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19)
91. 히든 피스 (11)
붉은 사자 팀 빌딩의 최상층, 팀 마스터 홍염의 제왕 염방열의 집무실.
문과 창문을 시작으로 푸른 불꽃이 피어올라 벽면을 덮다가 사라졌다.
청룡의 힘이 곳곳에 퍼지자 집무실은 완벽한 밀실이 되었다.
소리와 이능파가 새어 나갈 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청룡이 물었다.
“준열이는?”
“은광고 후배와 약속이 있어 외출했습니다.”
“후배 누구?”
“조의신입니다.”
염방열의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청룡이 흐뭇하게 웃었다.
“은인을 만나러 갔나? 사이가 좋군.”
염준열과 조의신의 이야기에 훈훈한 분위기가 되었으나 이는 잠시뿐이었다.
가족이라고 믿었던 배신자에 관한 화제를 꺼낼 시간이었다.
“무녀들이 건넨 선물들은 전부 확인했나?”
크리스마스이브 때, 무녀들은 용족과 붉은 사자 팀원들을 위해 선물을 쇼핑하였다.
당시 무녀들은 경호로 붙인 정보팀 플레이어들을 따돌리고 사라졌는데, 나중에 ‘깜짝 선물을 주고 싶었다’, ‘선물이 무엇인지 감추려 했다’고 변명했다.
그 말을 믿지 않았기에 청룡은 무녀들이 준비한 선물을 철저하게 검사할 것을 지시했다.
“네, 선물에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적당한 구실을 붙여 처분하는 게 좋겠군.”
“전부 동일한 제품으로 구매하여 교체하였습니다.”
믿지 않은 건 염방열도 마찬가지였다.
염방열의 의심과 주의는 극에 달해 무녀들의 손길이 한 번이라도 닿은 물건들은 전부 교체하기로 정했다.
현재 무녀들이 머무는 층을 제외한 모든 곳의 리모델링과 비품 교체가 완료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무녀가 고르고 산 선물을 받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청룡은 염방열의 선택에 만족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지금 무녀들은 어디에 있지?”
“넷은 저번에 쓰러진 것을 빌미로 각자 방에서 요양시키고 있습니다. 간병을 이유로 감시를 붙여 둔 상태입니다.”
유황은 기도실에서, 녹, 벽, 자는 쇼핑몰에서 쓰러졌다.
이들은 모두 조의신의 검은 눈송이를 뒤집어쓴 채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용족 측에서는 이를 두고 무녀들을 추궁하지 않았다.
무녀들이 깨어나기 전, 검은 눈송이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기에 모르는 척 방치하여 어떻게 움직일지 지켜보기로 정했다.
문제는 유황이 검은 눈에 덮인 것을 보고, 기도실 문을 열고 난입한 용족과 마주친 홍이였다.
“홍이는?”
“그 검은 눈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했습니다. 유황에게도 아직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눈 자체에서 맑은 기운이 느껴졌으니 문제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척했듯이 저쪽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나왔을 수도 있다. 골치 아프군.”
무녀들이 용족과 붉은 사자가 그들의 배신을 알아챈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었다.
상대를 방심시켜서 허를 찌르기 위해 발각당한 걸 알고도 모르는 척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와중에도 서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가족같이 지내고 있었다.
청룡은 이런 상황이 눈앞에 벌어지니 매시간 속이 썩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가족끼리 속내를 캐고 배신의 여부를 가늠하는 게 몹시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청룡은 진정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꿋꿋하게 고통을 감췄다.
“그래서 홍이는 지금 어디에 있지?”
“유황이 청하여 곁에서 간병하고 있습니다.”
“몸은 이미 나았을 텐데, 일부러 붙잡아 두고 간병을 받다니. 유황이 무슨 의도로 그리 행동하는 건지 알아냈나?”
“무고한 홍이를 인질로 잡아 두는 건지, 같은 배신자로서 일을 도모하기 위해 곁에 두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용족의 은인, 조의신의 증언을 통해 유황이 배신자라는 것은 확정되었다.
유황을 상대로 공을 들여 주변을 캤으나 알아낸 것은 거의 없었다.
유황은 과연 무녀 중 최고참답게 청룡과 염방열을 앞에 두고도 단 한 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붉은 사자 소속 정보팀을 대거 투입해도 도통 의뭉스러운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조의신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면, 검은 눈송이 속의 유황을 보지 않았다면 청룡은 아직도 그녀를 가족으로서 믿었을 것이다.
무녀에 관한 보고를 주고받고, 질답을 마무리했을 때였다.
“이 화제가 일단락된 것 같으니까, 다른 이야기를 할까? 마침 준열이도 없고 하니 지금 얘기하는 게 좋겠어.”
줄곧 듣기만 하던 용제건이 입을 열었다.
눈가리개로 가려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입가는 호선을 그리고 있는 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녀석은 웃음이 나오나?’
최근 청룡의 마음을 착잡하게 하는 건 무녀 외에도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용제건의 승천이었다.
그동안 청룡은 승천을 택한 동족들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고,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으나 마음이 별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제건이 용왕신과 함께하기 위해 승천을 택한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용왕신 하니 또 청룡의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상위 존재에 가까운 용제건조차 용왕신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했지⋯⋯. 대체 그분께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현세와 상위 존재의 교류는 상위 존재 측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상위 존재 측이 거부하거나 힘의 사용을 중단하면 단절되는 셈이다.
청룡은 용제건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당장 말을 자르고 용왕신의 안부나 확인하라며 다그칠 생각이었다.
하나 용제건이 꺼내는 건 몹시 중요한 이야기였다.
“준열이 생일이 한 달 조금 넘게 남았는데 선물을 아직 안 골랐잖아? 파티 준비는 하고 있어?”
“중요한 문제로군.”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청룡이 엄중한 목소리로 동의를 표하고 염방열이 굳게 답했다.
2월 4일은 염준열의 생일이고 오늘은 12월 31일이다.
용족과 붉은 사자의 가장 큰 기념일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새로운 무녀를 선정하는 정월 초하루는 2월 12일이니, 결전의 날을 앞둔 마지막 축제가 되는 셈이다.
곧 팔불출 용족과 그 아버지가 열렬히 파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 *
염준열이 예약한 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룸.
아뮤즈 부슈로 나온 청포묵 테린을 먹고 난 후, 염준열이 선물에 관한 화제를 꺼냈다.
“크리스마스 선물, 잘 받았어. 고마워.”
“저야말로요.”
염준열은 선배로서, 제자로서 각각 선물을 마련했다.
성실한 선배이자 제자인 염준열이 그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했기에 나도 선물을 두 개 준비했다.
염준열은 선물을 많이 받을 거고, 또 곧 생일이라 선물이 쌓일 테니 부담이 가지 않도록 부피가 작은 소모품을 골랐다.
염준열은 내가 고른 파베 초콜릿과 티라이트 캔들을 두고 한참 감사 인사를 했다.
‘저렇게 마음에 들어 하다니. 더 큰 걸 골랐어야 했나? 아니, 처치 곤란한 선물을 주는 건 미안한 짓이지.’
다음 생일 선물은 좀 더 고민을 해야겠다.
염준열이 선물한 홍룡 굿즈 못지않은 생일 선물을 고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사실 나도 장갑을 선물하려고 했는데, 0반 애들이 장갑을 고르는 걸 보고 다른 것을 골랐어.”
염준열은 쇼핑하던 우리 반 애들과 마주쳤었나 보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추위를 많이 타는 것 같나?
노친네가 예전에 나한테 장갑을 사 주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다음 코스로 홍합 솥밥이 나올 때에는 조금 꺼려지는 화제로 바뀌었다.
“스승님이 보내신 메시지를 보고 놀랐어요. 당분간 연락이 안 된다고 하셔서요.”
염준열이 명계에 가기 전 보낸 메시지에 관해 언급했다.
존댓말을 쓰는 것을 보니 제자 염준열로서 하고 싶은 말이었나 보다.
염준열은 그 메시지를 두고 추궁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걱정하였다.
“예정대로 일이 안 되면 추가로 메시지가 도착할 거라고 했죠? 그 메시지가 올까 봐 걱정했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다른 이들에게 모든 걸 떠맡기는 내용의 유서를 보내다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명계에서 무사히 돌아왔으니 당분간은 유서가 날아갈 일은 없을 거다.
“⋯⋯스승님은 그날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고 계셨던 거죠?”
“응.”
총명한 염준열은 그날의 일을 되짚어 보면서 내가 개입했다는 점을 알아챈 것 같다.
염준열의 통찰력에 다시금 감탄했다.
‘염준열한테도 미리 말하는 게 좋았을까?’
하지만 나도, 용족과 붉은 사자도 결국 염준열에게 말하지 않은 채 일을 추진했다.
그 이유는 다른 학생들과 공평하게 대하기 위해서, 염준열에게 말한다면 다른 학생들을 위해 무리한 행보를 보일까 봐 등등이 있었다.
어쨌든 사지(死地)가 될 것을 알면서도 예고 없이 염준열을 밀어 넣었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스승님이 촉룡 외할머니를 불러 주셨다는 게 기뻐요. 그리고 이런 큰 사건을 막아 내셨다는 게 자랑스러워요.”
“나 혼자 한 게 아니야.”
“하지만 큰 역할을 하셨죠. 스승님은 검은 눈을 내리셨고, 그 외에도 많은 활약을 하셨겠죠.”
염준열의 눈에 신뢰와 존경이 가득해서 똑바로 보기 어려웠다.
염준열은 검은 눈이 인상 깊었나 보다.
직접 검은 눈을 맞으러 갔을 때 어떤 감각이 느껴졌는지, 검은 눈으로 가득한 은광고가 어떻게 보였는지 한참 동안 설명했다.
계속 이어지는 찬사에 식사를 제대로 하기 힘들어졌다.
점점 말수가 없어지는 나를 두고도 염준열은 검은 눈에 관해 이야기했다.
“스승님, 혹시 마족이 지배하는 이계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것도 예측하셨나요?”
“⋯⋯이런 일?”
겨우 화제가 바뀌어 정신이 들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염준열의 이동 경로를 떠올렸다.
마족, 이라노우스의 사제는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로 구현한 가든 안으로 염준열을 끌어들였다.
그자는 용살의 신화를 가진 무기, 고대 노르드어로 분노를 뜻하는 그람(Gram)을 들고 염준열을 살해하고자 했다.
‘만반의 준비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용살의 무기를 들고 오다니.’
촉룡과 제갈재걸을 대기시키긴 했으나 그들은 조금 늦었다고 한다.
같이 휘말려 든 2학년 0반과 마진승의 활약이 없었다면 염준열이 위험해질 뻔했다.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에는 손끝이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저희가 이계 지배를 했다는 건 들으셨나요?”
이계 지배?
학생들의 증언과 제갈재걸의 보고서에는 이계 공략에 성공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연히 이계를 주파하여 보스 에너미를 쓰러뜨려 공략을 완료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계 지배라니.
‘금찬솔과 왕찬솔이 이계 지배에 성공한 이력이 있긴 한데⋯⋯.’
내가 생각에 잠기자 염준열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짓궂기보다는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건 스승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인가 봐요.”
염준열은 이계 지배 과정을 설명했다.
그 과정에 있던 이능파 링크에 관해서도 말했다.
2학년 0반 학생들, 마진승, 촉룡 그리고 염준열이 이능파 링크에 성공했다는 말에 내 귀를 의심했다.
황지호의 말에 의하면 진족은 이능파 링크가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나?
“제가 이능파 링크에 가담한 순간, 홍룡을 중심으로 이능파가 모이기 시작했어요. 단순히 이능파를 합한 것보다 더 강한 힘이 모였어요! 그때만큼은 제 홍룡이 촉룡 외할머니보다 더 강했을 거예요.”
염준열의 설명을 듣다 보니 어느 가설이 세워졌다.
진족과 진족, 진족과 인간 사이의 이능파 링크는 불가능하다.
단, 후예가 가담하면 가능해진다.
그리고 염준열의 설명을 들었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염준열이 아니라 홍룡을 중심으로 힘이 모였다고 했지. 혹시 자신의 근원과 관련된 화신을 소환하는 광림이 있다면 단순히 이능파 링크에 성공하는 게 아니라 힘이 강해지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시스템 음이 들렸다.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차원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