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06)
90. 가면 (10)
황금빛 이계 금속으로 뒤덮인 호랑이 저택의 지하.
미리 준비해 둔 건지 마력을 머금은 마법진이 잘게 빛나고 있었다.
“딱 맞춰서 왔군요.”
“보아하니 다들 온 것 같군.”
“오늘은 그때와 달리 옥토연이 눈앞에 없어서 속이 시원합니다.”
“망할 달토끼는 오지 않는다. 안다인 건으로 집안이 복잡한 상황이니 더 어지럽힐 수 없다.”
저번에 12지 동맹 회담에 참석할 때에는 옥토연도 있었다.
그때는 배신자를 축출하는 건으로 이야기할 게 있어 옥토연도 여기에서 회담에 참석했는데, 이번은 다르게 진행할 것 같다.
‘황지호 말대로 집안이 복잡한 상황이니까 나도 가능하면 자리를 비우고 싶었는데.’
그래도 오늘은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플마고와 전개가 많이 틀어져 기존 지식을 의존하기 힘들어졌다.
지금 필요한 건 새로운 정보다.
만나 보지도 못한 수장, 직접 봤으나 아직 파악이 안 된 수장들이 많으니 내 눈으로 12지 동맹 회담을 보고 싶었다.
“시작하지. 마법진 밖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도록.”
딱! 파아아……!
황지호가 손가락을 튀기자 마법진이 움직였다.
원형의 마법진을 따라 힘과 문양이 흘러가다 12등분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영역 위에는 12지를 칭하는 문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寅(호랑이)의 영역에 선 황지호의 눈과 머리카락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12지 회담 전용 마력회로를 가동한다.”
파아아아앗!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황금빛이 시야를 덮었다.
빛이 사그라들자 12개의 영역 중 10개의 영역에 그림자가 떠올라 있었다.
황지호와 10개의 그림자를 제외하면 한 자리가 비어 있는 셈이었다.
곧 빈 자리를 제외한 영역에서 이능으로 구현된 단어들이 나타났다.
서족(鼠族), 子[올해의 최우수 디자이너 대통령상 받은 꾀돌이]
호족(虎族), 寅[호랑이님]
토족(兎族), 卯[ㅁㅎㄷㅌㄲ]
용족(龍族), 辰[조카가 인정한 만렙 청룡]
사족(蛇族), 巳[탈피 끝ㅋ]
마족(馬族), 午[평소보다 더 예민한 흑마]
양족(羊族), 未[악몽 사절]
원족(猿族), 申[우주최강 제천대성]
계족(鷄族), 酉[계룡산 밖으로 날아갈 닭]
견족(犬族), 戌[내 개털은 개비싸다]
돈족(豚族), 亥[북유럽 최고 미남신의 황금 멧돼지]
예전에 한 동맹 회담 때와 변함없이 대화명들이 개판이었다.
경험상 저럴 줄은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보니 할 말이 없어졌다.
대화명에 변함이 없는 건 황지호와 제천대성 둘뿐이었는데, 저 둘이 그나마 평범하게 보이는 게 신기했다.
황지호는 대화명들을 한심해하는 눈으로 바라보다 말했다.
寅[호랑이님] “12지 동맹, 우족을 제외한 모든 우두머리의 출석을 확인했다. 회담을 진행한다.”
子[올해의 최우수 디자이너 대통령상 받은 꾀돌이] “황호, 왜 답변이 없어요. 읽씹 그만해 줄래요?”
황지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서돌이 발언했다.
도착하기 전에 본 황지호와 서돌의 대화창 속, 황지호가 대답한 흔적이 없었다.
서돌의 모습을 보니 황지호는 끝까지 답변을 안 했나 보다.
황지호는 여기에서도 듣고 씹을 생각인지 서돌의 말을 무시했다.
대신 다른 수장들이 반응했다.
午[평소보다 더 예민한 흑마] “너 님은 존댓말 그만해 줄래요?”
巳[탈피 끝ㅋ] “그래, 불길하게 초장부터 말을 높이고 지랄이야;”
戌[내 개털은 개비싸다] “꾀돌이 대화명 진짜 없어 보인다.”
酉[계룡산 밖으로 날아갈 닭] “님이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님.”
그건 그랬다.
서돌의 대화명도 참 없어 보였지만 만만치 않게 없어 보이는 대화명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서돌은 다른 수장이 뭐라 해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 같았다.
子[올해의 최우수 디자이너 대통령상 받은 꾀돌이] “앰배서더 후보에게 어필하기 위한 선택이에요! 전 제가 받은 상을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지혜로운 쥐랍니다.”
앰배서더 후보에게 어필하다니.
수장들 중 누군가를 앰배서더로 쓰진 않을 텐데…… 설마 나를 저격한 건가?
서돌은 내가 황지호와 함께 이 자리에 출석하리라고 예상한 모양이다.
앰배서더 자리를 두고도 저렇게 구차하게 구는데 가호 건은 오죽했을까.
서돌의 구질구질함에 시달렸을 홍규빈과 권제인의 마음이 깊게 이해가 갔다.
子[올해의 최우수 디자이너 대통령상 받은 꾀돌이] “제 대화명 잘 보이죠? 저 유능하고 유명한 디자이너예요.”
卯[ㅁㅎㄷㅌㄲ] “누가 물어봤대? 그래서 어쩌라고ㅎㅎ ……잠깐, 내 대화명은 왜 이래!”
옥토연이 대화명을 지금 확인한 건지 비명을 질렀다.
설마 했는데 일부러 저런 대화명을 한 건 아니었나 보다.
황지호가 흡족해하며 씨익 웃는 걸 보니 대화명을 바꾼 건 저 노친네 짓인 듯했다.
혹시 옥토연이 윤회의 파수꾼과 은호 조손 사이의 관계성을 미리 말하지 않은 걸 두고 뒤끝이 남은 게 아닐까?
누가 개판인 12지 동맹의 일각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몹시 유치했다.
卯[ㅁㅎㄷㅌㄲ] “귀엽고 깜찍한 대화명 적었는데 왜 이럼 ㅠㅠ?”
寅[호랑이님] “이제 알았나? 우둔한 토끼 같으니.”
卯[ㅁㅎㄷㅌㄲ] “황호 네 짓이야? 이게 뭐야!”
亥[북유럽 최고 미남신의 황금 멧돼지] “와…… 마법진을 넘어서 개입한 것 같은데, 굉장해! 보통 힘이 아니야.”
옥토연이 원래대로 돌려놓으라며 바락바락 목소리를 냈지만 황지호는 듣는 척도 안 했다.
한편 옥토연이 던진 ‘이게 뭐야’라는 말에 다른 수장들이 멋대로 ‘ㅁㅎㄷㅌㄲ’에 관해 답하기 시작했다.
酉[계룡산 밖으로 날아갈 닭] “물회 닭 턱 꿀”
未[악몽 사절] “모형 독 티끌”
申[우주최강 제천대성] “맞히다 태껸”
戌[내 개털은 개비싸다] “맨홀 다 토껴”
午[평소보다 더 예민한 흑마] “뭐 함 두통 꽥”
巳[탈피 끝ㅋ] “망했다 토끼”
卯[ㅁㅎㄷㅌㄲ] “ㅗㅗㅗㅗㅗㅗㅗㅗ”
12지 동맹 회담은 여전히 모래알 같았다.
아마 정답은 망할 달토끼고, 수장들도 알 텐데 일부러 저러는 것 같다.
아무도 답을 맞히려 들지 않는 초성 퀴즈에 옥토연이 씩씩거렸다.
卯[ㅁㅎㄷㅌㄲ] “다들 1년 사이에 더 멍청해졌어!”
酉[계룡산 밖으로 날아갈 닭] “네, 다음 ㅁㅎㄷㅌㄲ.”
卯[ㅁㅎㄷㅌㄲ] “아니, 이번엔 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걸린 거야!”
寅[호랑이님] “네 알량한 마력으로 이 몸의 간섭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게다가 네 신역에 있는 마법진 수복을 도운 게 누구인지 잊지 않았겠지.”
황지호가 토족의 신역을 도우러 간 건 꽤 예전의 일 아닌가.
그때부터 이런 유치한 장난을 치기 위해 각을 잡고 있었나 보다.
옥토연은 ‘아차!’ 하고 탄식한 후 투덜거렸다.
卯[ㅁㅎㄷㅌㄲ] “대화명에 성의가 없는 것도 열받아! 띄어쓰기도 안 했네!”
子[올해의 최우수 디자이너 대통령상 받은 꾀돌이] “그건 그래. 옛날엔 황호가 막 대하더라도 정도가 있었는데, 요새는 성의가 없어졌어요, 어디서 그런 걸 배운 건지.”
끝까지 제가 할 말만 하는 꾀돌이도 참 대단한 진족이다.
그런데 꾀돌이가 지금 황지호 얘기를 하는데 호랑이들이 왜 내 쪽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황지호가 나한테 막 대하는 걸 배웠다는 건가?
午[평소보다 더 예민한 흑마] “성의라…… 성의 없게도 저번 회담과 같은 대화명을 쓴 수장이 눈에 띄네.”
申[우주최강 제천대성]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나는 우주최강이니까!”
제천대성은 우주최강이라는 말이 몹시 마음에 드는지 연호해 댔다.
수준 낮은 대화를 끝낸 건 의외의 수장이었다.
辰[조카가 인정한 만렙 청룡] “잡담은 그만하지. 시간이 아깝다.”
계속 말을 아끼고 있던 청룡이 말했다.
그런데 조카가 인정한 만렙 청룡이라니…… 청룡은 염방열과 의형제를 맺었으니 조카는 염준열을 가리킨다.
엉망진창인 회담에서 다소 진중한 태도를 보이는 걸 보니 과연 조카가 인정할 만하다.
辰[조카가 인정한 만렙 청룡] “조카의 방학을 맞이하여 나는 매우 다망하다.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을 끌지 말도록.”
진중한 건 아니고 그냥 한결같은 팔불출이었을 뿐인가 보다.
청룡은 염준열이 방학을 맞이해서 함께 놀 계획을 세웠나?
청룡은 용왕신의 무녀 건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니 염준열과 함께할 시간이 부쩍 줄어 스케줄이 상당히 타이트할 거다.
寅[호랑이님] “이 몸도 바쁘시다.”
卯[ㅁㅎㄷㅌㄲ] “황호는 바빠도 분신이 있으니까 놀면서도 회담에 참가할 수 있잖아! 좋겠다!”
申[우주최강 제천대성] “분신이 우주최강급 사기 능력이긴 하다.”
午[평소보다 더 예민한 흑마] “마구간 청소할 우주최강급 분신 하나만 보내 줘.”
申[우주최강 제천대성] “칭찬을 하는 건지, 시비를 거는 건지 모르겠군. 싸움이라면 받아 주지.”
戌[내 개털은 개비싸다] “싸워라! 싸워라! 둘 다 져라!”
혼란스러운 회담장을 향해 황지호가 크게 꾸짖었다.
寅[호랑이님] “그만!”
황지호가 크게 외치자 마력이 마법진을 크게 덮었다.
그러자 제 할 말만 하던 12지의 수장도, 정신없이 떠오르던 문자들도 일순 멎었다.
예전에 황지호가 정숙을 명했던 것과 같은 효과를 일으켰나 보다.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소란스럽게 만든 원인에 황지호 지분이 큰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겨우 회담장이 조용해지자 황지호가 본론을 꺼냈다.
寅[호랑이님] “오늘 무슨 이유로 모인 건지 잊지 않았겠지?”
子[올해의 최우수 디자이너 대통령상 받은 꾀돌이] “물론이죠.”
戌[내 개털은 개비싸다] “설마 배신자의 존재를 잊을 만큼 개멍청한 수장이 있겠어?”
未[악몽 사절] “……음.”
양족 수장이 말을 머뭇거리는 걸 보니 저 수장은 개멍청하게도 배신자의 존재를 잊은 듯하다.
巳[탈피 끝ㅋ] “설령 잊고 있었더라도 오늘 빈자리와 신입을 보면 알지 않을까?”
酉[계룡산 밖으로 날아갈 닭] “그러면 신입이 있는데 소개 좀 하지?”
빈자리는 우족의 수장이었던 우마왕의 자리.
신입은 저강렵 대신 출석한 ‘북유럽 최고 미남신의 황금 멧돼지’을 가리키는 걸 거다.
북유럽의 최고 미남신은 프레이를 칭하니, 프레이의 황금 멧돼지는 바로 굴린부르스티다.
굴린부르스티는 처음 등장하는 자리라 자신이 모시는 상위 존재가 미남신이라는 걸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亥[북유럽 최고 미남신의 황금 멧돼지] “나는 굴린부르스티, 임시 돈족 수장이야.”
申[우주최강 제천대성] “……임시라.”
亥[북유럽 최고 미남신의 황금 멧돼지] “그 사건에 가담한 돈족들은 천계의 수군과 도망가거나 잡히고, 남은 숫자가 거의 없어. 협력하지 않았거나 소식이 닿지 않았던 서너 명만 남았지. 정식으로 수장을 정할 상황이 아니라 임시로 내가 왔어.”
굴린부르스티는 다정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대화명만 보면 영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다른 수장에 비해선 몹시 멀쩡해 보였다.
午[평소보다 더 예민한 흑마] “그럼 결석한 우족은?”
寅[호랑이님] “그건 내가 설명하지.”
흑마가 한 질문에 황지호가 답했다.
寅[호랑이님] “현재 우족은 새 수장 자리를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우족의 수장 자리는 공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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