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11)
91. 히든 피스 (3)
은호가 예전에 산령의 정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자연 발생한 산령이 아니에요. 천익산에서 생을 다했으나, 혼이 윤회의 굴레를 건너가는 대신 이 땅에 머물다가 영기를 받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비록 산령이 천익산에서 비롯된 존재는 아니지만, 실체를 유지하는 건 천익산의 힘 덕이다.
산령은 천익산의 영기를 매개로 존재하다 보니 오래 떨어져 있으면 힘이 약해진다고 했다.
그렇기에 산령은 보통 호랑이 저택에서 지내거나 백호군, 올무와 함께 훈련을 하지만 가끔 천익산을 떠돈다.
오늘 산령은 영기를 받으러 천익산을 떠돌다가 변을 당한 듯했다.
‘강한 담임은 진심이다. 개입하지 않으면 이대로 산령이 잡히겠지.’
임연화의 SNS 계정을 확인하니 천익산을 배경으로 찍은 셀카가 몇 장 올라와 있었다.
태그로 ‘#꼭잡고만다’가 달려 있는 걸 보니 모골송연한 기분이 들었다.
임연화 기준 귀여운 제자를 상대할 때는 다소 봐주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산령은 봐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강한 담임이 봐주지 않는다면 이미 산령은 잡힌 게 아닐까?
“산령의 도주는 천단수에서 시작되었다. 산을 내려가 죽림이나 저택으로 도망칠 계획 같았으나 임연화가 저지했다.”
호랑이 저택에서 천익산으로 이동하는 중, 황지호가 호족 측에서 파악한 사항을 설명했다.
놀랍게도 산령은 아직 잡히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위화감이 느껴졌다.
‘봐주는 건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하나. 이건…….’
나만 그런 걸 느낀 게 아니었는지, 옆에서 듣고 있던 적호가 그 위화감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퇴로는 차단하되 적극적으로 포획하지는 않았습니다. 제자에게 사냥을 가르치는 중인가 보군요.”
적호의 말대로 임연화는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직접 산령을 잡을 수 있게 돕고 있었다.
그래서 산령은 아직 붙잡히지는 않았지만, 죽호의 죽림이나 황지호의 저택 같은 확실한 탈출구로 도망가는 데에 실패했다.
만약 임연화가 없었다면 산령은 평소대로 우기환 일당을 실컷 약 올리고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임연화의 서포트를 받은 덕에 탈출로는 막히고, 3학년 0반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강한 담임이 서포트 솜씨가 훌륭한 것도 있지만, 임연화의 의도를 이해하고 곧바로 실전에 활용하는 3학년 0반도 대단했다.
‘임연화와 3학년 0반은 서로 싸우고 승부하는 꼴 밖에 못 봤지. 힘을 합치니 이렇게 무서워지는구나.’
3학년 0반 선배놈들하고 강한 담임이 이 정도로 합이 잘 맞을 줄을 몰랐다.
이브에 우기환 일당이 담임 타령을 해 댔던 것도 그렇고, 사실 저 사제들은 엄청 친한 게 아닐까?
“산령은 일견 하찮게 보이나 일단은 호족의 영산(靈山)에 깃든 존재다. 수장으로서 인간에게 쫓기는 걸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런 것치곤 호족 사이에서 취급이 영 좋지 않던데.
내 기억 속의 산령은 은호의 후예들이 만든 정체불명의 물질들을 맛보는 역할을 하거나, 백호군과 올무의 훈련에서 신나게 혼나거나, 알 수 없는 짓을 벌이다가 황지호의 꾸중을 듣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호랑이들이 이렇게 나선 걸 보면 완전 내다 버린 건 아닌가 보다.
“그렇다고 해서 신역의 학생과 교사를 공격할 수 없는 노릇이니 까다롭군요.”
“그렇다, 산령이 잡히거나 도망시키는 과정에서 흔적을 남겨 또 추격전을 벌이면 골치 아파지겠지. 일을 깨끗하게 끝내려고 너희를 데려온 거다.”
이 자리에는 신화계 호족인 백호군과 황지호, 전설계 호족인 적호가 있다.
인원수는 3학년 0반에 비해 부족하지만, 전력으로 고려하면 이쪽이 훨씬 우위에 있는 셈이다.
물론, 이쪽에는 핸디캡이 많았다.
‘황지호가 요새 정체를 감출 생각이 없다고 해도 별로 교류가 없던 3학년 0반에게 전부 드러내긴 좀 그렇지.’
황지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호랑이들을 다 데리고 와서 구출전을 펼치려는 걸 거다.
천익산의 산줄기가 보이자 황지호가 말했다.
“나, 조의신, 백호가 주의를 끌겠다. 내가 임연화를 유도할 테니, 조의신과 백호가 3학년 0반 학생들을 맡아라.”
“알았다.”
백호군도 앞에 나서는 역할인가.
예상은 했지만 걱정이 된다.
산령 건으로 방해하면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백호군의 출신을 캐려 들지 않을까?
내가 걱정하는 걸 알아챈 건지 황지호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백호에게는 은광고와 관련된 신분이 있으니까.”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플마고에서도 ‘백호군’이라는 신분이 있었으니까.
백호군은 신역의 수인으로서 은광구를 벗어날 수 없는 몸이다.
그 와중에 은광고에 사고가 자주 터지니, 학교에 출몰하는 빈도도 점차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 일행 외에도 백호군과 마주치는 이들이 늘어나 이름과 신분을 대야 하는 경우가 생겼다.
‘플마고에서는 교직원이었지. 이 세계에서도 백호군은 교직원이라는 설정일까?’
플마고 속 백호군은 휴직 중인 교직원이라는 설정의 호적을 지니고 있었다.
교직원이긴 하나 그럴싸한 직급이 있는 것도 아니라 최편득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게임을 하는 동안 불만이 많았다.
‘황지호가 일을 안 할 거면 차라리 백호군한테 큰 권한을 주지.’
불만이 있지만 사실 이해는 갔다.
황지호가 어떻게 생각하든 백호군은 신역의 수인이니 은광고의 이사회 소속 같은 자리를 주는 건 좀 그랬다.
게다가 권한이 커지면 의무도 커지는 법이니 친구에게 짐을 지게 하고 싶지도 않았을 거다.
플마고의 백호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한데 황지호는 처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백호가 어떤 신분인지 궁금한가? 늘 말하지만 조의신, 네가 정 궁금하다면 나는 얼마든지 알려 줄 생각이다.”
“됐어.”
“백호에게 준 가짜 신분의 이름은 알려 주마. ‘백호군’이라고 한다.”
알고 있으니까 됐는데.
이름도 플마고와 똑같이 ‘백호군’으로 같은 걸 보니 교직원으로 설정되어 있나 보다.
황지호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지 입이 근질근질한 듯했다.
그 꼴을 보니 다소 불안해졌다.
플마고 때와 다른 무언가가 더 있는 건 아닐까?
2학년 때 0반이 될 예정이었던 황지호가 1학년 때부터 0반 소속이 된 것처럼 말이다.
“산령이 잡힌다. 서둘러라.”
그때, 백호군이 한마디 말을 얹었다.
백호군의 말을 들으니 미안함이 솟았다.
황지호에게 낚여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뻔했다.
실없는 친우를 두고도 늘 진중함을 잃지 않는 게 역시 백호군은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웠다.
“황호와 백호, 조의신이 주의를 끄는 역할이라면 저는 도주를 도와야겠군요.”
“그래, 그사이에 적호가 적연으로 산령을 보호해 저택으로 가도록.”
방침이 그렇게 거의 정해졌으나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아무리 강한 담임이 강하더라도 황지호가 질 것 같지는 않아. 나랑 백호군이 3학년 0반을 상대하는 것도 그렇고…… 이대로라면 무사히 산령을 구출할 거야.’
황지호의 의도대로 별다른 흔적, 단서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건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을 것이다.
‘우기환은 산령을 두고 왜, 어떻게 ‘우주의 기운’ 운운했을까.’
‘왜’ 우기환이 우주의 기운에 관해 떠드는지는 알고 있다.
산령은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 스킬을 소지하고 있고, 천단수에 손을 올리고 이를 사용한다.
우기환은 천익산을 떠돌다가 교신 스킬을 사용하는 과정을 목격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이다.
“물어볼 게 있어.”
“말하도록.”
“내가 천단수 앞에서 청호와 신인의 정체에 관해 질문하던 날, 기억해?”
내 질문에 황지호를 비롯한 호랑이들이 인상을 썼다.
호랑이들의 시선이 몹시 따갑게 느껴졌다.
“네가 그 지독한 스킬을 쓰고 피를 토한 후 며칠간 기절했을 때를 말하는 거겠지.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어나자마자 기숙사 방에 둬도 됐다면서 속 터지는 소리를 했는데 어찌 잊을 수 있겠나.”
“…….”
황지호가 쓸데없이 사족을 덧붙인 데에 이어서 백호군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전원 기억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를 거다.
“그 힘에서 우주를 느꼈어?”
“뭐라고?”
“……조의신도 3학년 0반 학생들의 영향을 받았습니까?”
황지호와 적호가 얼빠진 소리를 했다.
나도 질문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확인은 해야 했다.
“알 수 없었다.”
제일 먼저 답한 것은 백호군이었다.
백호군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늘에서 힘이 내려왔으나 힘의 사용 과정을 봤다고 하여 우주의 존재를 떠올릴 순 없을 것이다.”
백호군이 진지하게 답하자 적호와 황지호도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말을 얹었다.
“……백호의 말대로입니다. 거대한 힘이라고 느끼긴 했습니다만, 우주라니요.”
“인간, 진족, 상위 존재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힘이라는 건 분명했다.”
적호와 황지호도 백호군과 같은 요지의 답변을 했다.
호족들의 말을 들으니 과연 의문이 더 깊어졌다.
‘호족들도 이 힘을 두고 우주를 떠올리지 못했는데 어째서 우기환은 바로 ‘우주의 기운’이라고 떠들었던 거지?’
우기환이 산령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3학년 0반이 우주의 기운에 관해 떠든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학년 초, 막 입학한 문새론이 우주의 기운에 관해 취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산령이 우주가 어쩌고 떠든 것도 아닐 텐데 우기환은 교신의 키워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단순히 산령을 도망시키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안하기로 했다.
“이대로 도망치게 해도 끝이 없어. 3학년 0반을 완전히 포기시켜야 해.”
갑자기 화제가 바뀐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황지호는 순순히 내 말에 답했다.
“그들은 곧 졸업할 테니 잠시 도망시켜서 버텨도 되지 않겠나?”
아마 대부분의 은광고인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겠으나, 아마 어려울 것이다.
이미 실례도 있었다.
0반은 고작 졸업하는 것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는다.
“축제 때 졸업한 0반 선배들이 구교사를 폭파하러 왔었잖아. 기억 안 나?”
“……그렇군.”
내가 입학하기 전, 0반 학생들은 구교사를 물리적으로 제령하겠다며 폭파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짓을 졸업한 후에도 시도했다.
작년에 졸업한 선배 놈들 외에도 그 윗대의 선배들도 몰려와서 수작을 벌였다.
황지호가 아무리 바빠도 도서관 안에서 벌어진 주수리의 실종 사건과 동시에 일어난 폭파 미수 사건을 잊지는 않았을 거다.
머리가 아파 보이는 표정을 짓는 중인 황지호에게 말했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은 게 두 가지 있어.”
“말해 보도록.”
내가 말을 마치자 호랑이들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도주를 돕는 것보다는 좋은 방법인 것 같군요.”
“알았다, 조의신. 네 말대로 하지.”
말을 마쳤을 때에는 어느덧 천익산 중턱에 올라와 있었다.
3학년 0반 학생들이 쏜 이능파가 여기저기 전개되어 있는 게, 전쟁터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호랑이들과 함께 배틀필드가 된 천익산 깊은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