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21화 (721/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21)

92. 카운트다운 (2)

조의신과 염준열이 은광고 주변 약속 장소에서 만난 시점, 용제건은 붉은 사자 팀 빌딩을 나서고 있었다.

염준열의 경호 담당은 따로 있었으나 용제건은 굳이 마중 나갈 생각이었다.

조의신을 만날 겸, 방학 중이라 방심하고 있다가 자신을 보고 놀랄 학생들의 반응을 즐길 겸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어디 가냐고 묻는 촉룡의 말에 용제건은 자신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밝혔다.

―쯧쯔, 시간 아까운 줄 모르는구나.

촉룡은 혀를 차고 한마디 했으나 그 외에는 딱히 말을 더 얹지 않았다.

용제건은 싱글거리며 은광고 쪽으로 날아갔다.

은광고와 붉은 사자 팀 빌딩 중간 지점쯤을 지나쳤을 때였다.

신격이 상승한 후 넓어진 용제건의 넓은 시야 안에 붉은 레이스 손수건이 잡혔다.

‘웅녀의 메시지인가?’

곧바로 공중에 정지한 용제건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발동 중인 이능은 없는지 확인한 후 레이스 손수건 쪽으로 강하했다.

가까이에 가서 레이스 손수건을 취하니 웅녀의 이능파가 느껴졌다.

레이스 손수건에는 이 근방의 GPS 좌표가 새겨져 있었다.

좌표를 확인한 용제건이 홀로 황홀하게 웃었다.

‘거리가 조금 있다고 해도 은광고에서 꽤 가까운 곳이야. 불러낸 방법도 조금 거칠어. 급한 일인가?’

비탄의 웅녀는 용제건의 비행 루트를 가늠해 메시지를 남긴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방학 중이고, 오늘 외출도 충동적으로 결정한 사항이었다.

용제건이 아니라 다른 이가 손수건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만큼 급한 일이라 판단한 용제건은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이동하였다.

‘준열이 마중은 못 가겠구나. 어떻게 변명할까? 그냥 웃기만 할까.’

용제건은 누가 이유를 물으면 그냥 황홀하게 웃으면서 ‘왜? 궁금해? 알고 싶어?’라고 되묻기로 결심했다.

보통 용제건이 그렇게 말하면 모든 이들은 언제 질문을 던졌냐는 듯 말을 바꾸고 도망쳐 버렸으니까.

그 생각을 하니 용제건은 누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줄지 기대되기까지 했다.

“왔구나.”

GPS 좌표 위에 세워진 폐건물의 꼭대기 층, 비탄의 웅녀가 용제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웅녀는 용제건이 착용한 눈가리개를, 용제건은 웅녀가 입은 어두운색의 코트를 가만히 바라봤다.

‘눈가리개로도 가리기 힘들 만큼 용제건의 신격이 높아졌구나. 가까이에서 보니 잘 느껴져.’

‘붉은 옷을 입지 않았네. 적호 씨나 신록이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나를 찾지 않았을 텐데.’

두 진족은 서로의 차림새를 두고 속으로 평했다.

웅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웅녀는 스카프로 가라앉은 입가를 감추고 평정을 가장해 말했다.

“곧 여의보주가 하늘에 오르겠구나. 나와의 거래를 잊은 건 아니겠지?”

“물론, 잊지 않았어.”

용제건과 비탄의 웅녀는 먼 옛날 거래를 하나 했다.

용제건이 웅녀의 아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대신,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알려 줄 것.

그 거래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에 오르고 나서도 신록이에게 호의를 베풀 생각이야.”

“그 아이가 그 호의를 기꺼이 여길지 의문이구나.”

“가호는 거부해도 광림은 거부할 수 없잖아. 신의 호의는 거부하기 어렵지.”

목련의 화신 김유리가 수많은 상위 존재들과 강제로 광림으로 이어진 것처럼, 용제건은 김신록에게 일방적인 호의를 줄 예정이었다.

김신록이 가호를 거부하는 건 애석한 일이지만,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가호를 제안해 소식을 전해 들을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용제건은 김신록이 기꺼워하지 않을 호의를 베풀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비탄의 웅녀도 용제건의 승천 예정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어렴풋이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설명하는 것을 들으니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네가 상위 존재가 되면 내 쪽에서 거래를 완수하기 어려워지겠구나. 하늘에 오른 이에게 재미있는 일을 전하기 어려울 테니.”

“그러면 웅녀 씨, 내 가호 받을래?”

“내게 가호를 내린 상위 존재께서 그것을 좋게 보지 않을 것 같구나. 또한 내가 네 가호를 받는다면 그 아이가 분노하고 슬퍼할 테니 아니 된다.”

비탄의 웅녀가 거절할 줄 알았던 듯 용제건은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용제건은 웅녀가 몸에 붉은 옷감을 조금도 걸치지 않은 것을 다시금 확인한 후 물었다.

“좋은 날인데, 붉은 옷을 입지 그랬어. 적벽괴도가 웅녀 씨와의 거래를 완수해서 적호 씨도 무사한데.”

“눈이 많아져 붉은 옷을 입기 힘들어졌단다.”

“눈? 마족의 눈을 말하는 거야?”

용제건의 물음에 웅녀의 눈빛이 흐려졌다.

“잠들었던 진웅팔선이 깨어나고 있어. 웅족에게 있어 희소식이나 원인을 알 수 없기에 경계하는 중이야. 빠져나오는 것도 몹시 어려웠지.”

“⋯⋯그 곰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지 않았어?”

“그랬지. 하지만 눈꺼풀이 떨리고 몸에 온기가 돌아오고 있어. 이능파의 순환도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지. 몇 년이 될지, 며칠이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곧 눈을 뜰 거다.”

오랜 시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진웅팔선이 깨어난다는 말에 용제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용제건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진웅팔선 중 하나인 번민의 곰을 상대했다.

용제건은 광림, ‘여의보주 현현’으로 거대한 소원을 이룬 직후라 힘이 다한 상태에서 웅족들과 대치했다.

혼자라면 모를까, 옆에는 웅족들 앞에서 무력한 호족과 웅족의 후예 김신록이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웅족은 셋이야. 하나를 치웠더니 셋이 늘어난다고?’

용제건은 김신록이 얼마나 분해하고 고통스러워했는지 눈앞에서 똑똑히 봤다.

피를 토하는 용제건을 지지하는 손이 떨리는 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능을 사용해 저항하려다 실패하는 것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용제건은 조의신이 둔 수를 믿고 그 위험한 상황을 자처했으나, 김신록이 느끼고 있던 무력감과 공포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꼈다.

용제건은 하나뿐인 친우의 목숨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깨어나면 신록이부터 노릴 가능성이 있어. 웅족에게 있어서 신록이는 가장 쉬운 먹잇감이겠지.’

비탄의 웅녀가 웅족 측의 상황을 전하는 것을 마무리할 때쯤, 용제건은 다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용제건의 그 표정을 본 비탄의 웅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봤다.

용제건은 당장이라도 승천해서 김신록에게 힘을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 사실을 전하면 용제건이 승천의 결심을 굳힐 걸 알았으면서도 나는⋯⋯.’

아들의 안전과 슬픔을 저울에 재 본 후, 웅녀는 안전 쪽을 택했다.

먼 옛날 웅녀는 정인의 안전과 슬픔을 두고도 비슷한 선택을 했었다.

‘부디 이게 옳은 선택이기를.’

그 결과, 많은 것을 잃었으나 적호는 살아남았다.

웅녀는 이번에도 비슷한 선택을 한 것 같아 괴로워졌다.

*    *    *

황명호 대저택, 본채.

대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도착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 호랑이 하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올해 마지막 날에도 교복을 입은 황지호였다.

“도망치지 않고 잘 왔군.”

호랑이 가족 잔치를 사양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딱히 도망치려고 한 건 아닌데.

내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노친네는 처웃으면서 나를 인도했다.

“하하하!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군. 그래도 왔으니 됐다. 얼른 가자.”

최근에는 은호가 머무는 현대식 별채에 자주 들렀으나, 오늘은 바로 본채로 향했다.

가장 견고한 결계로 보호되는 본채는 소리나 기척이 새어 나갈 틈이 없는데, 어쩐지 활기차 보였다.

‘황지호가 오늘 같은 날 결계를 허술하게 할 리가 없는데 그냥 내 기분 탓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본채는 과연 평소보다 몇 배나 활기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 풍으로 꾸며져 있던 본채는 새해맞이 풍으로 바뀌어 있었다.

복주머니가 올라간 자개 호족반과 신령한 기운이 넘치는 족자들만 보면 벌써 새해를 맞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실 벽면에는 홀로그램으로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시간을 카운트다운하고 있었는데, 같이 숫자를 세고 제야의 종 타종식을 함께 볼 예정인 듯했다.

“의신이 형, 어서 오세요!”

“밖에 춥지 않았어요? 얼른 들어와서 쉬세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호의 후예들이 들뜬 목소리로 반겨 줬다.

아이들이 들뜬 이유는 안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눈에 들어왔다.

“어서 와.”

본채에 안다인이 있었다.

알고는 있었는데 보통 가족들이 함께 보내는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안다인이 호족의 본채에 있다는 게 뭔가 감동이 밀려왔다.

안다인에게 진짜 가족이 생겼고, 집이 생겼구나 하는 게 실감 났다.

“아빠와 엄마를 대신해서 마중 나왔어. 두 분은 저녁을 준비하는 중이야.”

안다인은 나와 황지호에게 인사한 후에 다시 부엌 쪽으로 향했다.

은호의 후예들은 안다인을 방해할 수 없어서 말을 못 걸고 있지만,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게 티가 났다.

“다인이 누나는 인간이지만 호족이라고 들었어요!”

“입학식에서 봤던 언니가 호족일 줄은 몰랐어요! 언니가 생겨서 기뻐요.”

곧 안다인의 후배가 될 은서호와 은이호는 입학식에서 멋진 모습을 보인 수석이 누나, 언니가 되었다는 사실이 기쁜 듯했다.

인간인 안다인을 호족과 그 후예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조금 걱정도 했는데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역시 플마고의 타이틀 히로인답게 안다인은 가족이란 사실이 받아들여지고 별문제 없이 환영받았다.

“다인이 누나는 신록이 형네 반 학생이라고 들었어요!”

‘신록이 형’이라는 말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은호의 후예들은 김신록을 형, 오빠라고 불렀었지.

뭔가 틀린 말은 아닌데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하하! 이제 너희는 은광고 학생이 될 예정이니, 공석에서는 김신록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안 그러냐, 김신록?”

“⋯⋯그, 렇죠.”

“저는 은광고 들어가려면 멀었으니까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그, 그렇죠.”

“신록이 오빠 또 존댓말 쓰신다.”

김신록은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어색하게 굴었다.

그 어색함이 싫은지 은호의 후예들은 한 점의 악의도 없이 김신록에게 친근감을 표현했다.

그사이에 낀 김신록은 어색함에 녹아 버릴 것처럼 굴었고, 아버지인 적호를 비롯해 모든 호랑이들은 그걸 흐뭇해하며 관전하고 있었다.

‘지금 김신록에게 그걸 제안하기 좋은 타이밍 같은데.’

김신록은 얼이 빠진 상태고, 이 자리에 호족들도 있으니 내가 생각하고 있던 걸 제안하는 게 좋겠다.

“김신록 선생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김신록은 화제가 전환되는 걸 기다렸던 것처럼 바로 답했다.

“호족들과 싸우는 연습을 해 주세요.”

“전투 훈련 말입니까? 백호 님과 연계해서 싸우는 연습은 몇 번 해 봤습니다만⋯⋯.”

호족의 후예에게 호족들과 싸우는 연습이라고 하면 보통 같은 편이 되어 훈련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호족을 상대로 싸우는 연습을 해 주셨으면 해요.”

“⋯⋯네?”

부탁하고 싶은 건 한 가지 더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는 김신록을 상대로 한마디 더 말했다.

“그리고 정월 초하루에 용궁에 갈 때, 같이 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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