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22화 (722/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22)

92. 카운트다운 (3)

내 부탁을 듣고도 김신록은 반응이 없었다.

호랑이들은 우선 김신록이 어떻게 반응할지 지켜볼 생각인 듯했다.

황지호가 나와 김신록을 번갈아 보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무언으로 대답을 독촉하는 것처럼 보였다.

호랑이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던 김신록이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은인인 조의신 군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크나 이건 제 의견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저는 후예입니다.”

“알아요. 그래서 훈련을 제안한 거예요.”

내가 확신에 차 말하자 김신록은 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에 반해 다른 호랑이들은 내 말에 흥미를 느꼈는지 표정이 밝아 보였다.

특히 황지호는 눈을 반짝이며 이 대화를 지켜보았다.

김신록은 주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호 님의 허락도 받아야 하고 백호 님이나 다른 호족분들이 대련을 해 주셔야⋯⋯.”

“하하하! 이 몸은 허락할 생각이다.”

“제 아들을 돕는 건 당연하죠.”

“돕겠다.”

김신록이 결정권을 호랑이들에게 미루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황지호를 시작으로 적호, 백호군까지 김신록의 등을 떠밀었다.

“훈련 계획부터 짜는 게 좋겠군. 당분간 김신록은 잔업하지 말고 바로 퇴근하도록. 아니지, 이참에 사용하지 않았던 휴가를 지금 쓰는 게 좋겠군.”

“좋은 생각이군요. 아들을 가르쳤던 백호라면 힘의 가감도 잘할 테니 먼저 상대하는 게 어떻습니까?”

“알았다.”

김신록이 잠시 머뭇거린 사이에 휴가와 훈련 스케줄이 잡혔다.

서로 수천 년 알고 지낸 호랑이들답게 팀플레이가 기가 막혔다.

“훈련 기간 동안 저택에 머무는 게 효율적이겠지. 김신록, 네 방은 저택에 있으니 교직원 사택에 돌아갈 필요는 없다. 적호의 옆방이다.”

“평소에 아들의 방을 관리해 두길 잘했군요.”

“네? 제 방이 저택에 있다니⋯⋯.”

물 흐르듯이 스케줄이 잡힌 데에 이어 김신록의 체류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노친네가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조의신이 제안한 일이니 물론, 그 자리에 동석해야겠지. 훈련 기간 동안 둘 다 저택에 머물러야겠군. 하하하!”

어쩌다가 나까지 붙잡히고 말았지만, 훈련 자리에 동석할 필요가 있었기에 여기서 발을 뺄 수 없었다.

김신록이 고민할 시간을 단축시키고 호랑이들 사이에서도 이야기를 빨리 정리하여 훈련 시간을 늘리기 위해 둔 수인데, 괜히 여기에서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은 그렇다 쳐도 용궁으로 가는 건, 호족의 결정만으로 정하기 어렵습니다⋯⋯.”

"용족은 조의신과 우리에게 빚이 있어 용새(龍璽)를 허락하기로 약조했다. 내가 원하는 호족은 언제든지 용궁에 출입할 수 있다.”

“하, 하지만 그건 한 명에게만 허락하기로 한 건데 그 귀한 것을 제게 쓰다니⋯⋯.”

“황호, 아들에게 용새를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김신록은 드디어 아버지가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희망에 찬 얼굴을 했다.

적호는 아들을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아들아, 네 친구에게 용궁 초대권 한 장 달라고 하면 두말없이 줄 거다. 용제건은 친구를 데려가겠다고 용왕신에게 초대권을 몇 장 받았다고 하는데, 그 총아에게 친구는 한 명뿐이지 않느냐."

김신록이 한 변명은 황지호와 적호의 말에 논파되었다.

“용궁으로 향할 이들의 후보 중에는 처음부터 김신록, 너도 있었다. 조의신의 권유로 빠르게 정해진 것뿐이다.”

호랑이들은 처음부터 김신록도 후보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용제건의 승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같이 보낼 수 있게 배려해 주려 한 걸까?

문제는 용궁에서 위험한 일이 발생할 예정이고, 웅족이 습격해 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웅족은 전력이 많이 깎인 상태라 용족의 영역까지 침범할 여력이 있을지 의문이지.’

호족들도 그 점을 고려해 김신록을 후보로 올려 두고도 고민하고 있었을 거다.

그러던 중에 내가 김신록에게 용궁행을 권하니 무슨 수가 있을 거라 생각해 바로 승낙한 듯하다.

설령 웅족이 온다 해도 내가 둔 수가 제대로 먹힌다면 괜찮을 거다.

그렇게 순식간에 김신록의 훈련과 용궁행이 정해졌다.

김신록은 갑작스럽게 결정된 사항을 두고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김신록을 위한 길이 될 테니까.

“호족의 후예도 호족과 싸울 수 있나요?”

“저희도 싸워 보고 싶어요!”

“저도요!”

대화가 마무리되자 눈만 굴리던 은호의 후예들이 끼어들었다.

아직 이 아이들은 어리지만 호족의 피를 이어서 그런지 호승심이 넘쳤다.

은서호와 은이호가 은광고 수석을 차지하겠다고 노력하던 것도 그렇고, 의욕에 찬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곧 해가 바뀐다. 너희는 광림 사용법부터 연습하도록.”

“광림 연습이랑 같이 하면 안 돼요?”

“안 된다. 최소 한 달 동안 우리의 감독하에 광림을 사용하도록.”

황지호는 딱 잘라 안 된다고 하면서 잔소리를 했다.

노친네는 후예들 어리광을 잘 받아 주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선을 그을 때는 확실히 긋나 보다.

잔소리 속에 섞인 설명을 들으니 납득이 갔다.

은서호와 은이호는 이능파 총량이 많은 편이라 광림을 잘못 사용하다가는 폭주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저녁 준비가 끝났어요.”

호랑이와 한참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안다인이 부르러 왔다.

아직도 호족 부부는 요리가 손에 익지 않은 건지, 안다인이 예정보다 식사 준비 시간이 걸려 미안하다고 사과의 말도 덧붙였다.

호랑이들이 괜찮다고 답할 때였다.

왕왕!

현관문 밖에서 천사의 음성이 들렸다.

천사가 본채에서 안 보이기에 산책 중인가 했는데, 이제 귀가했나 보다.

천사의 소리에 쫑알거리는 목소리가 섞였다.

“알았어! 밀지 마! 물지 마!”

산령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이제는 예전 같은 흐릿한 구석이 없어 그냥 평범한 사람이 내는 소리처럼 들릴 정도였다.

곧 현관문이 열리고 올무와 산령이 나타났다.

문 근처에 서 있다가 올무의 모습을 발견한 안다인이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안다인은 올무가 호족의 신수라고 소개받았을 때도 저렇게 겨울을 녹여 버릴 것처럼 웃었다.

“올무야, 어서 와. 올무 몫의 식사도 준비했어.”

왕!

안다인은 올무 옆에 있는 산령을 보고 물었다.

산령은 먹물빛의 기운을 감아 실체가 완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어린아이 같은 실루엣을 하고 있었다.

안다인은 산령과는 처음 마주치는 것 같았다.

올무를 쓰다듬어 주기 위해 몸을 숙인 탓에 안다인과 산령의 눈높이가 맞았다.

“옆에 있는 분은 호족이셔?”

끄응⋯⋯.

안다인이 올무에게 묻자 올무는 잠시 고민했다.

단순히 생각하면 아니라고 답해야 하지만, 일단 산령도 호족 무리에 섞여 있다.

일단은 인간인 안다인도 호족이라고 지칭하는 참이니 답하기 곤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 망설임에서 사려 깊은 천재 전사의 생각이 느껴져 감동했다.

“이 녀석은 천익산에 깃든 산령이다. 최근 힘을 빠르게 되찾아 실체가 분명해지는 참이지.”

“그렇구나⋯⋯. 저는 안다인이에요. 잘 부탁해요.”

“응, 잘 부탁해!”

안다인이 마음에 든 건지 산령은 몇 번이나 인사했다.

하지만 산령은 식사를 누가 준비한 건지 몰랐던 걸까, 눈치 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후예들이 만든 것보다는 맛있어. 그런데 황호 것보다는⋯⋯ 악!”

산령의 말이 끝나기 전에 적호가 급히 실오라기 수준의 가는 적뢰를 쏴서 저지했다.

모처럼 훈훈한 식사 자리가 어색해질 뻔했다.

황지호가 안다인에게 자리에 참석한 호족들과 후예들, 덤으로 나까지 ‘호족의 은인’이라며 소개한 후에 식사가 시작되었다.

‘안다인은 며칠간 여기에 머물렀으니 대충 얼굴과 이름은 알고 있겠지만, 호족의 수장이 자리를 만들어 정식으로 소개했다는 게 의미가 있겠지.’

사실 적호 부자와 호족 부부가 같은 자리에 있어도 될지 걱정은 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두 가족이 서로 살가운 대화를 나누지는 않아도 안다인을 사이에 두고 온화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산령이 투덜거릴 만큼 음식은 다소 싱겁긴 했지만,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은호도 이 자리에 있으면 좋았을 텐데.’

은호는 지금쯤 황지호의 분신 하나와 함께 새해맞이를 준비하고 있을 거다.

원래 천동하가 별채에 찾아가 함께 새해를 맞이할 계획이었는데, 천씨 집안에서 여는 가족 행사에서 빠질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자칫하다간 은호가 천은하로서 그 행사에 끌려갈 수도 있었기에 참석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안다인을 누나, 언니라고 부르는 후예들의 할아버지인 은호가 은광고 1학년 후배로 입학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하지?’

게다가 그 은호는 현재 천동하의 동생인 천은하라는 신분을 쓰고 있다.

안다인에게 어디에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 되긴 했으나, 자신이 호족이라는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였으니 은호의 복잡한 사정도 금방 이해해 주리라 믿어 보기로 했다.

“의신아, 물어볼 게 있어.”

식사를 마친 후, 안다인이 다과상 차림을 도와달라는 구실로 잠시 나를 불러내 물었다.

“의신이는 성국언 의원님과 친분이 있지?”

“응, 성시완 선배님을 통해 알게 됐어.”

나와 성국언 사이에 친분이 있다는 건 큰 비밀이 아니었다.

학교 주변에서 성국언과 식사를 한 적도 있고, 홍천 쪽에서 이계 공략을 하는 바람에 공략 기록에 나란히 이명이 뜬 적도 있고, 축제 때에도 대화를 나눴으니까.

“그분은 김신록 선생님이 후예라는 걸 알고 계시지? 그분의 비서인 전무영 선배님도.”

질문의 형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안다인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김신록 앞에서 두 사람과 마주쳤나 보구나.’

성국언과 전무영이 김신록의 정체를 눈치챈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걸 안다인 앞에서 드러냈다는 게 의외였다.

안다인이 김신록의 제자라서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던 걸까?

“용제건 선생님이 승천하면 후회하실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어.”

안다인도 김신록을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다과상이 넘치기 직전까지 곶감 찹쌀 유과를 쌓아 둔 것만 봐도 절절히 전해졌다.

나는 안다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괜찮을 거야.”

어떻게 하겠다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는데 안다인은 나를 보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안다인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김신록이 먹을 곶감 간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백호군은 벌써 곶감의 기운을 감지한 건지 말없이 그쪽으로 향하는 우리를 보고 있었다.

백호군 눈에 곶감 과자가 덜 들어오도록 많이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자리에 앉도록, 곧 해가 바뀔 거다.”

차를 마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그램의 숫자가 0에 가까워졌다.

그 밑에는 보신각 주변에 잔뜩 모인 사람들이 보였다.

어느덧 해가 바뀔 때까지 20초도 남지 않았다.

누가 같이 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은호의 후예들을 시작으로 너도나도 입을 모아 카운트다운을 했다.

“3, 2, 1⋯⋯.”

“0!”

숫자가 0이 되고, 서른세 번의 타종이 시작되었다.

새해를 맞이했다.

작년과 달리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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