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36)
93. 손님 (8)
후예는 피와 근원으로 묶인 진족을 공격할 수 없다.
호족과 웅족의 후예로서 긴 시간을 살아온 김신록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대련에서 이런 감각을 느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조의신 군은 백호 님의 힘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잊고 있었군.’
잊고 있었다기보다는 떠올리지 못했다는 쪽에 가까웠다.
머릿속 한구석에 생각은 해 두고 있었는데, 조의신이 부른 홍룡을 보니 떠올릴 수 없었다.
조의신이 염준열보다 홍룡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만으로도 경악할 일인데, 거기에 더해 호족 최고의 무재의 힘을 동시에 사용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 않았다.
김신록은 높이 떠 있는 홍룡에 타고 있는 조의신을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그 둘의 힘을 다루다니. 그게 가능한 건가.’
조의신이 백호의 힘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제압해 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의신은 적극적으로 백호의 힘을 활용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조의신은 어느 사이엔가 백호의 힘을 거두고 있었다.
‘단순히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닌 것 같군. 조의신 군의 의도가 어떻든 지금은 처음 계획대로 수를 줄여야 한다.’
김신록은 마음을 다잡고 염준열의 위치와 움직임을 확인했다.
완전히 개방된 공간이었다면 김신록이 홍룡을 노리기 까다로웠겠지만, 은련관의 단련장은 넓다고 하나 폐쇄된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한계가 있었고 벽을 밟고 뛰어오를 수 있었다.
‘염준열 군은 또래에 비해 우수하지만 아직 미숙해. 이능파의 총량도 적고, 조의신보다 스킬 레벨이 낮아. 그리고 동요할수록 동선이 단순해진다.’
압정을 뿌릴 때마다 염준열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피하는지는 완전히 파악했다.
문제는 조의신이었다.
조의신은 김신록이 염준열의 움직임을 알고, 이를 바탕으로 계산해 다음 공격을 가한다는 걸 파악한 것 같았다.
조의신이 방해하기 전에 거리를 좁혀 염준열을 제압해야 했다.
화르르륵!
갑자기 김신록을 향해 쏟아진 화염 탓에 비도를 휘둘러야 했다.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쏟아진 불꽃 세례 탓에 길게 생각할 수 없었다.
김신록은 냉정하게 활로를 노려 불꽃을 갈랐지만, 머리가 복잡했다.
‘조의신 군과 염준열 군이 각각 홍룡을 부른 탓에 2대1이 아니라 4대1 같군.’
홍룡이 불꽃을 쏘고 홍룡을 탄 두 사람은 따로 화염술을 사용하니 바로 반응하기 까다로웠다.
김신록을 경계하며 하늘을 유영하는 홍룡을 보니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광림을 잘 다룰 수 있었다면 4대1이 아니라 4대2가 됐겠지.’
김신록은 범과 곰을 부르는 광림을 사용하므로 엄밀히 따지면 4대3이겠지만, 곰은 아예 없는 존재로 생각했다.
김신록은 광림의 필요성을 느꼈으나 좀처럼 쓸 수 없었다.
‘내 광림은 호족의 눈앞에서 사용할만한 것은 아니나 황호 님, 백호 님, 적호 님께서는 이런 자리를 마련하실 정도로 내가 광림을 쓰는 걸 기대하신다. 기대에 응하고 싶다.’
그렇게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으나 광림은 사용할 수 없었다.
아주 먼 옛날 광림을 사용했던 순간의 감각을 떠올리려 했지만,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숨 쉬듯 자연스럽게 범과 곰을 불러내고, 이를 지켜보던 용제건이 황홀해 마지않던 얼굴을 하던 것만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용제건이 기억 속에서 그딴 표정을 짓고 있으니 울컥한 마음이 치솟아 올라 김신록은 생각을 멈췄다.
용제건은 김신록의 회상 속에서조차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김신록은 스킬만으로 이 상황에 대처하기로 했다.
파밧!
비도를 고쳐 잡은 김신록이 도약 스킬을 사용해 염준열을 향해 뛰어올랐다.
조의신이 방해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도약한 탓에, 순간 둘의 반응이 늦어졌다.
쏜살처럼 달려드는 김신록을 보고 염준열이 다급히 화염술을 사용했다.
화륵! 휙!
그러나 염준열이 쏜 불꽃은 출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기에, 김신록이 던진 압정만으로도 금방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연기 뒤에 보이는 염준열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화염술만으로는 김신록의 추격을 뿌리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홍룡을 움직여 피하려 했으나, 이는 예상한 움직임이었다.
벽을 박차고 급격히 방향을 전환한 김신록이 허공에서 염준열의 몸통을 걷어찼다.
퍼억!
염준열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으나 순간 홍룡이 흐릿해질 만큼 타격을 입은 건지 비틀거렸다.
김신록은 땅에 착지한 후, 곧바로 비도를 던져 염준열을 바닥에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가호가 없는 김신록은 불꽃을 휘감은 홍룡 위에 올라탈 수 없기에 택한 거친 수였다.
그러나 비도를 던지기 직전, 다시 한번 조의신이 김신록의 앞을 막았다.
호족이 눈앞을 막은 감각에 김신록은 저항할 수 없었다.
“으……!”
툭.
힘을 싣기 바로 전이라서 그런지, 비도가 쇳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조의신은 백호의 힘을 거두고 염준열 쪽으로 날아올랐다.
염준열이 괜찮은지 확인한 후, 조의신은 다시 이쪽을 보고 경계했다.
또 어이없게 공격을 실패한 김신록이 속으로 탄식했다.
‘거의 다 잡았는데……! 이래서야 이길 수 없다.’
분하고 거친 생각이 치솟아 올랐다.
학생을 상대로, 그것도 호족의 은인에게 품을 생각이 아니라 김신록이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웅족의 피를 이은 주제에, 호족이 겪은 분란의 씨앗인 주제에 감히 이런 생각을 하다니, 자신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때, 조의신이 김신록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했다.
“호족의 힘을 사용했기에 겨우 막을 수 있었어요. 지금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웅족의 권속에게 죽을 뻔할 일도 없었겠죠.”
웅족의 권속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김신록은 화염술을 사용할 수 없는데도 몸속에서 불꽃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김신록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조련계 웅족의 권속, 리노세론 수준의 에너미 따위는 비도를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목을 따 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흉한 에너미에게 힘을 불어넣은 게 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김신록은 장난감처럼 휘둘렸다.
“김신록 선생님은 강해요. 하지만 선생님의 힘에는 제약이 많고, 자신을 위해 싸우려고 하시지 않죠. 하지만 호족이 아닌 인간에게 이런 방식으로 지는 걸 납득하실 수 있나요?”
조의신은 자신이 호족이 아닌 인간이라고 말했으나, 황명호 대저택 본채에 며칠이나 머무는 인간을 남이라 치부하긴 어려웠다.
조의신은 호족과 가깝게 지내는 은인이자 개인적인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니, 김신록이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의신의 말대로였다.
납득할 수 없었다.
김신록은 적호가 그랬던 것처럼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 넘치던 아이였고, 사실 지금도 그랬다.
이길 수 없다는 건 분했다.
“홍룡은 자신이 품은 힘을 구현화한 거예요. 나를 위해 싸우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부를 수 없어요.”
조의신의 말에 잘 떠오르지 않았던 옛 기억이 조금씩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김신록은 하나밖에 없는 친구 앞에서 광림을 사용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 * *
김신록은 나와 염준열을 상대로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결계 밖의 상황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할 정도였다.
용제건에게서 들은 김신록에 관한 이야기.
스승인 백호군이 암시했던 김신록의 말썽꾸러기 시절.
적호의 성정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사항.
가끔 보이는 김신록의 태도에서 읽어 낸 것.
이들을 종합해 김신록의 머릿속을 읽어 냈는데 예상대로인 것 같다.
‘김신록은 주변 상황 때문에 감정을 억누르고, 포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달라. 김신록은 승부욕이 넘치는 사고뭉치야.’
호족과 웅족 사이에서 태어나 불우한 성장기를 거친 비극의 아이.
호족이 자랑하는 냉정한 고문 전문가.
안다인, 성국언 같은 학생들을 따르게 만드는 훌륭하고 다정한 교사.
이런 모습 때문에 짐작하기 어렵지만, 김신록은 사실 적호의 젊은 시절 성정을 그대로 타고난 호전적인 호족의 후예다.
이것을 억지로 죽이고 억눌렀으니 자신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를 소환하는 광림을 제대로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염준열은 홍룡을 소환하던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
―제가 홍룡을 처음 부르던 순간이요?
―광림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됐을 때, 제가 홍룡을 부를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용족의 후예다운 광림을 쓸 수 있어서 굉장히 기뻤어요.
―제가 이 말을 전하니 다들 제 홍룡을 보고 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붉은 사자 팀 빌딩의 연회장에서 광림을 시연하기로 했어요.
염준열이 광림을 각성한 순간, 한반도에 체류 중이던 모든 용족들과 붉은 사자 팀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고 한다.
저렇게 착하고 우수한 염준열이 용을 불러낼 수 있다니, 다들 얼마나 들떠 했을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염준열은 기대에 찬 얼굴로 자신을 보는 용족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언제나 염준열의 안전을 생각하는 용족들과 붉은 사자 팀원들, 가족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홍룡과 강해지기로.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광림을 사용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제 경호 때문에 다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건 다들 좋아서 하는 걸 텐데.
아마 염준열의 경호 자리를 두고 싸울 정도가 아니었을까?
염준열도 그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이런 말도 덧붙였다.
―사실 그날 어느 용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한 용을 불러내고 싶었어요. 누군가가 제 안전을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건 기쁘면서도 굉장히 분한 일이니까요.
그 말을 듣고 나니 김신록이 광림을 사용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김신록을 부추기고, 투쟁심을 이끌어 광림을 사용하도록 유도해야 해.’
광림을 이미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은 필요 없겠지만, 처음 광림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는 김신록에게는 극약 처방이 필요하다.
그래서 김신록이 잊으려 하고 외면하던 본성을 자극하기로 했다.
김신록이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긴 것을 지켜보며 나는 수련장 밖을 보았다.
내가 이렇게 김신록의 속을 긁었으니 관전하던 수장들 분위기가 험악할 줄 알았는데, 저쪽은 매우 평화로웠다.
“우리 준열이가 저렇게 의젓하게 버티다니! 훌륭하군! 사실 발차기가 직격하는 순간 체통을 잊고 달려들 뻔했지만, 참았지.”
“결계에 발을 들일 뻔한 걸 보았다.”
“흠, 그런데 용족의 은인으로부터 진족의 기운이 느껴졌다. 준열이의 홍룡을 다루니 용족의 후예라고 봐야 하나, 하지만 지금 진족의 기운이 느껴졌으니 후예 취급 대신 진족으로서…….”
“김신록을 멈추게 한 건 호족의 힘이다. 그러니 호족의 은인인 조의신은 호족이라 봐도 무방하지.”
“홍룡을 부르고 있는데 호족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12지의 수장들이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난 인간이다.
못 들은 척하고 염준열의 안색을 살폈다.
염준열이 부른 홍룡의 불꽃이 눈에 띄게 약해졌으나 아직 광림을 유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파밧!
염준열에게서 시선을 뗀 순간, 김신록이 내 쪽으로 돌진해 왔다.
다시 염준열을 노리는 대신 도발한 나를 우선시하기로 한 걸까.
백호군의 힘을 또 사용하기 전에 처리해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약해진 염준열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홍룡의 머리를 틀어 멀리 날아갔을 때였다.
화르륵!
염준열이 급히 화염술을 사용했다.
김신록을 견제하기 위해 불꽃을 부른 줄 알았는데, 염준열이 노린 곳은 다른 방향이었다.
염준열이 부른 홍룡의 꼬리 끝, 무언가가 있었다.
크르르르……!
번개를 두른 범 한 마리가 낮게 목을 울리고 있었다.
김신록이 소환한 호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