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03)
90. 가면 (7)
노도와 같았던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맞이한 주말.
휴일을 맞이했으나 쉬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성국언이었다.
토론회, 학술대회 등의 의원실 행사와 내년 1월 임시회를 앞두고 있는 데다 은광고에서 발생한 사건에 관한 보고도 들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묻혔군!”
성국언이 주요 언론사의 1면, 사회면, 정치면, 이계면 기사를 확인하곤 탄식했다.
기사는 은광고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사건의 과정을 정리한 타임라인, 학생들과 프로 플레이어 팀의 활약, 그날 있었던 미담, 수습 과정 등등.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사건이다 보니 이 정도로 기사가 쏟아지는 건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덕에 중요한 이슈들이 사건에 묻히고 말았다.
그중 하나가 플레이어 위성의 국유화를 사이에 둔 이계부와 플레이어 협회의 충돌이었다.
“국민 여론이 플레이어 위성의 국유화 찬성 쪽으로 기우는 것보다 묻히는 게 낫습니다.”
전무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전무영은 은광고에 사고가 발생했을 시점에는 김신록과 학생들 걱정에 흐트러졌으나 모두의 무사를 확인하고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이계부 장관이 교체되고 난 후부터 잡음이 많아.”
성국언의 시선 끝에 작게 난 신문 기사가 있었다.
[이계부-플레이어 협회 회동 중단, ‘대화의 여지 전혀 없어’]
기사에 사진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성국언은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이계부 측에서 권위를 앞세워 들어줄 수 없는 요구만을 내세우니 대화가 될 리가 없었다.
성국언은 협회 지부장을 부르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던 신임 이계부 장관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의원님이 보시기에 어떠셨습니까?”
“서두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서두른다고 하셨습니까? ‘어리석다’나 ‘망발하다’가 아니라?”
전무영의 신랄한 말에 성국언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설령 협회가 이계부의 말을 따라 주고, 일이 빠르게 풀린다 해도 실제 위성의 소유권이 넘어오는 건 몇 년 뒤의 일이겠지. 그런데도 그 장관은 목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성급하게 굴었다.”
혼돈의 회동 자리 속에서도 성국언은 냉정하게 이계부 장관을 관찰한 듯했다.
성국언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시계를 자주 확인했던 것 같군. 버릇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청문회 때는 그러지 않았다.’
전무영은 신임 이계부 장관의 인적 사항을 머릿속에서 확인했다.
문제가 될 만한 경력도 없었고, 가족 중에도 흠을 잡을 만한 이력을 가진 이가 없었다.
8촌 이내의 친척은 물론, 사돈 쪽 자산의 흐름까지 털어 본 결과 역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인사청문회 시점의 이야기이므로 현재에는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인사청문회 때 조사했을 때는 특이점이 없었습니다만, 새로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겠군요.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부탁한다.”
성국언이 신문 기사가 스크랩된 파일을 닫고 다음 문서를 확인했다.
옛 스승의 영향을 받아 성국언과 전무영 둘 다 종이 문서를 다루는 데에 익숙했다.
성국언이 연 새 파일에는 ‘포모르 마족의 동향’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그들이 한국으로 온다 했지.”
“네, 현재 절흑풍림이 맡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구체적으로 입에 담지 않았지만, 같은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영국에서 열린 포모르 마족의 경매.
다누 신족과 포모르 마족의 대립.
푸른 가면의 마족이 성국언에게 했던 제안.
“하핫! 갑자기 영국을 떠나 이곳으로 오다니. 나를 찾으러 왔나?”
푸른 가면의 마족은 성국언에게 다누 신족의 대관석, ‘리어 팔(Lia Fáil)’을 부수어 달라고 했다.
그 대가로 성국언이 한 나라의 왕이 될 때까지 포모르 마족이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겠다며 제안했다.
성국언은 이에 응할 생각은 없었으나 차명 디바이스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으며 포모르 마족의 동향을 확인했다.
“그렇게 주의를 기울였건만, 내가 한국에 있다는 걸 알아챈 건가.”
“경매에 참석한 모든 자를 추적하고 경우의 수를 지운다면, 의원님이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출신국 정도는 파악해 낼 겁니다.”
“포모르 마족의 자금력이나 정보력을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지.”
성국언은 파일을 내려놓으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나만을 노리고 오는 거라면 다행이다만…….”
성국언의 시선이 그날 동행했던 후배, 조의신이 있는 은광고 쪽으로 향했다.
* * *
주말이 지난 후, 12월의 마지막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나는 주말 내내 호랑이 저택에 머물렀다.
큰 사건이 끝났으니 호랑이들과 할 이야기가 많았고, 은호의 후예들과 놀아 줘야 하고, 별채에 안다인이 머물고 있으니 호랑이 저택을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한 해의 마무리를 최악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자, 조의신! 아침에 먹을 영약이다. 잘 먹도록.”
아침 식사를 끝낸 후, 영약 타임이 도래하였다.
황지호가 내민 도자기 종지에는 환약이 한 알 담겨 있었다.
종지가 앞에 놓이자 내 근처에서 꼬리를 살랑이던 올무가 콜록거리며 작게 재채기했다.
착한 천재 전사도 영약 냄새를 견디긴 힘들었나 보다.
요새 들어 존재감이 뚜렷해진 산령은 황지호가 종지를 들고 오기 전에 멀리 내뺐는데, 우리 올무는 그 힘든 걸 참으며 착하게 내 곁을 지켰다.
“독특한 색깔 배합으로 된 영양이군요. 볼 때마다 향록의 취향을 의심하게 됩니다.”
“영약을 주문했을 때가 성탄절 시즌이라 이런 색을 쓴 게 아닐까요? 붉은 부분은 산딸기즙으로 표현한 것 같은데, 산딸기의 맛과 향이 전혀 없다고 하니 신기하긴 하네요.”
내 앞에 놓인 환약을 본 적호와 은호가 한마디씩 했다.
환약의 절반은 붉은색, 남은 절반은 초록색인 게 향록이 나름 계절감을 살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고약한 맛과 냄새를 가진 영약이 저런 현란한 빛깔을 띠고 있으니 독버섯을 농축한 무언가처럼밖에 안 보였다.
“하하하! 꼭꼭 씹어 먹거라.”
이 영약은 그냥 삼키면 효능이 줄어드니 씹어서 먹어야 한다고 한다.
저작 운동과 혀에 닿는 자극에 반응해 이능파가 활성화된다는 원리라는데, 먹는 사람 입장에선 그저 고문으로 느껴졌다.
차마 바로 먹지 못하고 죽은 눈으로 환약을 응시하고 있자니 은호가 말을 걸었다.
“적벽괴도 형, 어서 드세요.”
아, 슬슬 저 ‘그 단어’와 형의 조합을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은호는 올해가 끝날 때까지 저 말로 나를 고통 줄 생각인 것 같다.
‘지금 저 말을 쓴다는 건, 늦게 먹으면 고통을 주겠다는 뜻이겠지.’
나는 비명을 지르는 정신을 무시하고 환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혀에 닿는 순간부터 정말 매우 맛이 없었다!
한 번, 두 번 씹을 때마다 그 맛없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지나친 맛없음은 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살아 있을까.
고통과 의문 속에서 겨우 환약이 가루가 될 때까지 씹고 삼켰다.
삼킨 후에도 그 맛이 입안에 남아 눈앞이 어지러웠다.
“하하하하! 과연 향록의 영약이로다. 은인의 혈액순환이 눈에 띄게 좋아졌군.”
맛없음으로 인한 분노와 고통으로 혈압이 오른 게 아닐까?
황지호의 처웃는 소리가 커지니 몸에 피가 빠르게 도는 게 느껴졌다.
등교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자, 가자! 오늘 종업식을 치르고 나면 드디어 방학이군.”
“학교에 가신 사이 방학 동안 편히 계실 수 있도록 준비할게요. 다녀오세요.”
왜 내가 방학 내내 호랑이 저택에 머물 것처럼 말하는 거지?
방학 기간에도 할 일이 많고 그중에선 호랑이들과 사전에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도 있으니 자주 얼굴을 볼 필요는 있겠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실례할 생각은 없었다.
황지호가 옆에서 뭐라 말을 걸었지만 적당히 듣고 흘리는 걸 반복하며 학교로 향했다.
‘방학 최우선 사항은 용족과 용궁 건을 대비하는 것. 두 번째는 성국언 암살 사건을 막기 위해서…….’
퍼펑, 펑!
정문을 통과했을 때, 갑자기 들린 폭죽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폭죽이 터지는 건 정문 쪽 하얀 시계탑 주변이었다.
시계탑 앞에는 떡갈나무로 된 거대한 팻말과 네온색으로 된 선명한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가면 뒤의 정체를 훔치러 가겠다.]
가면이라는 단어 밑에는 까마귀 가면 모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전후 사정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으나 저게 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저건 괴도 네온과 드루이디스 콤비가 ‘그 단어’에게 보내는 예고장이었다.
* * *
깊은 어둠 속.
붉은 드레스 대신 무채색의 옷을 걸친 비탄의 웅녀가 홀로그램을 응시하고 있었다.
홀로그램 너머에는 은광고의 풍경이 있었다.
‘그이도, 그 아이도 모두 무사해.’
은광고의 정보를 수집한 결과, 죽거나 크게 다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즉, 은광고의 교직원인 웅녀의 아들은 무사한 셈이다.
순백의 곰 가죽을 뒤집어쓴 상위 존재의 호의에 의하면 적호는 한쪽 다리가 찢긴 후에 부상을 입지 않았다.
비탄의 웅녀가 적호를 먼발치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는 치료가 끝난 상태였다.
하지만 비탄의 웅녀는 여전히 근심을 떨치지 못했다.
‘용제건…….’
용왕신의 총아, 여의보주 용제건이 눈을 가리기 시작하자 소문이 금세 퍼졌다.
비탄의 웅녀가 애써 정보 수집을 하지 않아도 그 소식은 바로 전해졌다.
‘그 아이가 많이 슬퍼하겠구나.’
자신의 아이에게 있는 단 하나의 친우가 하늘로 떠난다니 기분이 착잡했다.
용제건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어렴풋하게 짐작은 갔지만, 내키지는 않았다.
비탄의 웅녀는 상위 존재와 연을 맺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상위 존재와 현세에 머무는 존재가 얼마나 먼 관계에 있는지를.
“웅녀, 웅녀……!”
동굴 밖에서 비탄의 웅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상념을 접었다.
이곳에는 비탄의 웅녀 외의 진웅팔선도 존재했다.
지긋지긋한 번민의 곰은 호족에게 붙잡혔지만, 남아 있는 곰들이 많았다.
‘하나가 갔으니 남은 건 나를 제외하고 여섯. 그중 셋은 잠들었으니 남은 건 셋.’
그 셋 중 둘은 실성했으나, 미쳤다고 해서 힘이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비탄의 웅녀 혼자서는 남은 곰들을 당해 낼 수 없었기에 그녀는 본심을 감추고 얼굴에 한 겹 가면을 덮어썼다.
“들어오렴.”
입실을 허락하는 목소리에는 비애나 애수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혹적인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지자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밝은 얼굴을 한 웅족이 등장했다.
진웅팔선 중 실성하지 않았던 세 곰 중 하나, 환희의 곰이었다.
“좋은 소식이 있어!”
“후후후, 좋은 소식이라고? 번민의 곰이 그렇게 큰 실패를 했는데.”
웅녀가 기다리는 좋은 소식이란 웅족의 몰살, 천신이 적호를 용서하는 것, 아들이 호족에게 인정받고 친우랑 잘 지내는 것 정도였지만, 환희의 곰은 이를 알지 못했다.
어쨌든, 새로운 술식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데 여념이 없던 환희의 곰이 이렇게 급히 찾아오다니, 보통 소식이 아닐 것이다.
비탄의 웅녀는 경계심을 감추며 의뭉스러운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다.
“깊게 잠들었던 곰들의 눈꺼풀이 흔들렸어.”
깊게 잠들었던 곰이라는 말이 들리자 비탄의 웅녀가 비단부채를 펴 입가를 가렸다.
흔들리는 입가를 가린 덕에 환희의 곰은 그녀의 동요를 알아채지 못했다.
부채를 펴는 모습은 그저 놀라움과 기쁨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곧 일어날 거야!”
진웅팔선 중 깊은 잠에 빠진 곰은 셋.
그들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