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35)
93. 손님 (7)
염준열 외에도 홍룡을 다루는 자.
용족은 그 존재에 관해 알고 있다.
환몽 경매에서 염준열을 사칭해 깽판을 쳤으니 모를 리가 없다.
바로 ‘그 단어’의 존재다.
“자네가 홍룡을 부른다고……?”
짐작이 가는 바가 있을 텐데도 청룡은 반신반의했다.
청룡이 생각하는 나, 조의신의 존재와 지금 이 상황을 생각하면 곧바로 받아들이는 쪽이 이상할 거다.
그럼 직접 증명해 보이는 수밖에 없다.
“보여 드리는 게 빠르겠네요.”
염준열이 홍룡을 부를 때처럼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대상 캐릭터의 광림, ‘홍룡소환(紅龍召喚)’을 사용합니다.〉
파아아……!
손끝에 아공간이 열리고 그 틈 사이로 홍룡이 등장했다.
염준열이 불러낸 홍룡보다 몸집도 크고, 두르고 있는 이능파와 불꽃도 내 쪽이 위였다.
그래도 내가 불러낸 불꽃의 용이 홍룡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건 염준열의 힘이야. 청룡이 나보다 더 잘 알겠지.’
조카 사랑이 깊은 청룡은 홍룡을 알아보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자, 자네가 어째서, 어떻게…….”
“제 광림이에요. 조건이 갖춰지면 타인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설마 자네가 적벽괴도라는 건가!”
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손이 떨릴 뻔했다.
요새 ‘그 단어’를 듣는 빈도가 좀 심해지지 않았나?
내가 부른 홍룡도 괴로워졌는지 주먹을 꽉 쥐고 청룡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역시 그 더러운 경매를 무너뜨린 건 준열이의 힘이었나. 하나 용족의 은인이 우리 준열이를 사칭한 적벽괴도였다니.”
청룡은 갑작스레 밝혀진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조카 사랑을 어필했다.
염준열을 사칭한 ‘그 단어’의 인물을 아직도 찾고 있던 걸까?
정체가 밝혀지면 붉은 사자와 용족의 질타를 받을 걸 각오하고 있었다.
청룡이 생각을 정리하고 어떤 처분을 내릴지 기다릴 때였다.
내가 가세하겠다고 발언한 이후부터 매우 들떠 있던 염준열이 말했다.
“청룡 삼촌은 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시죠. 그러니 용족의 은인인 의신이가 제 이름을 써서 환몽 경매를 무너뜨린 걸 기뻐하실 거예요.”
염준열은 신뢰로 가득한 시선으로 청룡을 보며 말했다.
염준열의 의심 없는 태도에 청룡이 말문이 막혔는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준열아, 그때 너는 관계없는 일과 엮여 곤란했지 않았느냐.”
“만약 환몽 경매의 존재에 관해 알았다면, 무관계한 일이었다 해도 제가 직접 나섰겠죠. 의신이의 선택 덕에 많은 사람을 구했고, 저는 좋은 스승을 얻었어요.”
염준열은 나와 사제지간이라는 걸 밝힐 생각인가.
‘그 단어’에 관해 밝힌 이상 청룡에게 뭘 더 숨겨 봐야 큰 의미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청룡은 내가 염준열의 스승이라는 걸 곱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데.
“좋은 스승? 적벽괴도를 스승으로 삼고 싶다는 말을 했지. 설마…… 준열아?”
“네, 의신이는 제 친한 후배이자 스승님이에요.”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고 하지만 후배와 스승이라는 말이 공존할 수 있는 걸까.
청룡은 눈을 부릅뜨고 경악했다.
청룡의 얼굴이 시뻘게지다가 시퍼레지기를 반복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저 정도로 용족의 후예가 따르다니.”
황지호는 용들의 대화를 지켜보며 말했다.
염준열은 그저 청룡이 폭주할까 봐 적절히 대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염준열의 대처가 먹힌 건지, 청룡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청룡은 염준열과 나를 빤히 본 후, 내가 부른 홍룡을 봤다.
홍룡을 본 청룡은 무언가를 결의한 건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준열이의 말이 모두 옳구나. 우리 준열이의 은인 겸 후배 겸 스승을 소홀히 대할 수 없지.”
“청룡 삼촌이라면 그렇게 말씀해 주실 거라고 믿었어요.”
염준열이 청룡을 다독인 게 지나쳤던 것일까, 팔불출 삼촌이 이상한 소리를 하려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용족의 은인을 우리 용족의 일원으로서…….”
“청룡, 불필요한 말을 삼가라. 도와주러 왔다 하지 않았나? 이 몸의 눈앞에서 호족의 은인을 빼돌릴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청룡이 쓸데없는 말을 할 뻔했는데, 황지호가 더 쓸데없는 말로 이를 차단했다.
두 수장의 나잇값 못 하는 쓸데없는 대화는 계속되었다.
“김신록을 구한 건으로 주목하고는 있었지만, 그런 행보를 보였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지. 호족의 은인은 만났을 때부터 비밀이 많았다.”
“어쨌든, 우리보다 앞서 용족의 은인이 적벽괴도라는 걸 알고 있었나 보군.”
“뭐, 그렇지. 괴도짓보다 우리 호족의 은인이 된 게 먼저였지만 말이다.”
두 수장은 이후에도 헛소리를 주고받았으나 12지 동맹 회담에서 본 것과 그리 다름없기에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염준열은 저 둘이 나누는 대화를 어색하게 웃으며 듣다가 물었다.
“호족분들은 의신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
“네.”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어?”
이건 좀 모호한 질문이었다.
‘그 단어’가 나라는 걸 먼저 안 건 호족이지만, 그 모습으로 먼저 만난 건 염준열이다.
‘그 단어’로서 염준열과 만난 건 어린이날 시구를 하라고 지시하면서고, 황지호가 알아차린 건 여름방학 청소년 수련회 이후였으니까.
이를 종합해 전달했다.
“네, 하지만 그 모습으로 만난 건 염준열 선배님 쪽이 먼저예요.”
“네, 응. 그랬구나.”
이 말을 들은 염준열은 순간 제자로서 답하려다 말을 고치며 웃었다.
다 밝혀졌다 해도 이 자리에서 염준열을 제자로서 대하면 청룡이 저도 모르게 불을 뿜어 댈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선 계속 후배로서의 말투를 유지할 예정이다.
염준열의 회복을 기다리는 사이 작전을 짰다.
“광림 위주로 거리를 두고 공격할 거예요.”
“홍룡을 중심으로 싸우자는 거구나.”
“네. 광림을 다루는 걸 계속 보여 주는 게 중요해요. 김신록 선생님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가 견제할 테니, 원거리에서 홍룡으로 공격해 주세요.”
2차전의 시작이 가까워졌다.
대련장의 중심, 내 옆에 선 염준열이 말했다.
“실전은 아니지만, 네 홍룡과 같이 싸울 수 있어서 기뻐.”
염준열이 지나치게 기쁨을 표시하면 또다시 청룡의 심기가 불편해질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 기뻤다.
염준열과 나란히 서서 같이 염준열의 힘으로 싸우다니.
플마고의 썩은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시작하도록.”
황지호가 대련의 시작을 선언했다.
하지만 김신록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김신록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염준열이 둘로 늘어났다고 해서 위협이 되지 않지.’
내가 부른 홍룡이 염준열의 것보다 크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뭐가 달라졌는지 감을 잡지 못할 거다.
파아아아!
염준열과 내가 불러낸 홍룡 두 마리가 허공에서 열기를 뿜었다.
염준열의 홍룡은 내 홍룡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꼬리를 느리게 흔들고 있었다.
김신록을 상대하는 중이 아니라면 저 홍룡은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가까이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원격 점화’를 사용합니다.〉
화르르륵!
나와 염준열은 사전에 계획한 대로 최대 출력으로 김신록에게 화염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불꽃에 휩싸인 김신록을 두고 염준열은 홍룡을 타고 하늘로, 나는 지상에 남았다.
염준열이 홍룡에 올라타 천장 가까이 부상했을 때, 연기 속에서 김신록이 걸어 나왔다.
염준열과 싸울 때에는 내내 한 손으로만 비도를 휘두르던 김신록이었으나 이번엔 양손에 비도를 쥐고 있었다.
‘모처럼 가벼운 무기를 다루고 있으니, 한 손만 쓰는 건 아깝긴 하지.’
김신록은 정말 염준열을 많이 봐준 것 같다.
비도로 불꽃을 벤 김신록은 무심한 눈으로 나와 염준열의 위치를 확인하며 말했다.
“화염술의 출력은 조의신 군 쪽이 위군요.”
화염술의 스킬 발현을 전부 해제하지 못한 건지, 불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김신록은 벨 수 있는 불꽃을 판단해 그쪽을 노려 화염술을 피한 것 같다.
그렇다고 벨 수 없을 정도의 화염을 퍼붓는 건 하책이다.
이능파를 소모한 후에 거리가 좁혀지면 끝이니까.
“다수를 상대로 싸울 때의 기본은 숫자를 줄이는 겁니다. 상대가 여럿이면 변수가 많습니다.”
김신록은 마치 교사처럼 말했다.
그러나 평소 그가 연기하는 사람 좋은 교사의 말투와는 전혀 달랐다.
“수를 줄일 때에는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상대부터 노리는 게 유리합니다.”
김신록의 시선이 한참 높이 떠 있는 염준열 쪽으로 향했다.
김신록이 무기를 새로 꺼낼 생각인 듯 손을 놀리는 게 보였다.
김신록의 손에는 비도 외에도 압정이 들려 있었다.
“피하세요!”
내 외침에 홍룡에게 불꽃을 뿜을 것을 지시하려던 염준열이 급히 선회했다.
나는 홍룡을 움직여 불꽃을 쏘고, 동시에 지원 사격을 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원격 점화’를 사용합니다.〉
화르르륵!
김신록의 손을 노려 화염술을 사용했으나 지나치게 급하게 쓰는 바람에 위력이 달려 불꽃은 금방 지워졌다.
그래도 염준열을 조준하는 걸 방해할 만한 틈은 번 건지, 김신록이 투척한 비도는 홍룡에게 적중하는 대신 비늘을 스쳤다.
하지만 전부 피한 건 아니었다.
후두둑…….
염준열의 팔과 어깨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김신록이 던진 압정이 염준열의 비늘을 뚫지 못하고 떨어진 것이다.
‘이 거리에서 방해를 당하고도 적중시키다니. 조금만 늦었다면 비늘의 틈 사이에 압정이 꽂혔을 거야. 어쩌면 비도도.’
이쪽은 홍룡을 다뤄 하늘을 날 수 있고 숫자도 많다.
그러나 김신록은 마치 그런 패널티가 없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싸웠다.
조금만 방심하면 김신록은 황지호가 펼친 결계의 벽면을 딛고 도약해 염준열 쪽으로 날아가고, 정교한 투척 스킬을 선보였다.
여전히 광림은 사용할 기미가 없었으나 광림이 필요 없을 만큼 뛰어난 무위를 선보였다.
‘김신록이 꺼리기도 하고, 저 정도로 강하니 굳이 호족들도 광림 사용을 권하지 않았구나.’
김신록이 발을 디디는 결계의 벽을 불꽃으로 뒤덮기 위해 홍룡을 타고 날아올랐을 때였다.
가까이 다가온 염준열이 말했다.
“발목을 잡고 있구나, 미안!”
염준열은 돕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염준열이 제 몸처럼 홍룡을 다루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염준열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지 작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의신아, 2대1이니까 그 힘을 사용하지 않을래?”
그 힘?
이능파 링크를 가리키는 건가.
그건 이쪽의 수가 더 많아야 유효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수가 없었다면 염준열의 말대로 시도는 해 봤겠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게 있어요.”
김신록을 상대로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언젠가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다른 호족들은 몰라도 이 자리에 있는 호족, 김신록에게 호의를 가진 진족들은 모두 그가 그 문제를 극복하길 바랄 거다.
‘미리 호족들에게 이야기해 두길 잘했다.’
만약 내가 염준열과 함께 싸우게 되면 어느 힘을 사용하기로 했다.
내 제안을 들은 호랑이 중 적호는 망설였지만, 다른 호족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김신록 선생님이 바닥과 벽에 전개된 불꽃을 지우고 있어요. 곧 이쪽으로 오실 거예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무명의 운명을 꺼냈다.
휙! 휘익!
김신록은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것처럼 벽을 밟고 도약하고, 두 마리의 홍룡이 뿜는 불꽃을 지워 버리며 이쪽으로 날아왔다.
비행 스킬은 없을 텐데, 도약 스킬을 노련하게 사용하는 바람에 마치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비도를 쥔 김신록이 염준열을 향해 달려든 순간, 나는 홍룡을 움직여 그 앞을 막았다.
동시에 투명한 운명의 카드가 어느 캐릭터의 카드로 변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시스템음이 들린 순간, 김신록이 들고 있는 비도에서 이능파가 사라졌다.
김신록은 비도를 든 채로 멈춰 섰다.
스킬을 발동시키려 해도 되지 않았고, 나를 향해 움직이려 해도 되지 않았다.
주춤한 김신록은 그대로 바닥에 착지했다.
타닥!
“아…….”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처럼 김신록이 나를 보며 굳어 있었다.
무명의 운명 카드로 지정한 캐릭터는 내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백호군.
김신록이 공격할 수 없는 호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