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24화 (724/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24)

92. 카운트다운 (5)

호수공원 근처에 위치한 영원의 호수 팀 빌딩.

한강에 유빙이 떠다닐 만큼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으나 호수는 얼지 않았다.

호수의 표면이 얼어붙지 않도록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이능을 이용해 관리한 덕이었다.

잔잔한 겨울 호수의 정경이 가장 잘 보이는 창가에서 권제인이 권레나에게 레슨을 하고 있었다.

훈훈한 광경이었지만, 이를 지켜보는 영원의 호수 팀원들의 가슴은 미어질 것 같았다.

권레나의 바이올린 탓이었다.

바이올린 대신 친구를 택한 권레나의 선택을 두고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고, 그녀 앞에서 슬픔을 표하지 않았으나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도 은광고에서 지급한 바이올린을 사용하고 있군요⋯⋯.”

“나쁜 바이올린은 아니야. 하지만 레나의 이능파를 연주에 녹여 내지 못하고 있어.”

“그야 이능 악기가 아니라 보통 바이올린이니까요.”

“새 이능 바이올린은 아직 못 구했어?”

“소유자에게 거래를 제안했지만 아무도 팔려고 하지 않더군요. 게다가 레나 양이 제인이 바이올린은 안 받는다고 해서⋯⋯.”

유일한 장인, 마스터 크래프트맨의 사망 후 새 이능 바이올린이 유통되지 않았고, 그가 남긴 유작도 거래되지 않았다.

새로 이능 바이올린을 만들겠다고 시도하는 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능 악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장인의 기술과 플레이어의 소양 두 가지가 필요했다.

즉, 뛰어난 플레이어가 장인의 기술을 익혀야 하는 셈인데, 우수한 플레이어 중에선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장인이 되려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물론, 영원의 호수 측에서 유력한 새 장인 후보인 목우람에 관해서 파악하고 있으나, 영 시원치 않았다.

“마스터 크래프트맨의 제자 목우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에게 제작 의뢰를 넣는 건 어떻습니까?”

“은광고에서 공방을 마련해 줬다고 들었는데, 신작을 냈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어.”

“우람 군의 성장을 기다려야 하나⋯⋯.”

한없이 우울해지는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재러드 리가 나섰다.

“내일은 레나 양의 생일이야. 1학년 0반 아이들과 협력해 생일 파티 준비를 해야 해. 잊지 않았겠지?”

“그걸 잊을 리가 없잖아요.”

“물론이지! 레나네 반장하고 직접 통화했는데 애가 참 선하고 꼼꼼하고 친구도 잘 챙기고⋯⋯.”

권레나의 생일 이야기에 분위기가 밝아졌다.

한창 생일 계획에 관해 떠들고 있을 때, 간부 중 가장 젊은 플레이어가 말했다.

“그럼 건물 안을 청소해야겠네요.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은 게 몇 개 있으니까요.”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은 것’이라는 말에 간부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영원의 호수는 푸른 바이올리니스트 권제인을 필두로 한 우아한 예술계 플레이어 팀이라는 인상이 크지만, 최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프로 팀 중 하나였다.

상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에너미였으나 때에 따라선 에너미만도 못한 플레이어들을 처리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게 권레나를 학대한 재러드의 친척, 호적상 이레나의 친부모였고, 고등학생에 불과한 목우람을 암살하려고 한 세 기사의 소속 선임 기사들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영원의 호수 팀 빌딩에 구속된 상태였다.

“애들 교육에 좋지 못한 건 눈에 안 들어오게 잘 치워 둬야지.”

재러드 리가 노여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구속되어 있는 이들 전원 재러드 리와 연이 있던 인물들이었으나 그는 연민과 동정 등을 일절 느끼지 못했다.

권레나의 양부모에게는 적어도 그녀가 학대받은 기간 동안 고통을 주고자 했고, 선임 기사들에게는 목숨이 위태로워질 만큼 몰아붙여 정보를 얻어 낼 예정이었다.

“미스터 용의 친구가 자칭 기사들을 고문할 때 재미있는 도구를 사용했어. 지금 그들은 악몽을 헤매고 있을 거야.”

“그것들은 아직도 악몽 속이야? 그러면 더 깊은 곳에 치워 두기 편하겠네.”

용제건의 친구, 김신록이 사로잡은 선임 기사들을 고문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김신록은 인간을 상대로 써 보는 건 처음이라며 엷게 웃으며 악몽의 티끌을 사용했다.

어떤 질문에도 입을 열지 않고 완강히 버티던 선임 기사들은 악몽 앞에 정신이 거품처럼 터져 갔다.

김신록은 그들이 미치지 않도록 가감하며 조금씩 정보를 빼냈다.

그 결과 물그림자의 기사가 새로 얻었다는 성취에 관해 알아냈다.

더 숨기고 있는 사실도 조만간 토해 낼 것 같았다.

“0반 아이들을 노릴 겸, 선임 기사를 구출할 겸 자칭 기사 놈들이 습격해 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

팀 닥터의 질문에 재러드 리가 답했다.

“시든 장미를 시작으로 역병이 번지고 있으니까.”

*    *    *

권레나의 생일을 앞두고 반 아이들이 모였다.

일정상 파티를 열지 못하거나 황지호처럼 가족끼리 보내는 경우도 있어 0반 아이들의 생일 파티를 항상 여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은 특별했다.

권레나가 이능 바이올린을 희생한 건으로 아직도 죄책감에 젖어 있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김유리는 이런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다 같이 권레나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자고 제안했다.

방학 때 얼굴도 볼 겸, 생일 파티를 반 아이들이 준비하자는 게 그 요지였다.

‘권레나의 생일 선물을 준비했지만 이렇게 모여서 파티까지 할 생각은 못 했어. 김유리는 반 아이들을 정말 잘 챙기는구나.’

무려 김유리는 영원의 호수 측과 사전에 말을 맞춰 함께 생일 파티를 준비할 계획을 세웠다 한다.

우리 반의 능력자 반장이 없었다면 반 아이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지지 않았을까?

김유리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대놓고 말은 못 하지만, 부디 다음 학기에도 0반에 남아 반장을 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김유리의 주도로 우리 반 아이들은 방학 중에 다 같이 모여 생일 파티를 준비하게 되었다.

“MITRON에서 케이크 사고 싶은데⋯⋯ 시간이 될지 모르겠네.”

“주문 제작은 안 될 것 같네요.”

“어, 오늘 휴일이라는데? 내일도 쉬는 건 아니겠지?”

반 아이들과 모여 케이크를 선정할 때, MITRON이 언급됐다.

류장과 시델렌티움을 만나러 갈 구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핑계가 생겼다.

그래서 일단 제안해 봤다.

“파티시에 분께 직접 부탁해 볼게.”

“부반장하고 아는 사이였냐?”

“아, 저랑 한이한테 가끔 의신이 안부를 묻긴 하더라고요! 의신이는 발이 넓네요.”

“응, 반 아이들 안부를 물으면서 몇 번 덤으로 쿠키를 주셨어.”

MITRON 단골인 사월세음과 한이가 한마디씩 거들어 줬다.

황지호는 마치 수상한 것을 보는 눈으로 나를 봤지만, 무시하고 류장에게 디바이스 메시지를 보냈다.

크리스마스 때, 까마귀 가면을 쓰고 행동하며 마왕에게 이것저것 보여 준 게 많은데 케이크 정도는 만들어 주지 않을까?

류장은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류장] 고작 케이크 하나로 괜찮겠습니까?

[류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행히 류장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파티시에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고 전하니 반 아이들이 반색했다.

“여차하면 직접 만들려고 했는데, 영원의 호수 팀원 분들도 계시니까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 잘됐다!”

“내가 담당한 일을 마치고 같이 가는 게 어떻나?”

“혼자 갈 수 있는데.”

독고미로, 한이와 함께 파티장 장식을 맡은 황지호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으나 결과적으로 혼자 가게 됐다.

진정묵도 등교해 반 인원수가 늘었지만, 준비 기간이 짧은 탓에 할 일이 많아 나처럼 혼자 움직여야 하는 아이도 있었다.

‘류장과 이야기를 빨리 마치면 목우람을 도우러 갈까?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서둘러서 서문 앞 수제 빵집, MITRON으로 향했다.

오늘은 임시 휴일이었으나 류장이 말한 대로 문이 열려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의신 학생.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막 매장을 청소한 참이었는지 매대가 텅텅 비어 있었고, 평소 나는 달콤한 향 대신 소독약 냄새가 조금 났다.

연말, 연초에 계속 성황이었던 탓에 쉬지 못하다가 오늘 휴일을 잡아 대청소를 했던 걸까?

쉬는 날에 일을 하게 된 셈인데 미안하게 됐다.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제가 모시는 분도 조의신 학생과 새해 인사를 나누고 싶었으니까요.”

가게 정문을 잠근 류장이 안으로 안내했다.

긴 복도를 지나자 까마귀 가면을 쓴 마왕이 기다리고 있다.

새해 인사를 몹시 고대하고 있는 것 같아 바로 인사했더니 시델렌티움이 가면 틈으로 웃었다.

―너도 새해 복 많이 받거라. 연초부터 예의 바른 아이에게 인사받으니 기분이 좋구나.

소리는 내지 않은 채로, 입만 움직여 시델렌티움이 말을 걸었다.

침묵의 마왕답게 올해도 소리 없이 대화를 나눌 생각인 듯하다.

그런데 예의 바르다니⋯⋯ 예전에 시델렌티움이 말을 편히 하라 해서 반말을 썼는데도 저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약속을 잘 지켜 줘서 고맙구나. 덕분에 좋은 광경을 특등석에서 보았다. 내가 본 것을 알면 모든 마족들이 나를 부러워할 테지.

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단독 행동할 때 까마귀 가면을 쓰는 대신, 시델렌티움의 대리인인 류장이 움직여 권제인의 돌발 행동을 막게 했다.

시델렌티움의 인장이 새겨진 까마귀 가면은 그와 이어졌으니, 내가 가면을 쓰는 동안 했던 일은 시델렌티움도 알게 된다.

보는 것에 환장해서 ‘눈’을 만드는 악취미를 가진 마족들이 알면 부러워할 것 같긴 하다.

―최근 호랑이 굴에서 지낸다지?

그걸 어떻게 안 건가.

딱히 큰 비밀도 아니니까 알아내려면 알아낼 수 있긴 하겠다.

‘시델렌티움은 웅녀와 연이 있으니 경계해야겠지.’

웅녀는 침묵 맹세의 순은 동전 복제판을 만들었고, 시델렌티움은 ‘부(富)와 생명의 무게’의 존재에 관해 알고 있었다.

시델렌티움이 웅녀와 연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호족과 척을 지게 될 테니 은광고 코앞에서 지내는 입장에선 경계해야 할 거다.

―호족이 마중 오기 전에 이야기를 마치는 게 좋겠지. 결론부터 말하면, ‘부(富)와 생명의 무게’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었다.

“무엇을 알아냈어?”

―‘부(富)와 생명의 무게’가 무슨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 기억하나?

직접 써 본 적이 있으니 물론 기억하고 있다.

그 카드는 아이템 카드의 가치, 사용자가 소유한 부(富)를 대가로 인간의 가능성을 지워 버린다.

만약 보유한 부가 부족할 시 수명을 받아 간다.

내가 알고 있는 바를 간략하게 전하자 시델렌티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아이템이 실패작이라는 것도 기억하고 있겠지? 왜 그게 실패작인지 알고 있나?

그것도 물론 알고 있다.

진웅팔선은 천신과 신인의 존재 가능성을 지우기 위해 힘을 합쳤다.

제물을 대가로 천신과 신인의 존재 자체를 지우고자 시도했으나, 이들은 실패하여 미치거나 잠들었다.

비탄의 웅녀는 진웅팔선의 힘과 지혜, 연구의 흔적을 아이템화시켰다.

그게 ‘부(富)와 생명의 무게’다.

“진웅팔선의 의도와 달리, 그 실패작은 천신과 신인의 가능성을 지울 수 없어. 지울 수 있는 건 인간의 가능성뿐이니까.”

천신은 완전한 신이었고, 신인의 절반은 신이었다.

즉 부(富)와 생명의 무게만으로는 천신과 신인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실패작이라 불리는 거다.

―왜 부(富)와 생명의 무게, 그 천칭이 인간밖에 달 수 없는지 가설을 세웠지. X를 소멸시키면서 진웅팔선이 만든 천칭의 기능이 고장 난 게 아닐까? 진족이나 후예, 상위 존재처럼 수명에 묶이지 않은 존재감을 천칭에 올릴 수 없게 된 거지.

그럴싸한 가설이었지만, 걸리는 점이 많았다.

왜 갑자기 시델렌티움은 저런 소리를 하는 걸까.

“연구 중에 무슨 단서를 얻었어?”

―그 천칭의 기능이 회복되려 하고 있더군. 부(富)와 생명의 무게는 인간의 가능성 외에 다른 것도 지울 수 있게 될 거다.

시델렌티움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깨달았다.

만약 사라진 X가 존재했다면, 진웅팔선은 X를 지우는 대가를 지불했을 것이다.

그런데 진웅팔선이 지불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대가가 돌아왔다.

―내 생각대로라면 진웅팔선의 실패작이 본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진웅팔선도 제정신을 찾고 긴 잠에서 깨어날 거다. 그리고⋯⋯.

여전히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시델렌티움의 말이 무겁게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사라진 X도 돌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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