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27)
92. 카운트다운 (8)
황지호가 선물한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하면 결계술 스킬이 없는 권레나도 일시적으로 결계를 전개할 수 있다.
이런 타입의 이능 소모형 아이템 카드를 사용하면 플레이어가 보유한 스킬과 관계없이 적의 비장의 수를 막거나 약점을 노리는 이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언뜻 듣기에는 사기 아이템 카드처럼 보이지만, 이능을 담은 소모형 아이템 카드를 사용해 싸우는 플레이어는 많지 않았다.
‘아이템 카드 사용에 특화된 플레이어도 있긴 하지만, 희귀한 이능이 필요해.’
이 세계에 와서 만난 인물 중, 카드 활용 이능을 갖춘 건 홍규빈 한 명밖에 없었다.
이능 소모형 아이템 카드로 싸우는 건 보통 이능파 대비 비효율적이라 어지간한 플레이어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맹효돈을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불 관련 이능이 약점인 에너미를 상대하더라도 맹효돈 수준의 플레이어는 화염술이 봉인된 아이템 카드를 사용하느니 싸움 스킬로 공격하는 게 효율적이다.
특정 공격이 통하지 않는 에너미라면 모를까, 소모하는 이능파나 아이템 카드의 가치 등을 고려하면 카드에 의지하는 것보다 플레이어의 광림과 스킬을 활용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권레나의 지금 수준으로는 만약의 경우에 싸우는 것보다 저 결계 아이템 카드를 사용하는 게 나을 거야.’
마족의 사제와 마주쳤다고 가정했을 때, 권레나가 응전, 도주하는 것보다 결계를 전개해 버티고 구조를 요청하는 게 더 안전할 거다.
황지호가 모처럼 좋은 선물을 준비했는데, 희귀도가 높다는 이유로 권레나가 사양할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황지호가 연륜을 발휘해 저 선물을 잘 떠넘기길 바랄 뿐이었다.
권레나는 주저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선물을 받아들였다.
“고마워⋯⋯. 비슷한 상황이 또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거든.”
권레나가 카드를 받아 들며 웃자 머리가 아파졌다.
또 위기가 닥치면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선물을 받기로 결심한 듯하다.
저렇게 착한 아이가 어쩌다가 플마고에서 악역으로 등장하게 된 걸까?
‘플마고 기준으로 올해 권레나가 악역으로 등장하는데.’
권레나의 주변 환경과 처지는 크게 바뀌었으니, 플마고와 같은 전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권레나는 양부모 아래에 있는 대신 기숙사생이 되었고, 스승이자 진정한 가족인 권제인과 만났으니까.
‘권제인은 언제 가족 관계를 밝힐 생각일까. 세 기사의 맹세 건도 있으니 지금은 밝히기 어렵겠지.’
행여 권레나의 비밀이 새어 나가면 영원의 호수와 적대 중인 세 기사의 맹세의 타깃이 될 거다.
비밀을 퍼뜨리는 것만으로도 권제인의 멘탈을 뒤흔들 수 있고, 여차하면 인질로 잡기 위해 움직일 거다.
고작 고등학생인 권레나에게 그렇게까지 할까 싶긴 하지만, 자칭 기사 집단은 목우람을 상대로 암살을 시도한 파렴치한 집단이 아닌가.
“산 게 아니라 직접 만든 거라고? 은광고의 이사장 수준으로 결계술을 잘 다뤄야 할 텐데.”
“지호는 태호권하고 봉술만 잘하는 게 아닌가 봐요. 혹시 이사장님의 도움을 받은 걸까요?”
“하하하!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독고미로와 사월세음의 대화를 듣던 황지호가 처웃으며 코멘트했다.
황지호는 이사장이기도 하니까 그렇다고도 할 수 있긴 했다.
황지호가 잡다한 분야에 재능을 발휘하는 걸 보는 데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새로 합류한 아이들은 매우 황당해했다.
구슬비, 옹길동, 진정묵은 심각한 표정으로 황지호를 관찰하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쩌면 황지호의 정체를 의심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하하하! 자, 이 몸이 낙서를 해 주마. 이리 오거라.”
황지호가 수성 사인펜을 들고 아이들을 불러모으는 바람에 신입 세 명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벌칙 면제권을 가진 권레나를 제외한 오답자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황지호는 실컷 처웃으면서 공을 들여 낙서했다.
문구를 쓸 때도 있고 작게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한이 얼굴에 파란색 펜으로 그린 호랑이를 두고 민그린이 극찬했다.
‘잘 그리긴 했네.’
민그린이 대놓고 칭찬을 했는데도 송대석이 그냥 넘어갈 정도였다.
사월세음은 낙서당하기 직전에 ‘닭은 싫어요!’라고 발언했다.
그러자 황지호는 진짜로 닭을 그릴 생각이었는지 손을 멈추고 다시 생각했다.
그 결과 닭 대신 꿩을 그렸다.
“닭은 아니긴 한데⋯⋯ 닭보다 나은 것 같긴 한데⋯⋯.”
“하하하하!”
노친네가 처웃는 꼴과 반 아이들 얼굴에 그려진 낙서를 보니 새삼 열심히 생각한 보람이 느껴졌다.
낙서를 마친 황지호가 불쑥 말을 걸었다.
“조의신, 네가 틀렸다면 이 몸이 네게 어울리는 걸 그려 줬을 텐데 아쉽군.”
대체 뭘 그릴 생각이었을까?
체스 피스나 까마귀가 떠올랐지만, 황지호가 저번에 호랑이 인형 옷을 입히려 했던 게 생각났다.
어쨌든, 내가 맞혔으니 황지호가 내 얼굴에 호랑이 낙서를 할 일은 없을 거다.
답을 맞히길 잘했다.
다음 선물 퀴즈 출제자를 뽑기 위해 권레나가 추첨했다.
권레나가 고른 번호가 적힌 패널을 뒤집자 목우람의 이름이 나왔다.
“다음은 우람이 차례야. 준비됐어?”
사회자역을 맡은 김유리가 부르자 목우람은 우물쭈물하며 앞으로 나섰다.
목우람에 관해 아는 아이들, 특히 최근 행보에 관해 아는 아이들은 질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답을 적기 시작했다.
아마 이능 바이올린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아이들이 목우람에게 평소에 무엇을 하는지 묻자 그는 자신이 이능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다고 솔직하게 밝힌 적이 있었다.
‘이능 바이올린일 가능성이 크지만, 목우람은 아직 망설이는 것 같았어.’
반 아이들은 악기에 관련된 질문들을 던졌다.
그런데 목우람의 답은 어째 악기와 영 관련이 없어 보였다.
구슬비가 ‘직접 만든 거야?’라고 질문을 던지자 목우람이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이 선물은 제가 만든 게 아닙니다.”
“어?”
“네?”
목우람이 툭하면 공방에 틀어박혀 바이올린 제작에 몰두했다는 걸 알고 있던 아이들이 의문을 표했다.
특히 이능 바이올린 디자인에 협력한 민그린이 불만이 많아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준비한 선물은 이겁니다.”
목우람이 준비한 선물은 권레나가 좋아하는 간식들이었다.
예약을 하거나 줄을 서서 구매해야 하는 한정품도 여럿 섞여 있었다.
교내 장학 아르바이트 일당을 꽉 맞춘 예산으로 준비한 구성품들에는 정성이 가득했지만, 정말로 목우람이 주고 싶은 선물은 따로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언제 줄 생각이지?’
권레나는 목우람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석연치 않았다.
선물 증정이 끝나자 다 같이 뒷정리를 했다.
영원의 호수 팀원들은 맡기고 귀가해도 좋다고 했지만, 손이 많이 가는 부분은 돕고 가기로 했다.
수십 명이 놀고 먹은 자리를 정리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부반장, 이 보면대는 아래층에 있는 창고에 보관한다더군. 부디 옮겨 줄 수 있겠나?”
옹길동이 우아하게 손짓하며 특유의 과장된 어조로 부탁하자 손이 조금 오그라드는 걸 참고 보면대를 받아 들었다.
옹길동은 참 착하고 좋은 아이지만, 괴도 철학 따위를 신봉하게 되어 일상생활에서도 오글거림이 묻어나게 된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여기가 창고인가. 창고라기보다는 쇼룸 같다.’
악기 용품, 무대 장치를 보관하는 창고는 매우 널찍했고, 작은 소파도 배치되어 있었다.
아마 소파에 앉아 창고에 보관된 물품을 둘러보며 다음 무대 구성이나 악기 배치를 구상하라는 배려가 아닐까?
과연 예술가들이 모인 플레이어 팀은 창고도 남달랐다.
다양한 디자인과 색의 보면대 사이에 내가 들고 온 걸 정리했을 때다.
덜컥.
창고 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방금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기척을 죽이고 접근한 듯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악기 용품 사이에 몸을 숨긴 건지 보이지 않았다.
‘문 닫히는 소리는 일부러 낸 것 같아. 상대에게 적의는 없어. 영원의 호수 팀 빌딩에서 허튼짓을 하진 않겠지.’
그때, 정체불명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셋, 둘, 하나.”
“제로!”
파팡!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오로라색의 불꽃 사이로 옹길동, 구슬비가 등장했다.
언제 옷을 갈아입은 건지 두 사람은 괴상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니, 괴상하긴 하지만 그 차림새는 본 적이 있었다.
‘두 관종이 포모르 마족의 경매장에서 입었던 옷이다.’
옹길동은 보석과 은실로 장식된 백조 가면과 투우복을, 구슬비는 떡갈나무 가면에 망토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구슬비의 떡갈나무 가면과 망토가 매우 정교해지고, 오로라색 비즈가 더해졌다는 점이었다.
저 꼴을 보니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것 같았다.
“부반장, 네가 적벽괴도지?”
구슬비의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직접 ‘그 단어’가 습격해 오니 매우 마음이 복잡해졌다.
“같은 괴도로서 꼭 다시 보고 싶었다. 적벽괴도!”
아, 은호가 겨우 ‘그 단어’ 소리를 멈췄는데⋯⋯.
이젠 괴도한테서도 저 소리를 듣게 생겼다.
* * *
은광고 조경 구역, 은련관.
이능으로 구현한 별하늘의 서방칠수 천장 아래.
김신록이 영호(影虎)에 둘러싸여 항복을 선언하자, 백호가 겨누고 있던 백아를 내렸다.
“피하는 실력이 늘었군.”
“⋯⋯칭찬 감사합니다.”
그렇게 답하는 김신록은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다.
백호의 말대로 피하는 솜씨는 늘었지만 성과가 전혀 나고 있지 않았다.
조의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훈련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김신록은 호족을 상대로 싸우지 못했다.
‘도망치고 피하는 연습을 위한 훈련이 아닌데!’
김신록은 말없이 뒤에 서 있는 적호를 생각하니 더 초조해졌다.
백호와 적호가 자신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커졌다.
김신록이 이렇게 고전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호족의 후예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광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탓이 컸다.
‘위기 상황에 몰려도 광림을 쓸 수 없다니⋯⋯.’
김신록의 광림은 염준열의 ‘홍룡 소환’과 유사했다.
광림을 통해 자신의 힘을 구현화한 결정체를 범과 곰의 형태로 불러내는 것인데, 김신록은 오래도록 광림을 사용하지 않았다.
호족의 후예로 태어난 것에 부채감을 지니고, 웅족의 후예로 태어난 것을 끔찍이 여기니 범과 곰을 제대로 불러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광림을 사용할 수 없나?”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기 위해 묻지 않았다.”
백호가 그 말을 마치자 손에 들고 있던 백아와 가만히 김신록을 지켜보던 영호가 사라졌다.
백아와 영호의 소환을 해제한 백호가 말했다.
“나와 훈련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 아닙니다! 백호 님이 도움이 되지 않다니, 그런⋯⋯.”
김신록이 당황해서 말을 머뭇거리자 적호가 입을 열었다.
“백호, 제 아들과 훈련하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지금은.”
백호가 서늘한 눈으로 김신록을 응시했다.
김신록은 광림을 쓰려고 계속 시도했었다.
하지만 눈앞에 백호가 있든 없든 범과 곰의 터럭 하나 불러내지 못했다.
억지로 광림을 사용하려고 시도한 탓에 이능파와 체력, 정신력 소모가 상당했다.
김신록의 상태를 살피던 백호가 말했다.
“비슷한 광림을 쓰는 자의 도움을 청하는 게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