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09화 (709/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09)

91. 히든 피스 (1)

크리스마스이브 즈음 임연화는 황보윤 교장과 함께 해외 출장 중이었다.

출장지에서는 국제 플레이어 교육자 포럼이 개최되었고, 그 자리에서 한중일 청소년 교류전에 대비해 회합을 가지게 되었다.

교육자 포럼에는 별문제가 없었으나 문제는 회합이었다.

회합에 출석한 이들의 명단을 본 황보윤 교장이 이렇게 발언할 정도였다.

―싸우러 온 게 아닌데, 귀찮네.

중국과 일본의 학교를 대표해 참석한 플레이어 교사들은 황보윤이 기억하고 있을 만큼 호전적인 이들이었다.

황보윤의 예상대로 회합이 시작되자마자 온갖 것으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언어였다.

―어째서 한국어를 사용해야 합니까?

―교류전은 공평하게 진행되어야지요.

한국은 이계 충돌이 제일 먼저 발생하고, 가장 빠르게 플레이어계의 여명기를 맞이한 국가다.

플레이어 용어 중에서는 영어보다 한국어가 먼저 정착한 경우도 있고, 세계 유수의 이계 공략 플레이어 팀 마스터들 중에 한국인이 많았다.

그렇기에 국제 플레이어 모임은 보통 한국어로 진행되었다.

딱히 은광고 측에서 압력을 넣은 것도 아닌데, 이번 교육자 포럼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풍조를 따라 참석자들이 한국어를 사용했다.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황보윤과 임연화가 한국어로 인사하기 무섭게 중국과 일본의 대표가 공격했다.

―각자 사용 가능한 언어를 쓰죠. 저와 임연화 연구부장은 다중 언어를 구사할 수 있으니 편한 언어를 사용하시길. 저는 한국어로 말하겠습니다. 한국어를 모르면 번역 애플리케이션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황보윤이 기세에 눌려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길 기대했던 이들이 불만을 숨겼다.

임연화가 번역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받을 수 있는 링크를 홀로그램으로 제공했으나 아무도 다운받으려 들지 않았다.

대신 재차 황보윤을 향해 물었다.

―창천명궁과 남옥시인은 어디 있습니까? 오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두 분을 뵙는 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만, 갑자기 약속이 변경되어 곤혹스럽군요.

―은광고에서는 일을 이렇게 진행합니까? 개최교의 성급한 행보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본래 회담의 참석 예정자는 부장급 교사 세 명, 함근형, 제갈재걸, 임연화 셋이었다.

갑작스럽게 함근형과 제갈재걸을 대신해 황보윤이 참석하게 되었는데, 임연화는 그 이유를 제대로 듣지 못했었다.

‘교장 선생님 말씀으로는 이사장의 지시라고 했어. 이사장이 시킬 일이 있다고 했었지.’

누가 와도 딱히 상관없었던 임연화는 별생각 없었지만, 다른 참석자들은 생각이 다른 듯했다.

사실 부장급 교사가 모이는 자리에 교장이 등장한 건 상당히 파격적인 인선이었는데, 그냥 저쪽에서는 트집을 잡고 싶은 모양이었다.

황보윤이 외부 활동을 워낙 하지 않다 보니 만만하게 여기고 하는 발언이 분명했다.

저들은 타교의 교장인 점을 고려해 선을 넘지 않으려고 나름 말을 포장하긴 했지만, 말 뒤에 감춰진 의도까진 숨기진 못했다.

‘기선제압을 하고 싶나?’

임연화는 그간 세 학교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교류전을 개최하는 장소는 제비뽑기로 랜덤하게 결정되었는데, 은광고가 뽑힌 것을 두고 말이 많았다.

다른 두 학교가 운이 없던 걸 어쩌겠냐만 교류전 진행에 차질이 빚어질 만큼 신경전이 거세졌다.

하필 최편득이 교류전 진행을 맡아 그 신경전에 끼어들어 서로를 부추기는 바람에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지금 만나자마자 나오는 말들도 그 신경전의 일환일 것이다.

‘한마디 하고 싶지만, 지금 내가 발언하면 교장 체면이 안 서. 참아야 해.’

강한 교사로서 대부분의 인류를 약하고 평등한 존재로 여기는 임연화의 입장에서는 사실 이런 신경전이 이해가 안 갔다.

그런 임연화의 심리를 꿰뚫어 본 그의 언니, 임지화는 강한 동생이 사회로 나가기 전 기초적인 눈치와 상식을 전수하였다.

임연화는 지나치게 강했기에 여전히 상식과 어긋난 행보를 보였으나 임지화의 레슨 덕에 그럭저럭 사회에 적응해 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입을 다물고 황보윤의 대응을 지켜볼 수 있었다.

―두 학교의 교장은 은광고 교장인 내가 부장 교사들을 대리해 출석하는 데에 동의했습니다. 타교 교장의 권한과 일 처리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황보윤은 처음 인사했을 때와 변함없는 평온한 어조였으나 말은 가볍지 않았다.

지금 황보윤이 한 말의 뜻을 거칠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았다.

‘사전 고지도 했고, 너네 학교 교장이 동의한 사항에 왜 부장급 교사인 너희가 왈가왈부 말을 얹는 것이냐.’

더 나아가면 다음과 같이도 해석할 수 있었다.

‘너네 학교는 위아래도 없냐, 일 처리가 난잡한데 설명 좀 해 봐라.’

황보윤을 얕잡아 보고 충동적으로 한 소리 했던 부장 교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외부 활동을 거의 안 해서 걱정했는데, 연륜은 어디 가지 않네.’

임연화는 황보윤의 발언에 만족하며 생각했다.

황보윤은 겉보기에는 3, 40대로 보이나 실제 나이는 72세다.

무려 대영웅 무쇠팔 송만석, 홍경복 화백과 동갑이었다.

어쩌면 저들은 교장의 나이가 생각보다 젊어 보여 더 얕봤을지도 모른다.

―학교를 대표하시는 분들이라면 사전에 교내에서 의사소통을 마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각 학교에서 재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다리겠습니다.

황보윤은 여차하면 회담 자리를 박살 낼 계획인 듯했다.

황보윤이 부장 교사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건 어렵지 않다.

단, 회담 내내 이런 소모적인 공방을 이어 가면 서로 시간 낭비를 할 뿐이다.

‘회담을 이런 식으로 진행할 거면 하지 말자는 거겠지. 어차피 오늘 이야기하지 못하더라도 교류전의 세부 사항은 디바이스 통신을 통해 정하면 그만이야.’

임연화는 회담을 파토 내려는 황보윤을 지켜보기로 했다.

방탄유리로 된 굵은 안경알 너머로 싱글거리며 상황을 보고 있자니 다른 교사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심 임연화가 황보윤을 말리길 바라는지 시선을 보내는 교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임연화가 약한 인류의 눈치 싸움을 그저 자애롭게 바라볼 예정이라는 걸 눈치챈 듯했다.

황보윤을 공격했던 부장 교사들이 다른 교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여태까지 인사 외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이들이 나서서 수습했다.

―황보윤 교장 선생님에 관해선 들었습니다. 제가 그만 나설 틈을 놓쳤군요. 갑작스러운 일이라 소식을 듣지 못한 선생님이 계셨을 뿐이지요, 오해하셨다면 유감입니다.

―그저 고명하신 두 플레이어를 뵙고 싶어서 한 말일 겁니다. 저도 유감을 표합니다.

중국에서는 남교사가, 일본에서는 여교사가 각각 나섰다.

두 교사는 청산유수처럼 입을 놀려 파토 직전의 상황을 무마했다.

화술이나 발언력이 몹시 뛰어나 여태까지 발언한 교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 둘이 합심해서 황보윤을 공격했다면 좀 더 공방이 길어졌을 것이다.

임연화는 각 학교 대표의 실세가 저들임을 파악하고, 둘을 눈여겨 관찰했다.

‘저 남교사는 다리 근육이 발달했네. 우리 반의 약한 아이들은 달리기나 각력으로 절대 못 이길 거야. 여교사 쪽은 이능파 컨트롤이 우수해. 이 정도로 안정된 이능파는 드문데…….’

임연화가 다른 교사들의 이능에 관해 고찰하는 사이, 회담이 진행되었다.

각 학교가 가장 관심을 두는 부분은 일정이었다.

은광고의 경우, 이미 일정이 확정된 다른 학교 행사와 겹치지 않고 사전에 준비할 시간만 확보할 수 있다면 아무 때나 상관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일정을 당기고 싶어 하고, 중국에서는 미루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일본은 화족 출신의 신예 플레이어를 빨리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 저러는 거겠지. 중국에서는 플레이어 양성소 사건 수습이 끝났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좀 더 시간을 들여 준비하고 싶나 보네.’

결국 첫날 회담은 중국과 일본이 어떻게 일정에 관한 협의를 이끌어 낼 것인가를 중점적으로 다루다가 끝났다.

다음 날, 회담에서 어떤 발언을 할지 황보윤과 조율하고 있을 때였다.

―은광고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봐. 귀국해야겠어.

은광고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자 황보윤은 즉시 귀국할 것을 결정했다.

일정이 남아 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해외 출장을 해외여행쯤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고, 실제로 출장을 핑계로 관광을 즐기는 이들이 많았다.

학교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교장이 해외 출장, 관광 중이었다는 소리가 퍼지면 금방 언론의 먹이가 될 것이다.

―회담 꼴을 보니 어차피 둘이서 싸울 것 같던데, 내버려 두자.

―네! 그럼 빨리 가죠!

임연화는 두말없이 바로 동의했다.

임연화는 자신이 담당하는 약하고 어리고 귀여운 3학년 0반 제자들이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천익산에서 작당질을 할 예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우기환은 이를 임연화에게서 숨기고 있었으나, 강한 담임은 그저 모르는 척했을 뿐이었다.

이브에는 어떤 귀여운 장난을 준비할지 기대할 정도였다.

그리고 귀국한 임연화는 3학년 0반의 활약상에 관해 전해 들었다.

“진족을 상대로 싸웠다고? 세상에, 정말 대견스럽다!”

임연화는 우기환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리고 약한 제자들이 다소 자신들의 활약상을 과장해 말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거짓을 고한 적은 없었다.

전투의 흔적을 살피니 임연화 기준으로 그 진족들은 몹시 약한 데다 소수였으나 제자들의 승리는 부정할 수 없었다.

임연화는 제자들이 진족들을 상대로 도망치지 않고 싸운 것이 자랑스러웠고, 무엇보다 큰 부상 없이 살아남았다는 게 너무나도 기뻤다.

그래서 임연화는 제안했다.

“이번에 고생했으니까 선생님이 크리스마스 상을 줄게!”

“……이제 스틱형 소시지는 안 먹을래요.”

상을 주겠다는 임연화의 말에 우기환이 입을 죽 내밀면서 구시렁거렸다.

예전에 3학년 0반 일당이 임연화가 즐겨 먹는 스틱형 소시지를 매진시킨 적이 있는데, 이제 하도 상으로 자주 줬더니 질린 듯했다.

애초에 3학년 0반은 딱히 소시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더 빠르게 질린 것이었으나 임연화는 이를 알지 못했다.

“그래? 그럼 너희가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임연화는 문득 반 아이들이 자신에게 준 크고 멋진 선물을 떠올렸다.

바로 그동안 치른 대결의 추억을 담은 책자였다.

‘그 정도로 멋진 선물을 생각해 내긴 어려운데.’

책자의 내용을 떠올리던 임연화의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임연화는 여름 방학 전에 치른 대결에서 제갈재걸이 읽은 대본의 대사를 생각했다.

―양 측의 요구 조건을 확인하겠습니다. 3학년 0반이 승리할 시, 방학 동안 임연화 선생님은 0반의 우주의 기운에 대항하는 노동력으로서 성실하게 일할 것.

3학년 0반은 여태까지 자신들이 이기면 우주의 기운을 찾는 노동력이 되라고 요구했다.

물론 단 한 번도 임연화에게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에 그 요구는 줄곧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고생한 제자들을 위해 한 번쯤은 그 노동력이 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임연화는 제안했다.

“선생님이 그 우주의 기운을 찾아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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