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17)
91. 히든 피스 (9)
쿠구구구…….
황금빛이 번쩍이더니 토벽이 움직였다.
황지호의 힘이었다.
‘끝났나 보네.’
사실 토벽이 움직였다기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솟아올랐던 봉우리와 여기저기 널려 있던 흙더미가 바닥으로 가라앉는 게 마치 되감기 하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토벽은 곧 황금의 이능파 입자와 흙먼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선배놈들이 사라진 토벽 대신 나타난 황명호의 모습을 한 황지호를 보며 수군거렸다.
“헐, 저게 누구야.”
“저분이 여기에 왜 옴?”
“여기가 어디인 줄 모르나?”
3학년 0반 원시인들은 잊은 듯하나, 천익산은 은광고 부지에 포함되어 있고 저 노친네는 은광고 이사장이다.
학교 이사장이 교내 산에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거다, 아마도.
‘당연히 이겼겠지?’
황지호를 가만히 쳐다보니 씩 웃었다.
역시 이겼나 보다.
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닌지 선배놈들이 이사장과 나를 휙휙 돌아보며 소리쳤다.
“설마 이사장이랑 한편 먹고 싸웠냐?”
“비겁하다, 1학년!”
그렇게 따지면 강한 담임과 한편을 먹은 3학년 0반 원시인도 비겁한 게 아닌가?
답할 가치가 없어서 그냥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다.
선배놈들이 나한테 뭐라 더 하기 전에 임연화가 입을 열었다.
“얘들아, 미안해.”
임연화의 주변에서 짙은 농도의 이능파가 느껴졌다.
황지호가 토벽 쪽에 결계를 남겨 둔 탓에 전투의 여파가 이쪽에 전해지진 않았지만, 저걸 보니 둘이 얼마나 격렬하게 싸웠는지 짐작이 갔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어리둥절해하는 선배놈들에게 임연화가 말했다.
“이사장님께 졌어.”
“네?”
“선생님 힘으로는 우주의 기운을 탈취하기 불가능할 것 같아, 미안해.”
“아니, 지다니…… 미안하다니…….”
강한 담임이 졌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이해하기 싫은 건지 우기환이 횡설수설했다.
임연화가 몇 차례에 걸쳐서 자신이 완패했다는 사실을 전한 후에야 우기환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굴욕과 분함의 눈물을 참던 우기환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자신이 진 것보다 강한 담임이 졌다는 게 더 서러웠나 보다.
“저런…… 이렇게 울면 근육이 더 약해질 텐데…….”
“으허허헝!”
임연화가 달래 봤지만 더 서러워졌는지 우기환이 꺽꺽거리며 울었다.
우기환처럼 눈물을 참던 선배들도 울기 시작했고, 울고 있던 선배놈들은 아까보다 더 크게 울었다.
그사이에 임연화는 약한 제자들의 근손실을 염려하여 프로틴 소시지를 대량 주문하였다.
‘일단 첫 번째 수는 제대로 들어갔다.’
내가 호랑이들에게 한 제안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3학년 0반과 임연화를 상대로 완승을 거두는 것.
두 번째는 승리한 후, 우기환이 말한 ‘우주의 기운’ 발언의 원인을 알아내는 것.
사실상 두 번째 제안은 다음 수를 두기 위한 포석을 까는 제안이었다.
“우기환 선배님께 질문드릴 게 있어요.”
“끄흡, 끄윽…… 뭔데!”
우기환이 대화를 안 하겠다고 드러누우면 조금 곤란해질 뻔했는데, 다행히 힘의 논리를 따라 강자의 말에 따를 생각인 것 같다.
“선배님이 추적하고 있던 건 천익산의 산령이에요. 하지만 선배님은 산령을 ‘우주의 기운’이라 칭하고 있죠.”
“산령……?”
“……교과서에서만 나오던 거 아니냐?”
진짜로 산령이 그저 우주의 기운이라고 생각한 건가.
어쨌든,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하나같이 우기환 쪽을 보는 걸 보니 처음 우주의 기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건 우기환이 분명했다.
“그게 산령이라고? 우주로부터 기운을 받는 거 다 봤는데!”
“그건 산령이 사용하는 이능이에요. 거대한 에너지원과 일시적, 한정적으로 이어지는 스킬이죠.”
“그 거대한 에너지원이 우주잖아!”
“선배님은 어떻게 그 대상을 우주라고 단정 짓는 거죠?”
우기환이 어떤 답을 할지, 호랑이들도 관심 있게 지켜봤다.
호랑이 외에도 임연화와 3학년 0반 일당도 빤히 쳐다보는 게 그들도 은근 궁금했나 보다.
설마 저들도 여태까지 그 이유를 못 들은 걸까?
우기환의 허무맹랑한 소리에 원시인들이 1년가량 따른 걸 보니 인망 하나는 두터웠나 보다.
“……사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2등을 할 거라는 걸 알았다.”
“기환아?”
우기환이 갑자기 맥락 없는 소리를 하자 임연화가 걱정을 담아 말을 걸었다.
약한 제자가 드디어 어디가 잘못됐나 싶나 보다.
‘드디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우기환은 꽤 예전부터 맛이 갔는데…….
우기환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크크…… 이제, 그 말대로 2등만 하다 졸업하고, 우주의 힘도 못 얻게 생겼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어!”
우기환은 자포자기한 어조로 말했다.
“우주를 어떻게 알았냐고? 예언 속에서 봤으니까 안다!”
예언이라는 말에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우기환이 진짜로 미친 건가 싶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우기환이 예언을 받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초상우주의 존재를 꿰뚫어 봤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예언이라니. 우기환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예언일 줄은 몰랐다.’
이계 충돌이 일어나고 상위 존재와 진족이 있는 세계라 해도 미래를 보는 능력은 극히 귀하고 드물고 위험했다.
미래와 연관된 스킬은 크게 ‘예지’와 ‘예언’이 있다.
예지 스킬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감각, 초월적 인지 이능이다.
예지는 추상적인 힘이었으나 미래와 연관된 특성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이를 관리했다.
‘그 예지보다 더 위험한 게 예언인데!’
보통 예언은 구체적인 언어의 형태로 내려왔다.
예언 스킬의 소유자는 미래에 일어날 무언가에 관해 어떤 말을 듣거나,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예언 그 자체는 모호하고 불명확하나 예지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미래에 접했다.
하지만 예언은 소유자가 거의 없고 발동시키기도 매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예지 스킬 보유자가 국가 당 몇 명씩 있다고 치면, 예언가는 한 시대에 한 명이 나타날지조차 의문일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또한, 진족조차 예언과 관련된 강력한 전승을 보유하고, 때와 시간과 장소가 적절하게 어우러져야 겨우 예언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기환아, 그게 정말이니?”
“진짠데요.”
임연화가 우기환의 손을 꽉 잡는 게 보였다.
강한 담임이 맥박을 확인해 우기환의 상태가 정상인지, 지금 진실을 말하는 건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임연화가 파리해진 표정으로 우기환을 보는 걸 보니 지금 선배놈은 사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3학년 0반 선배놈들도 우기환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비슷한 안색이 되어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황지호가 이들을 향해 말했다.
“천익산 밖으로 피해가 가는 걸 막기 위해 결계를 쳐 뒀다. 들은 사람은 이 자리에 있는 이들뿐이다.”
개방된 장소에서 큰 비밀이 밝혀져 다들 당혹스러워했으나 안심했다.
큰 비밀을 짊어지게 된 3학년 0반 선배놈들은 우기환을 걱정하면서도 원망했다.
“저 미친놈! 예고는 하고 밝혀라!”
“야, 우기환! 그걸 말하면 어떡해! 알고 싶지 않았다.”
“히히히…… 크크…….”
우기환은 이미 다 내려놨는지 큭큭거리면서 웃었다.
우기환은 잠시 웃은 뒤에 자신이 들은 예언에 관해 밝혔다.
자신이 은광고에 입학한다는 것.
입학 후 도원우라는 만년 1등에게 밀려서 2등만 하게 된다는 것.
‘그러고 보니 작년에 우기환이 이런 헛소리를 했다고 했지.’
―어차피 수석과 차석은 도원우기환도원우기환······ 공부를 해도 차석 안 해도 차석······ 히히히.
‘계’새끼는 성시완이 친해졌던 계기가 된 천익산 밤 산책에서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우기환과 마주쳤다고 했다.
그냥 우기환이 이상해서 저런 소리를 했던 거라 생각했지만, 예언 때문에 저런 걸지도 모르겠다.
우기환은 자신의 미래 석차 외에도 자잘한 예언을 몇 개 받은 듯했다.
TC 나이츠는 몇 년간 만년 꼴찌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 등등이 그러했다.
쓸데없고 하찮은 예언뿐이었지만, 우기환이 마지막으로 언급한 사항은 달랐다.
“……우주의 기운에 관해서도 봤다.”
바로 초상우주라는 힘이 이 세계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옛날부터 초상우주가 이 세계를 보고 있었고, 강력한 예언가인 우기환이 이를 감지하고 있었다는 건가?’
우기환은 예언의 백일몽 속에서 거대한 힘을 느끼고, 그것을 초상우주라 칭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세계에서 초상우주의 기운을 감지한 존재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없어졌다.
하여튼 초상우주에 관해 안다고 해서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우기환은 행동에 나섰다.
“어느 날 천익산에 갔더니 예언 속에서 본 초상우주의 힘이 내려오고 있잖아. 당연히 그 우주의 기운이라고 생각했지!”
“미친놈아…… 아무리 졌다 해도 그걸 지금 구구절절하게 말하면 어떡하냐!”
“크크크, 어차피 이제 예언 못 하니까 밝혀도 되지 않냐?”
미쳐서 헛소리를 하는 우기환을 상대로 3학년 0반이 일침을 놓았다.
“헛소리하지 마!”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예언이 나올 때까지 고문당할 수도 있어!”
심지어 자비로웠던 임연화조차 우기환을 상대로 혼을 내기 시작했다.
“기환아, 그렇게 약한 주제에 큰 비밀을 밝히다니 어쩌려고 그래!”
임연화는 약하고 못난 제자가 걱정되어 잔소리하기 시작했다.
우기환의 헛소리는 놀라운 점이 가득했으나 ‘이제 예언 못 한다’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피스의 화신도 예언의 힘을 잃었다고 했지.’
아피스의 화신은 사제들이 미래를 읽고 예언을 하는 매개체로 이름이 높았다.
그를 도발한 결과, 예언을 잃은 것으로 판명이 났다.
극히 드문 예언가들이 예언을 잃었다고 하나같이 말을 하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 임연화의 잔소리가 일단락되었다.
나는 우기환에게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예언의 힘을 잃었다고 느낀 건 언제부터죠?”
두루뭉술한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우기환은 정확한 시기를 입에 담았다.
“작년 입학 실기 시험 날.”
내가 이 세계에 온 날이었다.
* * *
적호는 3학년 0반의 은신처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산령과 호족의 신수를 저택까지 배웅하는 역할을 맡았다.
적호는 본채에 산령과 신수를 바래다 주고 은호가 머무는 현대식 별채로 향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수고하셨어요.”
적호의 보고를 들은 은호가 차를 권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은 두 개뿐이었다.
‘황호의 분신이 보이지 않는군.’
드물게도 별채 안에 황호의 분신이 없었다.
임연화를 상대하기 위해 잠시 분신을 쉬게 하는 듯했다.
은호와 적호가 단둘이 대화하는 건 매우 오랜만이었다.
“적호 님, 질문할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은호는 평소대로 온화한 표정이었으나 적호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최근에 웅녀를 본 적이 있나요?”
“……!”
‘웅녀’라는 단어에 적호가 크게 움찔했다.
옛 정인의 이름은 호랑이들 사이에서 금구로 취급받았기에 몹시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적호는 오래도록 고민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사건이 끝날 즈음, 은광고 출구 쪽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은 누군가가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르겠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적호가 답했다.
은호는 그 모습을 관찰하다 생각했다.
‘웅녀가 남긴 흔적을 발견했거나 비슷한 누군가를 본 건가.’
은호는 플마고를 플레이한 유저로서 어떤 의문을 품고 있었다.
아마 조의신도 품었을 의문이지만, 그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모든 피스가 모이고, 상황이 확실해질 때까지 절대 입을 열거나 개입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은호가 은밀히 나서기로 했다.
“그러면 질문 하나 더 드리죠.”
“……말씀하십시오.”
“적호 님이 호신총을 부수었던 날에 관해 물을게요.”
웅녀, 호신총이라는 단어가 이어지자 적호의 긴장이 더욱 심해졌다.
은호는 적호의 죽은 안색을 무시하고 물었다.
“그날, 웅녀에게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나요?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적호는 이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있었다.
붉은 형틀에 묶여 헤아릴 수도 없이 생각해 봤기 때문이다.
적호는 마지막으로 본 웅녀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망설임 없이 답했다.
“없습니다.”
“그렇군요.”
적호의 대답을 끝으로 은호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은호는 찻잔을 기울이며 생각이 잠겼다.
이 문답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은호는 확신했다.
‘분명 무언가가 더 있을 터.’
아직 찾지 못한, 숨은 단서가 있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