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20)
92. 카운트다운 (1)
‘차원 이해도가 상승했다.’
이 세계에서 차원 이해도가 상승한 건 여덟 번째였다.
첫 번째는 처음으로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 스킬을 사용해 이 세계가 게임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을 때.
두 번째는 저강렵을 배신자로 특정한 12지 동맹 회담이 끝났을 때.
세 번째는 금찬솔과 왕찬솔로부터 이능파 링크의 존재에 관해 들었을 때.
네 번째는 신인과 청호가 공청훤과 한이라는 것을 알아냈을 때.
다섯 번째는 김신록의 리플레이가 끝난 후 기능에 관해 고찰했을 때.
여섯 번째는 옛 한국 지부장이 남긴 단서를 얻었을 때.
일곱 번째는 윤회의 굴레에서 생사(生死)의 안광을 습득했을 때였다.
‘차원 이해도가 상승한 건 전부 중요한 단서를 얻거나 이 세계의 비밀에 접했을 때였어. 지금 들은 것도 분명 중요한 실마리가 되겠지.’
차원 이해도가 상승했다는 시스템 음에 이어 추가 메시지가 들렸다.
〈스킬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전용 메뉴’의 리플레이 기능이 4단계에서 5단계로 상승합니다.〉
리플레이 단계가 상승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지막으로 리플레이를 사용한 후, 단계가 두 개나 올랐다.
마치 리플레이를 사용하라고 독촉하는 것 같았다.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가 지난 플마고 세계를 보여 주는 건 가혹하지 않나?’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 입장에서 봐도 고통스러웠는데, 그 세계의 당사자가 본다면 더욱 힘들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다음 리플레이 대상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내년에 벌어질 시나리오 중, 정보량이 적으면서도 발생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건 바로 성국언 국회의원 암살 사건이다.
그 시나리오에서 암살은 성공하여 성국언과 전무영이 사망한다.
‘만약 다음 리플레이 대상자를 고른다면, 성국언과 전무영을 택해야겠지.’
내가 리플레이에 관해 밝히고 이를 사용해도 되겠냐고 권하면 두 사람은 십중팔구 이에 응할 것이다.
성국언은 별로 재 보지도 않고 하겠다고 할 거고, 전무영은 성국언의 안위를 망설이겠으나 암살 건에 관해 들으면 고민 끝에 수락할 게 분명했다.
‘아직 시간이 있어. 지금은 용궁 건에 집중하자. 리플레이 없이도 둘 수 있는 수부터 두면 돼.’
나는 잡생각을 떨쳐 내고 이능파 링크와 후예에 관해 생각하며 염준열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염준열은 말솜씨도 훌륭하여 이라노우스 사제의 습격부터 이계 지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눈앞에 그려지듯 설명했다.
2학년 0반의 중심인 금찬솔과 수천 년을 살아온 촉룡을 제치고 이능파 링크의 주도권을 가져온 염준열의 활약은 과연 대단했다.
‘염준열과 김신록은 비슷한 광림을 사용하지.’
염준열은 홍룡을 소환하고, 김신록은 호랑이과 곰을 불러내는 광림을 쓴다고 들었다.
이 둘은 흑막이 집요하게 노리는 후예들이다.
‘이능파 링크는 흑막에게 있어서 몹시 성가신 능력이겠지. 그 힘의 비밀이 퍼지기 전에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닐까? 아니면 뭐가 더 있는 게 아닐까?’
저 둘이 사망하면 망가지고 무너지는 관계와 진족, 플레이어가 셀 수 없이 많았기에 단순히 그 이유를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현시점에서 분명해진 건 사용할 수 있는 피스가 더 늘어났다는 점이다.
‘어쩌면 계속 고민하고 있던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염준열의 설명이 끝나자 질문을 몇 개 던지고 답을 들으며 수를 정리했다.
디저트로 나온 귤 콤포트를 다 먹어 갈 때 염준열의 이야기와 내 생각이 마무리되었다.
자리가 파하기 전, 염준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승님, 오늘 저녁에 바쁘신가요? 저번에 말씀드렸을 때에는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작년에 염준열은 에어 호텔을 빌려서 라이브 드래곤 쇼를 했다.
올해도 신년 맞이를 하며 팬 서비스 차원에서 SNS 계정을 통해 방송을 진행할 예정이라 들었다.
단, 작년에 에어 호텔을 대여해 대대적으로 초대객을 모은 것과 달리 붉은 사자 팀 빌딩에서 가까운 이들만 초청해 간소하게 보낼 듯했다.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조용히 보낼 겸, 배신자들을 고려한 안전 문제를 위한 선택이었다.
염준열은 그 신년 맞이에 나를 초대했다.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일 테니 사양하려 했지만, 용제건이 불쑥 튀어나와 ‘용족의 은인’이 어쩌고저쩌고하며 염준열의 초대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명계에 갈 예정이었기에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어서 일정을 핑계로 거절했다.
‘내가 염준열의 초대를 받고, 또 이걸 거절하는 처지가 되다니.’
작년 새해에 염준열의 모습을 빌려 환몽 경매를 박살 냈던 걸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제자의 초대는 몹시 감사한 일이었지만, 아쉽게도 그 파티에 갈 수는 없었다.
“선약이 있어. 권해 줘서 고마워.”
그 말에 염준열은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나 줬다.
누구와 참 비교되었다.
염준열과 식사하는 중이라 제대로 읽지는 않았지만, 황지호로부터 쓸데없는 메시지가 오고 있었다.
염준열과 헤어진 후에 메시지를 읽어 봤다.
[황지호] 조의신, 또 용족의 영역으로 가 버리지 않겠지?
누가 들으면 용족의 영역에 자주 간 줄 알겠다.
방송국 사건 때 용족의 영역으로 간 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나?
[황지호] 올해가 지나기 전에 안다인을 소개할 예정이니 반드시 참석하도록.
호족 부부들과 안다인의 관계를 밝힐 생각인가.
하긴, 호족 내에서는 이걸 숨기기 어려울 거다.
오히려 알려지는 게 안전할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저택에 거주하는 호랑이들에게 안다인을 소개할 예정인가 보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내가 가도 되는 걸까?
[황지호] 안다인에게도 네가 온다고 전해 뒀다. 그 말을 듣고 기뻐하더군. 꼭 오도록.
퇴로는 이미 막혀 있었다.
* * *
같은 시각, 안다인은 은광고에 있었다.
공부, 학생회 업무 때문이 아니라 황명 재단의 법무팀과 상담을 위해서였다.
안다인이 황명 그룹 본사 건물을 들락날락거리면 눈에 띄고, 법무팀 전원이 황명호 대저택에 출입 허가를 받은 게 아니었기에 학교에서 만나게 되었다.
법무팀은 이 과정에서 미성년자인 안다인이 혼자 일을 진행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보호자를 대동시킬 것을 권했다.
보호자 하면 법적으로 안다인의 양부모가 될 예정인 호족 부부가 있었으나, 아직 정식으로 입양 절차가 끝난 게 아니고 이들은 오랜 기간 속세를 떠나서 지냈기에 인간 사회에 관한 이해도가 낮았다.
그 결과, 임시 보호자 역은 안다인의 담임 교사인 김신록이 맡게 되었다.
“선생님, 오늘 동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다인은 자신과 동행한 김신록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김신록은 마음이 몹시 복잡했다.
처음 안다인이 그 호족 부부의 아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놀라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만약 그 자리에 혼자 있었다면 정말로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학생들이 주변에 있었기에 겨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사실 지금도 기절할 것 같았다.
“⋯⋯아니야. 담임이니까 당연하지.”
“담임과 학생일 뿐만이 아니라 같은 호족이니까 가족이기도 하죠.”
“⋯⋯그렇지.”
안다인은 잊을 만하면 이 사실을 상기시켰다.
김신록이 제자들에게 열심히 선을 긋고 있었는데, 이제 안다인은 자신은 가족이니 그 선을 치워 달라며 툭하면 이를 강조했다.
김신록이 임시 보호자 역을 맡자마자 안다인이 제일 먼저 이렇게 물을 정도였다.
―김신록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궁금해요.
김신록은 그 말에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미안함과 슬픔보다는 용제건을 향한 분노 때문이었다.
용제건이 1학년 1반 아이들, 특히 안다인을 상대로 실컷 약을 올렸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김신록의 기호 식품을 알려 줄 듯 말 듯 간을 보며 반 아이들 속을 긁었다.
김신록은 다음 신분으로 갈아탈 때를 고려해 개인 정보를 밝히는 걸 꺼려 했기 때문에 매우 곤란했다.
‘전에는 딱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고 답했는데⋯⋯.’
하지만 기대에 찬 안다인을 보니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김신록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리는 건 없지만, 곶감을 좋아해.
―답변 감사해요, 선생님.
김신록의 답변을 들은 안다인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웃었다.
주수혁이 봤다면 양발이 허공에 뜰 정도로 심하게 구를 법한 아름다운 미소였다.
김신록이 착잡한 심정으로 안다인과 함께 걷고 있을 때였다.
안다인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선생님의 귀한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해요.”
김신록이 괜찮다고 답하기 전, 안다인이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용제건 선생님이⋯⋯.”
용제건의 이름이 나오자 김신록은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말을 잊었다.
머릿속에서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숫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안다인이 말을 더 이으려고 했지만, 갑자기 부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안다인이 말을 멈추고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온다.’
김신록도 이를 감지하고 돌아봤다.
멀리서 누군가가 김신록과 안다인을 발견하고 곧게 전진하고 있었다.
둘 다 김신록의 제자였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김신록 선생님, 안녕하세요.”
성국언과 전무영이었다.
김신록은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았다.
‘은광고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지. 시간이 겹쳤구나.’
국회의원이 큰 사건이 발생한 현장을 방문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은광고는 성국언의 모교이니, 직접 찾아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성국언은 사람 좋게 웃으며 안다인에게 말을 걸었다.
“옆에 있는 학생은 안다인 양이군요. 김신록 선생님이 올해 담당하는 반의 학생인 걸로 아는데 맞습니까?”
“네, 김신록 선생님은 제 담임 선생님이세요.”
김신록이 답하기 전에 안다인이 얼른 답했다.
셋은 서로에게 유대감을 느꼈는지, 순식간에 김신록에 대한 화제로 꽃을 피웠다.
셋 다 김신록이 담임을 맡았던 반 출신이었기에 느끼는 유대감이었으나, 그 광경을 보는 김신록은 혼란스러웠다.
‘성국언 군은 지금의 내 신분과 연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성국언은 혼란스러워하는 김신록을 더 뒤흔들어 놨다.
“제가 은광고에 재학하던 시절, 담임이셨던 선생님이 고인이 되셨습니다.”
성국언은 ‘옛 담임’에 관해서는 거의 입에 담지 않았는데, 갑자기 김신록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성국언의 말에 김신록이 애써 외면하고 있던 죄책감이 무럭무럭 솟았다.
“선생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감사를 자주 표현하지 못한 걸 몹시 후회했습니다. 선생님이 다른 선택을 하시도록 돕지 못한 것도요.”
성국언은 15년 전 폭풍 같은 재학 시절을 보낸 학생회장이었다.
학교의 일만으로도 버거울 텐데 담임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성국언이 부디 후회하지 않았으면 했지만, 지금 김신록에게 그 말을 할 자격은 없었다.
김신록은 조의를 표현해야 할지, 계속 침묵해야 할지 분간이 안 갔다.
그런 김신록을 두고 성국언이 담담하게 할 말을 계속했다.
“용제건 선생님이 곧 승천한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선생님께서 저 같은 후회를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성국언의 말에 김신록의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숫자들이 떠올랐다.
용제건이 승천할지도 모르는 정월 초하루까지 남은 시간을 카운트다운하는 숫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