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12)
91. 히든 피스 (4)
천익산은 해발 156m의 완만한 구릉성 산이다.
은광고 학생들의 신체 능력치를 고려하면 천익산은 딱히 지세가 험하거나 가파르다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매년 천익산에서 길을 잃는 학생들이 나오고, 산을 이용해 높은 수준의 전투 훈련을 시행하기도 했다.
천익산에 올라가 본 이들은 하나같이 이런 평가를 내렸다.
해발 고도, 넓이 등의 관측 데이터에 비해 천익산이 매우 험준하게 느껴진다고.
그래서 지익회는 매년 산행에 자신이 없는 학생들은 산책로를 벗어나지 말라며 당부하곤 했다.
하지만 일부러 산책로가 아닌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우기환이 이끄는 3학년 0반이었고, 산령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걔들이 다니는 산길은 다 알고 있는데! 뭔가 이상해! 이럴 줄 알았으면 답답해도 천단수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산령은 최근 들어 점점 실체가 분명해지고 있었다.
흐릿한 실루엣이 또렷해지고, 이능파에 색이 더해지는 등 힘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산령의 존재감이 커지는 만큼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 스킬을 사용하는 데에 어려움이 커지긴 했다.
그래도 호족들을 비롯해 산령도 이게 나쁜 일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은호와 산령은 예전에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땅에 깃드는 산령, 물에 깃드는 천령은 힘이 강해질수록 존재감이 강해지는 법입니다. 나쁜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하지만?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야?
―지나치게 빠르다는 생각은 드네요. 이 땅에 넘치는 지력을 고려해 봐도 빨라요. 강해지는 건 좋은 일이죠. 그래도 이렇게 빠른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네요.
판단 소재가 적은 탓인지 은호는 판단을 보류했다.
이를 두고 산령은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몸이 아픈 걸 감수하고 가끔씩 교신 스킬을 쓰기도 했다.
이제 예전처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게 불가능해졌고, ‘그렇다’, ‘아니다’로만 답변을 들을 수 있었지만 시간을 두고 사용하면 그럭저럭 쓸 만했다.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호랑이들이 큰일을 앞두고 있어서 도울 길은 없는지 질문을 여러 개 던졌더니 교신 결과, 백운봉 쪽 샘이 빛났다.
산령이 여러 차례 질문을 거듭해 백운봉에서 언제 무엇을 하면 되는지 알아냈고, 그 결과 산령은 크리스마스에 호족들을 백운봉으로 이끌었다.
황호를 비롯한 호족들은 어떻게 그때 조의신이 나타날 줄 알고 불러낸 거냐며 다그쳤지만 산령은 답하지 않았다.
예전에 황호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실컷 질문을 던지게 하면 되겠군. 예, 아니오로 답변 가능한 질문을 천 개 정도 준비해서······.
교신을 일주일에 한두 번 쓰는 것도 소멸할 것 같은데 천 개라니!
산령이 교신을 썼다는 걸 알게 되면 황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스킬을 쓸 마음이 생겼나 보군. 이 몸이 질문을 준비하마.’라며 신나게 질문할 것이 분명했다.
교신 스킬을 계속 사용하느니 차라리 백호나 신수에게 훈련으로 혼나는 게 낫다고 생각해 산령은 입을 다물었다.
모처럼 용기를 내서 좋은 일을 했지만, 산령이 그동안 호족에게 친 장난질이 업보가 되어 영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산령은 자신의 정체, 존재감 등의 문제로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기분이 더 착잡해졌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달래고자 천단수 앞에 왔다가 변을 당했다.
‘그때 걔를 놀려 먹지 말고 도망쳤어야 했는데!’
그때, 산령의 뒤에서 지금 생각하고 있던 인물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쪽이다! 잡아라!”
우기환의 목소리에 산령이 화들짝 놀랐다.
대체 어떻게 시간을 단축한 건지 몰라도 우기환 일당은 산령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
우기환에 이어서 이곳저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산 밑으로 가게 해선 안 돼. 위로 몰아!”
“우주의 기운에게 어지간한 함정은 통하지 않아. 웬만한 그물망은 투과해 버리니 이능파로 잡아야 해!”
산령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뛰면서 도주로를 확보하려 애썼다.
불행 중 다행인지 잘못 알려진 정보가 하나 있었다.
사실 산령은 이제 존재감이 커져서 예전처럼 좁은 틈을 통과하는 게 쉽지 않았다.
지금도 도망치기 힘든데 그 사실까지 알려졌다면 더 고단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산통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투과한다고? 쟤가? 음, 함정도 잘 먹힐 것 같은데.”
낯선 목소리에 산령이 경계심을 높였다.
강자 특유의 여유 넘치는 음성이었다.
호족 중에서도 저 정도로 강자의 느낌이 넘치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왜 하필 3학년 0반에 저런 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산령이 천단수 앞에서 곧장 도망을 결심한 것도 저 강자의 기운이 느껴진 탓이었다.
‘지금의 나한테는 함정이 통해. 어떻게 한 번에 알아본 거지?’
강한 담임 임연화는 그저 강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전술에도 능한지 산령이 노린 퇴로를 아주 노련하게 차단했다.
임연화는 멀리서 산령이 보는 방향, 발끝이 향하는 곳을 보고선 어느 루트를 이용해 어디로 향하는지 귀신같이 알아냈다.
그러고선 퇴로를 몸소 막아 버리거나 3학년 0반 아이들이 향하도록 유도했다.
산령이 향하려는 곳마다 임연화의 음성이 들려 다시 방향을 전환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젠 산령에게 어떤 무기가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까지 파악해 낸 것 같았다.
다행히 우기환이 나서서 임연화를 말렸다.
“아닙니다! 촘촘하게 그물망을 짜서 던져도 몇 번이나 포획에 실패했습니다!”
“그래? 함정 없이 직접 포획하는 게 더 공부가 되겠지. 자, 그럼……”
우기환의 어리석음에 한시름을 놓았다 싶었을 때였다.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다, 목소리가 들린 위치를 생각하면 아직 거리가 있는데…… 엄청 가까이에 있는 듯한 기분이…….’
산령은 천익산의 영기를 받은 덕에 감지 능력과 관계없이, 산에서 들리는 소리들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그 소리를 바탕으로 산령이 도주 계획을 짜고 실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리의 움직임과 산령이 느끼는 감각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때, 몹시 가까운 곳에서 임연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잡자.”
휙!
산령이 고개를 돌리자, 임연화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임연화 뒤에는 3학년 0반 일당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산령은 소리가 들리는 지점을 고려해 적어도 1km 이상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바로 뒤에 있을 줄은 몰랐다.
너무나도 빠르게 나타난 이들을 보며 산령은 혼란에 빠졌다.
‘순간이동? 아니, 말도 안 돼! 그 정도의 힘은 감지되지 않았는데!’
산령의 혼란은 어느 장비를 발견한 후에야 끝났다.
임연화를 비롯해 3학년 0반 구성원들은 전원 골전도 이어폰을 착용하고 있었다.
척 봐도 그들이 사용하는 장비는 일반적인 게 아니었다.
‘마이크 쪽에 소리 차단 결계가 쳐져 있어……!’
저들이 아무리 가까이에서 말해도 소리는 밖으로 퍼지지 않고 마이크 안으로 전부 빨려 들어갔다.
그렇다면 소리가 들린 곳은 마이크와 이어진 스피커일 것이다.
방금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 건 임연화가 일부러 산령을 겁줄 겸, 도발할 겸 이어폰을 벗고 말했기 때문이다.
‘서, 설마 지금까지 들린 소리는 전부 스피커에서 난 건가?’
3학년 0반 학생들은 산령을 확실히 잡기 위해 소리로 혼란을 주고자 한 듯했다.
저들은 천익산 곳곳에 몰래 설치해 둔 스피커를 통해 산령을 유인하고 있었다.
즉, 성동격서(聲東擊西)에 당한 셈이다.
‘진짜 사람이 낸 소리 같았는데! 음성에서 희미하게 이능파도 느껴졌고…… 설마 출력 장치에 이능파도 담아 둔 거야?’
산령은 또다시 느껴지는 기척에 뒤를 보고 있던 시선을 앞쪽으로 돌렸다.
앞에도 3학년 0반 일당이 있었다.
산령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쟤, 쟤들한테 잡히면 어떻게 되는 거지?’
산령과 우기환의 눈이 마주쳤다.
별 특징 없는 생김새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산령이 보기에 우기환의 눈은 맛이 가 있었고, 산령의 그런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우기환은 입학부터 졸업까지 3년 내내 전교 2등만 하고, 강한 담임한테 패배했다.
우기환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우주의 기운을 얻고자 했다.
그리고 지금 그 우주의 기운이 눈앞에 있으니 맛이 안 간 게 이상했다.
“드디어, 우주의 기운이 손에 들어온다아악!”
“크흐, 우리도 이제 담임한테 이길 수 있어!”
“우린 자유다! 으하하하!”
게다가 맛이 간 건 우기환 하나가 아니었다.
우기환이 특출나게 이상하긴 했지만, 다른 3학년 0반 학생들도 이상했다.
산령이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을 때였다.
“얘들아, 이어폰 버려!”
임연화가 다급하게 외쳤다.
뜬금없는 지시였으나 3학년 0반은 망설임 없이 그 말을 따라 이어폰을 벗으려고 했다.
하지만 임연화의 말에 바로 반응할 정도로 반사신경이 뛰어난 건 우기환과 부반장 두 사람뿐이었다.
곧이어 이어폰의 유닛에서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파직, 파지직!
키이이이이잉!
“크윽!”
“끄아악, 이게 뭔 소리야!”
“아악! 귀가!”
이어폰이 전류를 뿜어내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아슬아슬하게 가청 주파수에 해당하는 고주파음에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어폰을 던졌다.
귀가 상하거나 청력이 손상될 정도로 강한 소리는 아니었으나, 대부분의 3학년 0반이 움직임을 멈출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지금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으나 산령은 서둘러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임연화, 우기환, 3학년 0반의 부반장은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다른 학생들을 두고 가지는 않았다.
그 셋이 누가 공격을 가한 건지 확인하고 있는 사이, 산령은 다시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아직 달릴 수 있어?”
산령이 잠시 멈추었을 때, 노린 것처럼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산령은 말을 건 상대를 보고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의신이었다.
그동안 호족에게 당할 때마다 조의신이 도와주지 않아서 서러움이 쌓이고 쌓였는데, 이 자리에서 보니 너무나도 반가웠다.
낯익은 얼굴을 보자 산령은 갑자기 느껴진 안도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산령은 눈물이 나는 걸 참고 말했다.
“응! 다, 달릴 수 있어!”
“문제없을 것 같군.”
조의신 옆에 있던 백호가 산령을 살피고 한마디 덧붙였다.
백호와 조의신의 태도를 보아하니 산령을 도울 생각인 것 같았다.
항상 산령을 무섭게 쫓고, 훈련을 시키던 백호가 돕는다고 하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하지만 아직 쉴 틈은 없었다.
“오고 있다.”
백호가 산령이 달려온 방향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조의신이 ‘예상대로 회복이 빠르네.’라고 혼잣말하듯 말했다.
아마 3학년 0반 일당에게 공격을 가한 건 이들인 것 같았다.
대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으나 산령이 묻기 전에 조의신이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 칼바람 고개로 가.”
“응!”
호기심을 삼키고 산령은 조의신의 말대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슬슬 지쳐 갔지만, 조의신이 수상한 얼굴을 한 덕에 몹시 안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