욱 공고해지겠지. 하하하하!”

황지호가 ‘계속’이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했다.

이 좋은 날에 호랑이 가족 앞에서 입씨름을 할 수는 없기에 처웃든 말든 내버려 두기로 했다.

“밤이 깊었으나 할 이야기가 많겠지. 별채를 하나 내어 주마.”

“감사합니다, 황호 님! 아직 듣고 싶은 말이 많았답니다.”

“그래도 늦게 자면 아이의 건강에 좋지 않을 테니 일찍 재워야지요.”

“하하하하! 안다인은 은광고가 자랑하는 수석이다. 부모님과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나눌 체력 정도는 있다.”

황지호는 곧바로 안다인을 호족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일 생각인지 정체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개천신화 속의 황호인 것, 황명호와 동일한 존재인 것 등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었다.

안다인은 호랑이들의 대화 속에서 묻어나는 정보를 받아들이고는 놀란 표정을 잠시 짓곤 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저 부부의 아이가 되는 걸 선택했으니 호족의 사정도 전부 이해할 생각인가 보다.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지. 조의신, 어딜 가려고 하는 거냐. 너도 당연히 와야지. 김신록, 이제 정신이 드나? 걷기 어렵다면 내가 도와주마.”

지익회관에 가서 늦게라도 파티에 출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김신록도 탈출에 실패했다.

황지호는 앞으로 안다인의 거취에 관해서도 정할 모양이라 빠질 수 없었다.

타이틀 히로인이 조금이라도 더 평화롭게 가족과 지내도록 도우려면 나도 지혜를 짜내야 할 것이다.

‘황지호한테 말린 기분이 들긴 하는데, 안다인을 위해서 나도 뭔가는 해야겠고…….’

고민하는 사이에 황명호 대저택에 도착했다.

부부와 안다인은 이동하는 내내 셋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도착하고 나서야 황지호가 오랜만에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본채에 소개해 줄 후예들이 있다. 그 아이들도 은광고에 입학할 예정이다. 시간이 늦었으니 나중에 소개하지.”

본채에도 안다인을 들일 생각인가!

본채에 들인다는 말의 의미를 아는 부부들은 눈을 크게 떴다.

황지호는 별말 없이 웃은 후, 그들이 머물 별채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나와 황지호, 김신록은 그대로 은호가 머무는 현대식 별채에 왔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백호가 한 말이 사실입니까? 다인 학생이…….”

현대식 별채에 들어서자 은호와 적호가 맞이했다.

은호와 적호는 백호군으로부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해 들은 것 같았다.

적호는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으나 은호는 비교적 침착해 보였다.

“의신이 형이 한 질문을 듣고 혹시나 했어요. 제 기억 속 그분의 얼굴과 안다인의 얼굴은 매우 닮아 있었으니까요.”

내가 디바이스를 통해 한 질문을 두고 은호는 어느 정도 생각해 둔 바가 있었나 보다.

황지호가 은휘관에서 있던 일을 전하는 사이, 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적호는 김신록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자 냉큼 아들을 자리에 앉히고 또 산더미 같은 곶감 음료와 음식을 내밀었다.

“그랬군요. 그러면 안다인의 호적 정리부터 해야겠네요.”

“그럴 생각이다. 현재 조사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정보를 모았다만, 좋은 이야기가 없군. 안다인의 현재 호적상 가족들을 하루빨리 떼어 두는 게 좋을 거다.”

황지호는 그 짧은 사이에 안다인의 조사를 실시했나 보다.

황지호는 그들이 안다인이 친자인지 의심하고 여러 차례 친자 검사를 시작한 것부터 현재 그녀를 두고 해외로 향한 것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입학식 때부터 안다인이 가족 사이에서 어떤 존재였을지는 짐작이 갔다.”

“입학식 때부터 말입니까?”

“자녀가 신입생 대표를 맡아 선서를 하게 되면, 보통 부모가 참관하러 입학식장에 온다. 그들이 오지 못하면 다른 친인척을 보내지. 이를 배려해 학교 측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준다만…….”

입학식 때 주수혁과 안다인이 신입생 대표로 선서를 했을 때, 주수혁의 부모는 왔지만 안다인 쪽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안다인이 입학식을 치르기 전부터 부모는 해외로 떠난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들은 호랑이들 사이에서 흉흉한 기운이 돌았다.

덩달아 나도 기분이 바닥을 쳤다.

“한국에서 친권의 힘은 강력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무거운 의무와 권리가 얽혀 있으니, 이를 끊어 내는 게 최우선일 거다.”

“자칫하다가는 그자들이 안다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겠죠. 방비하는 게 좋겠어요.”

그 말에는 나도 동의했다.

꽤 최근까지 보호와 교양을 빌미로한 징계권이 법적으로 인정되어 부모는 자식에게 신체적 체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부모는 자식에게 훈육을 가장한 폭력을 행할 법적 근거가 있던 셈이었다.

현재 민법상 징계권은 삭제되고 체벌도 금지되었으나,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아직도 가혹한 학대에 놓여도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자들은 안다인이 무서워 손을 올리지 못했지만, 극한의 상황에 놓이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안다인이 그 폭력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고…….’

게다가 자식에게는 부양의무라는 게 있다.

그 의무는 납세 수준으로 무거운 게 아니지만, 안다인은 세간의 주목을 받는 몸이라 저들이 나중에 돈을 뜯어내겠다고 부양의무를 들이대면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거다.

실제로 플마고에선 그런 일이 벌어졌고, 이 세계의 크리스마스에도 발생했다.

이야기를 듣던 적호가 제안했다.

“다인 학생을 그분들의 호적상 친딸로 만드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불가능하지는 않을 텐데요.”

그게 가능한가?

적호의 제안은 허무맹랑하게도 들렸으나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대규모의 정보 조작에 성공한다면 가능할 거다. 지금까지 안다인을 대상으로 한 친자 검사를 진행한 업체와 안다인이 태어난 산부인과에 손을 대야겠지. 그 후에 정부의 협력을 받아 친자 확인 소송을 해 가족관계등록부에 안다인의 이름을 올릴 수 있겠군.”

상당히 까다로워 보였지만, 호족의 재력과 힘과 인맥을 동원하면 불가능한 건 아닌 듯했다.

안다인을 위해서라면 당장 실행하라고 등을 떠밀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

유전자 검사 기관이나 병원까지는 그렇다 쳐도 소송 과정에 개입하는 건 꽤 위험한 일 같았다.

‘그걸 실행하면 호족이 정부와 사법부에 너무 큰 빚을 지게 돼. 진족이 단순히 이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호적을 받는 것과 차원이 달라.’

호족이 하는 걸 보면 그깟 빚을 지게 되더라도 저 가족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그러겠노라고 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앞으로의 정부 상황을 고려해 말했다.

“지금 이계부와 플레이어 협회의 충돌이 격화되고 있어. 여기서 정부 쪽에 빚을 지게 되면, 호족이 그 대립에서 정부 손을 들어야 할지도 몰라.”

“그렇군요. 나중에 대규모의 정보 조작을 가해 법체계를 농락했다는 게 들통나면 큰 스캔들이 되겠죠.”

나와 은호의 말을 듣던 황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계부 장관이 플레이어 협회를 압박해서 위성을 국유화하네 마네 하는 꼴을 황지호가 잘 알 테니 한발 물러설 것 같다.

“아쉽지만 양녀로 만족해야겠군.”

“그러는 게 좋겠어요. 아, 그분들에게 새 신분이 필요하겠네요.”

새 신분이라는 말에 황지호가 생각에 잠겼다.

생각은 금방 정리됐는지 웃으며 말했다.

“신보를 은닉한 벌을 줄 겸, 은광고에서 일을 하게 하는 것도 좋겠군.”

그 부부가 은광고에서 일을 하게 되면 안다인과 함께할 시간이 늘어날 거다.

황지호가 부려 먹기는 할 테지만, 부부는 그걸 벌이라고 생각할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부부가 행복해지길 바랐기에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현재 다인 학생의 호적상 부모는 어떤 인간들입니까? 짐작은 갑니다만, 더 자세히 듣고 싶군요.”

“조의신이 말한 안다인의 태몽에 관해 듣는 게 좋겠군.”

황지호가 나에게 떠넘기자 태몽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안다인의 태몽 속에서 그자들이 꽃을 훔쳤다는 대목에 이르자 적호가 크게 분개하고 호족들이 한마디씩 덧붙였다.

호랑이들이 열을 올리는 사이 은호가 내 준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나한테도 태몽이 있었을까.’

바빠서 대화 자체를 잘 못 했던 것도 있지만, 내가 꿈을 안 꾸는 탓에 가족들은 꿈 얘기를 잘 안 했다.

우리 집에서 ‘꿈’ 하면 잠을 자며 보는 게 아니라, 목표나 장래희망을 가리켰다.

그래서 안다인의 태몽에 관한 비화가 풀리는 이벤트도 대충 흘려넘긴 것 같다.

이 세계에서 꿈은 중요한 단서니까 얕게 생각하는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생각은 안다인의 히든 퀘스트까지 흘러갔다.

‘안다인의 히든 퀘스트 이후 황지호는 어떻게 된 걸까?’

‘계’새끼가 아무리 맵을 돌아다녀도 황지호는 없었다.

내 기억 속에서도 그때쯤 황지호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는 없어진 걸로 기억한다.

플마고 속, 타락한 부부로부터 호족의 신보를 회수한 황지호가 어떤 일을 겪었을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때, 은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 맞다. 의신이 형, 늦은 시각이지만 제가 고른 선물이 도착했어요.”

“야간에 짐이 하나 왔다 했더니, 그거였나 보군.”

“네, 바쁘실 텐데 이쪽 사정을 생각해서 빨리 준비해 주신 것 같아요.”

선물이라는 말에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은호가 테이블 밑에 놓여 있던 쇼핑백을 들어 올렸다.

쇼핑백 한구석에 박힌 사슴뿔 모양의 로고를 보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은호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향록 님께서 새 영약을 보내 주셨어요. 명계에 다녀오시느라 차가워진 몸을 데워 줄 거예요.”

그 말에 입안에 머금은 찻물이 밑도 끝도 없이 쓰게 변하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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