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33)
93. 손님 (5)
황지호 일행이 문 너머로 사라진 후, 현무가 말을 걸었다.
현무는 다정한 목소리로 사소한 내용을 물었다.
밥은 잘 챙겨 먹는지, 학교는 즐거운지 등등의 흔한 질문이었다.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 없지만, 오랜만에 보는 친척 어른이 아이의 안부를 확인한다면 저런 태도를 보이지 않을까?
“그래,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있구나. 지금의 황호라면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겠지. 백호, 어떻게 생각해?”
“같은 생각이다.”
대화를 이끄는 역은 현무가 맡았다.
여전히 백호는 말수가 많지는 않았으나 현무가 질문하면 꼬박꼬박 답해 주었다.
“숨은 잘 쉬는 것 같고…… 잠은 잘 자고 있니?”
고등학생인 아이가 아니라 유치원생이나 그 이하인 아이에게 할 법한 질문이었다.
기도가 좁은 아이들은 호흡이 어렵거나 잠을 잘 못 잔다는데 그런 걸 걱정하는 걸까?
잘 쉬고 잘 자고 있다고 답하기 전에 백호군이 말했다.
“걱정이 많군.”
“백호만큼은 아닐걸?”
둘은 정말 친해 보였다.
딱 한 번 본 나보다는 백호군과 회포를 푸는 게 낫지 않나?
현무의 따뜻한 말에 감사하면서도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미안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현무의 말대로라면 백호군이 걱정이 많다는 건데…….’
백호군은 현무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근심이 많은데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니.
주변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현무는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걸 여러 질문을 통해 확인한 후에야 현무가 안심했다.
“내가 말이 많았구나. 이제 네가 궁금해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묻고 싶은 게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어쨌든, 기회가 왔으니 바로 묻기로 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두 가지였다.
“현무는 지혜와 예지의 사방신이라고 들었어요. 예언에 관해서도 잘 아시나요?”
“그렇다.”
“저번에 뵈었을 때, 제가 새벽을 부를 거라고 하셨죠.”
현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내 첫 번째 질문은 예의 그 새벽 별이 나를 가리키는가에 관한 여부였다.
“제 주변에 새벽 별에 관한 예언을 받은 아이가 있어요. 그 새벽 별은 저를 가리키는 건가요?”
“그래, 뛰어난 예언가들은 네가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별을 관찰하는 몽마의 후예도, 은빛의 이름 없는 영웅도 너를 봤을 거다. 몽마의 후예는 별 외에도 꿈을 관찰하느라 바빴겠지만…….”
별을 관찰하는 몽마의 후예는 멀린.
은빛의 이름 없는 영웅은 은호의 딸인 은빛 영웅을 가리키는 걸 거다.
“천익산을 떠돌던 어리고 미숙한 예언가도 좀 더 일찍 태어났다면 네 존재를 봤겠지.”
천익산을 떠도는 예언가라면 우기환을 가리키는 걸 거다.
그 선배놈이 멀린, 은빛 영웅, 현무가 본 예언을 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예언 속에 등장하는 새벽 별이 나를 가리킨다는 사실보다 우기환이 엄청난 예언가였다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
‘하긴 우기환은 초상우주의 존재도 알아챌 정도의 예언가니까.’
어쨌든, 현무의 말에 의하면 새벽 별에 관한 예언은 우기환의 탄생 전에 내려왔다.
이 세계와 내가 있던 세계 사이의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보다 늦게 플마고를 클리어한 ‘계’새끼가 일찍 이 세계에서 움직였으니까.
그 차이는 내 쪽이 차원 동기화와 전이가 오래 걸렸기에 발생했을 거다.
내 입장에선 고작 수십 초 정도로 느껴진 시간이 사실 1년 넘게 벌어졌다는 건 머리로 이해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 새벽 별이라는 건 내가 아니라 초상우주가 선택할 누군가를 가리킨 게 아닐까. 나 말고도 플마고를 제대로 플레이한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가 있었다면 그 사람이 새벽 별이 됐겠지.’
유감스럽게도 플마고는 개망겜이라 제대로 플레이하는 사람이 나 정도밖에 없던 모양이다.
이 세계에 온 은호와 ‘계’새끼는 적합체가 아니라 적합체 후보로 이 세계에 온 거라 새벽 별이 되지 못한 게 아닐까?
내 이름에 새벽을 의미하는 글자인 ‘새벽 신(晨)’이 들어가 있긴 한데, 그렇게 따지면 은호가 이전 세계에서 쓰던 이름도 마찬가지다.
천성헌의 이름을 풀어 쓰면 하늘 천(天), 별 성(星), 드릴 헌(獻)이다.
천성헌은 하늘과 별을 뜻하는 한자가 포함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저 예언이 정말 나를 가리키는 건지, 그저 내가 있던 세계에서 누군가가 올 것을 가리키는 건지 구분이 안 가.’
적호의 리플레이 속에선 플마고의 안다인이 예언에 관해 들었다는 내용이 이 있었다.
즉, 플마고는 예언은 있었으나 이 세계에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을 때의 상황을 상정한 시뮬레이션이다.
예언이 100% 실현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플마고도 이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인 셈이다.
나는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예언가가 작년부터 예언의 힘을 잃었다고 말했어요. 이 세계에서는 예언이 사라진 건가요?”
아피스의 화신은 예언의 힘을 잃었다고 했다.
우기환은 재작년의 입학 실기 시험 이후부터 예언을 하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마침 눈앞에 예언가가 있으니 현무에게도 확인해 보면 확실해질 거다.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느냐.”
현무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는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예언은 새벽 별이 등장한 이후로 무의미해졌단다. 그러니 예언의 힘이 사라진 거지.”
“예언이 무의미해졌다고요?”
“네가 미래를 바꿀 테니까.”
현무는 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설마 내게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라는 거창한 칭호가 붙어 있는 걸 아는 걸까?
우기환이 초상우주의 존재를 알아챘으니 현무는 그 이상의 것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너는 많은 걸 바꾸었단다.”
현무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밝힐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없는 건지 예언에 관해서는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현무에게 하려던 두 가지 질문에 답변은 얻었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더 늘어난 기분이 들었다.
“곧 돌아오겠구나.”
현무가 그 말을 하며 황지호 일행이 사라졌던 문을 보았다.
문을 자세히 보니 희미하게 이능파가 일렁이는 게 저 너머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저쪽은 시간의 흐름이 다를 테니 긴 시간을 보내고 왔겠지.’
현무가 말한 대로 황지호 일행이 돌아왔다.
호랑이들은 들어가기 전과 후의 차이가 거의 없었지만 리웨이는 달랐다.
리웨이는 지쳤지만 후련해하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이 부어 있는 게 조금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리웨이는 호족의 나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뿐인지, 기억에 담아 둘 정도로 인상 깊은 일이 아닌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전자일 가능성도 있지만 후자 쪽일 것 같았다.
호족이 옆에 붙어 있어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리웨이를 고통스럽게 하려면, 그의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자세하게 말하는 게 효과적일 테니까.
은광고에서 학살을 하려 했던 일당의 주역이 자신에게 거역한 인간 하나를 죽이는 걸 오래 마음에 담아 둘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발견되었을 때의 모습을 참고하였습니다. 제가 추측한 대로 그자를 다루었습니다.”
리웨이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데,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부가적으로 설명을 더 하자 이해가 갔다.
리웨이는 아버지가 당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고문을 하나씩 돌려준 것이다.
추측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추측되는 모든 후보를 시행해 보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불로 지져진 건지, 번개로 지져진 건지 구분이 가지 않는 상처는 불과 번개로 동시에 지졌다고 한다.
“그자의 몸이 단단해서 생각대로 움직이기 어려웠습니다. 고문 기술자께서 조언해 주시지 않았으면 더 오래 걸렸을 겁니다.”
“솜씨가 훌륭하여 조언할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많이 도움받았습니다.”
김신록도 도왔나 보다.
진족을 여럿 고문해 봤으니 김신록이 리웨이의 요망대로 해 주는 건 일도 아니었을 거다.
리웨이는 아버지가 발견되었을 때의 모습대로 복수했다고 한다.
‘새로운 정보를 얻지 못했나 보네. 안 가길 잘했다.’
그 장면을 직접 봤으면 저녁 식사를 즐겁게 하지 못할 것 같다.
황지호가 만드는 음식은 뭐든 맛있겠지만.
헤어지기 전, 리웨이는 황지호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호족의 수장님이 입고 있던 옷은 은광고의 교복이었죠. 다음에 뵐 때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리웨이를 다시 볼 기회가 있는 걸까?
리웨이와 현무는 한국에서 잠시 관광을 즐긴 후 중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하긴 했는데, 그가 남긴 말을 생각하면 마치 은광고 관련으로 엮일 일이 더 있는 것처럼 들렸다.
비서에게 둘을 호텔까지 배웅할 것을 지시한 후, 우리는 호랑이 저택으로 향했다.
황지호는 몹시 기분 좋게 말했다.
“올해 졸업하면 우리 쪽에 취직시키거나 황명 재단이 뒤에 있는 대학교의 진학을 추천할 생각이다.”
“리웨이를?”
“그래. 아무리 좋은 수라도 필요할 때 움직일 수 없다면 소용없지 않겠느냐. 가까이에 둘 생각이다.”
리웨이의 장래 희망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호족의 수장이 저렇게 말하고 있으니 무슨 길을 택하든 탄탄대로일 거다.
진로가 한반도 쪽으로 한정되긴 하겠지만.
* * *
1월 중순.
조경 구역의 은련관.
용궁행을 앞두고 일정 조정과 기타 준비로 바쁜 시기, 귀한 손님이 호족을 찾았다.
바로 염준열이다.
“안녕하세요, 염준열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염준열에게 와 달라고 부탁한 건 이쪽인데, 오히려 초대에 감사하며 선물과 함께 등장했다.
호족의 수장이 떡보라는 게 유명한 걸까, 염준열이 들고 온 선물 중에는 달토끼떡 종합 선물 세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쁘실 텐데 불러서 죄송해요.”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기뻐. 그리고 용족과 호족은 동맹 관계잖아? 도움이 필요하면 당연히 와야지.”
용족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 거다.
용족의 경지옥엽 후예를 오라 가라 하는 걸 좋게 여기지 않았을 테니까.
김신록이 용족의 영역에 출장을 간 적이 없었다면 부르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염준열이 들고 온 선물 세트엔 용제건이 조언을 한 건지 곶감 찹쌀떡도 들어가 있었다.
‘용제건이 올 줄 알았는데.’
지금 이 자리에는 용제건이 없었다.
대신 용제건 못지않은 거물이 경호로 따라왔다.
바로 용족의 수장, 청룡이었다.
“현무는 만났나?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청룡은 황지호와 인사를 마친 후, 바로 백호군에게 말을 걸었다.
후예를 향한 사랑이 압도적으로 커 보이지만, 청룡에게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긴 하나 보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가운데, 혼자 겉도는 이가 있었다.
바로 김신록이었다.
‘훈련을 앞두고 긴장한 걸까. 아니면 아버지가 없어서? 아니, 적호가 있으면 더 긴장하겠지.’
적호는 오늘 임무로 인해 부재중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호족 측의 인물은 황지호, 백호군, 김신록 셋이었다.
“김신록 선생님과 광림을 사용하여 대련해 달라고 하셨죠. 다른 진족의 후예와 겨루어 볼 일이 드물어서 기대돼요.”
“……기대에 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편하게 대해 주세요. 호족의 손님이기 전에 은광고의 학생이니까요.”
염준열은 붙임성 있게 말을 걸었지만, 김신록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대련을 앞두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황지호와 백호군은 김신록을 달래려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광림을 다루는 건 김신록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 중 하나고, 이것만큼은 저 둘이 도움을 주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황지호는 대련 시작 전,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는 호족의 수장과 용족의 수장이 있다. 만일의 경우라는 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양보 없이 싸우거라.”
“물론이다. 내가 있는데 우리 준열이가 다칠 리가.”
황지호가 염준열과 김신록을 향해 선언했다.
“시작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