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28)
92. 카운트다운 (9)
작년 12월 마지막 주, 종업식을 하던 날.
구슬비와 옹길동은 ‘가면 뒤의 정체를 훔치러 가겠다.’라고 예고장을 보냈다.
그들은 혹시 적벽괴도가 알아채지 못할까 봐 까마귀 가면까지 그려 뒀다.
화려한 예고장은 관심을 받기 위한 것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바로 적벽괴도를 향한 선전포고였다.
“이렇게 멋있고 화려하게 예고를 했으니 우리를 막으러 오겠지?”
“훗, 괴도의 화려한 대결이 펼쳐지겠군.”
괴도들은 적벽괴도의 방해를 상정하고 작전을 짜 실행했다.
그러나 적벽괴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의신이 이들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순탄하게 작전이 진행되었으나 괴도들은 허탈함과 섭섭함을 느꼈다.
“적벽괴도가 방해하지 않는군. 어째서지?”
“우리가 알아내길 기다리고 있었나 봐.”
“그렇군! 우리를 만나러 오지 않았던 건 괴도스럽게 직접 정체를 알아내길 바랐기 때문이었나! 이걸 이리도 늦게 알아채다니!”
관종들은 정신 승리를 시전했으나 그렇다기에는 걸리는 점이 있었다.
바로 진정묵의 존재였다.
“⋯⋯왜 적벽괴도는 우리는 내버려 두고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을 찾아간 거지?”
“괴도짓을 안 해서 그런 거 아냐? 진정묵은 검객 콘셉트잖아.”
“그렇군. 진정묵⋯⋯ 검객⋯⋯ 크윽, 들으면 들을수록 검객답고 멋진 이름이로군.”
옹길동은 괴도 논리에 납득하면서도 분해했다.
늘 옹길동이라는 본명 대신 ‘루이스 페레나’라고 소개하는 그는 자신의 이름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괴도스럽지 않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구슬비의 생각은 달랐다.
‘옹길동도 의적 같은 이름이라 충분히 괴도다운데.’
최근 구슬비는 옹길동, 루이스 페레나 양쪽 이름 모두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멋져서 그런 건지 몰라도 이름의 주인까지 멋지게 보였다.
구슬비의 속도 모르고 옹길동은 쾌활하게 말했다.
“어쨌든 원하는 건 얻었다! 이제 적벽괴도의 정체를 밝혀 주마!”
관종들은 무사히 은광고의 보안을 뚫고 진정묵의 교내 이동 경로를 담은 기록을 확보했다.
이는 황호와 조의신의 묵인하에 얻은 결과였으나 괴도들은 그것도 모른 체 자신들의 성과에 만족하고 있었다.
“적벽괴도의 단서는 기억나나?”
“물론이지!”
첫째, 적벽괴도는 은광고의 교직원이거나 학생일 것이다.
둘째, 적벽괴도는 크리스마스 사건 때 큰 실적을 올렸을 것이다.
셋째, 적벽괴도는 진정묵과 접촉했을 것이다.
넷째, 적벽괴도는 이미 자신들과 만난 누군가일 것이다.
관종들이 지혜와 직감을 끌어모은 단서는 이러했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자를 찾기 위해 이들은 우선 진정묵의 교내 기록을 확보했다.
“시합 전에 운기행공 어쩌고를 한다고 사람을 별로 안 만났네. 금방 추려 낼 수 있겠다.”
진정묵은 절흑풍림의 무림인 외에 접촉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기록 기기를 살펴본 결과, 진정묵과 접촉한 유력한 후보 셋을 추려 냈다.
첫 번째 후보는 1학년 0반의 담임 함근형.
두 번째 후보는 은광고 이사장 황명호.
세 번째 후보는 1학년 0반의 부반장 조의신이었다.
“이사장은 아닐 것 같군.”
“왜?”
“그가 보인 태만함은 괴도의 철학에 어긋나니까!”
“괴도는 둘째치고 이사장은 크리스마스이브 사건 터질 때 해외에 나갔다고 하더라. 아닐 것 같긴 해.”
“과연, 적벽괴도답지 않다. 그러면 둘 중 한 명이겠군!”
황호는 사건 당시 은광고에 있었으나 대외적으로 이사장은 부재중이었기에 이들은 알지 못했다.
옹길동과 구슬비는 이사장은 아닐 것이라며 후보에서 제외했다.
방학이 시작되었으나 함근형과 조의신을 두고 조사를 게시했다.
그런데 조의신에 관해 조사하던 중, 이미 후보에서 제외한 이가 이들에게 접촉해 왔다.
“훌륭한 솜씨였네. 이번은 넘어가 주지. 나는 학생들의 장난질에 관대하니 걱정 말게.”
“크윽!”
황명호 이사장의 모습을 한 황호가 그들이 한 짓을 두고 은근히 주의를 줬다.
주의를 주긴 했지만 황호의 말대로 관대한 처우였다.
이사장이 장난질에 관대하지 않았다면 0반 학생들 대다수의 생활기록부에 빨간 줄이 그어지거나 퇴학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황호는 동시에 경고의 말을 덧붙였다.
“조의신은 휴식이 필요하니 과한 행동은 삼가는 게 어떤가?”
황호의 말은 조의신을 번거롭게 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하지만 관종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과하지 않게 조사를 시행했다.
[김유리] 작년 10월 31일? 핼러윈 말하는 거구나.
[김유리] 그때 우리 반은 생일 파티 준비했어. 11월 1일이 의신이 생일이었거든!
[김유리] 다음엔 슬비랑 루이스도 같이 생파하자! ^▽^♡
포모르 마족의 경매가 벌어지던 핼러윈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던 관종들은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1학년 0반은 깜짝 생일 파티를 위해 핼러윈 동안 함께 있었다는 것.
반 아이들은 11월 1일이 지나기 전에 조의신을 마중 나갔다는 것.
함근형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
조의신을 마중하러 간 곳은 바로 영국이라는 것이 그러했다.
모든 정보를 취합하니 누가 적벽괴도인지 답이 나왔다.
“그날 영국에 있던 게 부반장⋯⋯.”
“조의신이 적벽괴도야⋯⋯?”
관종들은 조의신에 관해 철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무명의 초신성이라는 이명을 얻었던 사건부터 시작해 조의신의 인망, 능력, 몸가짐 등등을 살폈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한 결과 옹길동은 조의신이 적벽괴도에 걸맞다고 판단했고, 구슬비는 좋은 부반장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만나러 가자!”
“찾아내서 놀래켜 주자!”
정체를 알아내니 만나러 오지 않았다는 서운함보다는 기쁨이 앞섰다.
하지만 방학이 시작된 이후 조의신은 황명호 대저택에 머물고 있었고, 그곳의 보안을 뚫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냥 디바이스로 연락하면 안 돼?”
“그건 괴도답지 않다. 로망이 없고 눈에 띄지도 않고 기억에 남지도 않을 것이다!”
옹길동의 발언에 구슬비는 큰 충격을 받았다.
괴도 어쩌고는 둘째치고 눈에 안 띄고 잊히는 건 최악이었다.
개학까지 기다려야 하나 고민이 깊어지던 중, 이들에게 기회가 왔다.
바로 권레나의 생일 파티였다.
* * *
관종들이 훔쳐간 기록 기기에는 내가 진정묵을 만나러 간 모습이 남아 있고, 내가 영국에 있었다는 건 쉽게 알아낼 수 있다.
반 아이들이 다 같이 축하하러 와 줬으니, 아무에게나 물어봐도 바로 내 행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단서를 모으면 금방 답을 알아낼 거라고 생각했다.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괴도들이 ‘그 단어’를 연호하고 있으니 착잡했다.
“놀라서 말이 안 나오나 보구나, 적벽괴도!”
“아무리 적벽괴도라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나 봐. 아니면 경매 때보다 한층 더 화려해진 우리의 모습에 놀랐어?”
“⋯⋯그래.”
겨우 대답을 하니 관종들이 흡족해했다.
그사이에도 ‘그 단어’ 연호를 해 대서 마음이 괴로워졌다.
‘정신 차려야 해! 내 정체를 흘린 건 저 두 관종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걸 막기 위해서잖아.’
눈앞에서 머리를 어지럽히는 단어를 잔뜩 써 대는 저 관종들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
저 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정보를 공유할 만큼 가까워져야 한다.
나는 표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얼굴 근육을 관리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너무 늦게 찾아내서 알아내지 못할 줄 알았어.”
“크윽, 우리는 늦고 만 건가!”
“어쩔 수 없잖아. 다른 애들 등교시키느라 바빴어.”
옹길동과 구슬비는 그렇게 말하긴 했으나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괴도 동지가 늘어난 게 그렇게 기쁜 걸까?
“다음에 만나면 감사 인사 하기로 했잖아. 고마워.”
“그때 적벽괴도와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큰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감사한다.”
“등교 권해 준 것도 고마워. 은광고는 등교하기에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계속 안 다녔으면 아까웠을 것 같기도 하고.”
‘그 단어’가 섞이니 그냥 감사 인사보다 듣기 힘들었다.
두 사람이 무사하고 등교를 결심한 건 좋은 일이지만, 말이 길어지지 않도록 적당히 끊었다.
그러자 옹길동은 ‘겸손도 괴도의 덕목이지!’라는 헛소리로 응해 말을 돌렸다.
“진정묵이 등교했으니까 너희도 등교할 거야?”
“아직 등교하지 않은 이들이 둘이나 남아 있지 않은가. 한 번 하기로 한 일은 끝까지 완수하는 게 괴도다.”
“응, 이제 두 명 남았어. 내일 출국할 예정이야.”
진정묵은 개학하면 등교할 생각인 것 같던데, 관종들은 남은 두 명을 등교시킬 때까지 포기할 마음이 없나 보다.
그런데 등교 거부자를 잡으러 출국한다는 건 둘 다 외국에 있는 걸까?
“두 명 중 한 명은 한국에 있어. 그런데 걔 등교시키는 건 좀 어려울 것 같아.”
“그렇지. 괴도가 인정한 난제라고 할 수 있지.”
“나도 도울까?”
해외로 함께 나가는 건 어렵더라도 한국에 있는 아이를 등교시키는 거라면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취지로 말을 꺼냈는데 관종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그 한 명은 적벽괴도의 도움을 받기 어려울 것 같군.”
“⋯⋯응. 적벽괴도는 오히려 방해하려 들지도 몰라.”
“⋯⋯이사장이 너는 휴식이 필요하니 과한 행동을 삼가라는 경고도 했고.”
이사장이라고?
황지호가 두 사람한테 뭐라고 했나 보다.
은광고 보안을 뚫었으니 뭐라 안 하는 게 이상하긴 한데, 왜 갑자기 황지호가 나오는 걸까.
방해가 된다는 건 무슨 뜻일까.
내가 저들이 차지할 관심을 빼앗을까 봐 걱정하는 걸까?
뭔가 안 맞는 것 같긴 한데 관종들의 사고 회로를 따라가기 어렵고, 무슨 말만 하면 ‘그 단어’를 써 대니 깊게 추궁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그럼 해외에 있다는 애는 어떻게 등교를 권할 생각이야?”
“제법 어려운 문제지만, 생각은 해 뒀다.”
“진정묵을 등교시키는 게 쉬워 보일 정도였으니까.”
마족을 쫓아다니는 절흑풍림의 수제자를 등교시키는 쪽이 쉬워 보일 정도라고?
대체 해외에 있는 우리 반 애는 뭘 하고 다니는 건가.
옹길동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해외에 있는 등교 거부자는 악몽 인섬니움의 흔적을 찾고 있다고 한다. 세계에 흩어진 ‘악몽의 티끌’을 모으고 있다 하더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악몽이 언급되었다.
악몽은 한반도에서 유력한 진족들조차 꺼려 하는 존재였다.
그 등교 거부자는 왜 그렇게 위험한 것을 찾아 헤매고, 모으는 것인가.
12지 동맹 회담에서 악몽이 언급될 때마다 긴장하던 수장들의 모습과 김신록이 악몽의 티끌을 이용해 웅족을 고문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옹길동에 이어 구슬비가 말했다.
“꿈 하면 멀린 스승님이 잘 아셔서 도움을 받을 생각이야. 위험하다고 말리셨는데 겨우 설득에 성공했어. 꿈에 관한 정보나 우리의 도움을 대가로 등교시키려고 해.”
멀린은 몽마(夢魔)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후예이니 꿈에 관해 잘 알 거다.
어떤 정보를 대가로 걸고, 교섭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내버려 두면 해외에서 악몽의 흔적과 티끌을 찾아 위험한 짓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애를 통해서 악몽에 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접촉하는 게 좋겠어.’
여기에선 내가 가진 어느 정보를 바탕으로 간단한 수를 두기로 했다.
“그 아이를 한반도에 불러낼 방법이 있어.”
나는 두 관종에게 전언을 부탁했다.
“그 애를 만나면 전해 줘. 양족의 수장이 말하길, 악몽은 한반도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