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46)
94. 용반호거 (8)
‘용궁으로 가는 길을 여는 역할은 청룡과 무녀들이 맡는다고 했지.’
이 세계에는 순간이동, 전이 관련 이능이 존재한다.
그 사례 중의 하나는 옹길동의 광림, ‘마술사의 비단 모자’로 모자 안에 넣은 것을 원하는 장소로 보내는 게 가능하다.
굉장한 이능이긴 하지만 이능파 대비 효율이 좋지 않고,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를 옮기는 건 대단히 까다로운 데다 이동하는 거리가 길수록 이능파의 소모가 극심해진다.
다른 전이 타입 이능도 원리 자체는 별다를 바가 없을 텐데, 강력한 진족으로 꼽히는 용족답게 전이로 이동할 예정인가 보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숫자가 늘어나면 청룡이나 무녀의 힘만으로는 전이가 불가능하겠지. 청룡은 12지 동맹 소속 수장 중 하나로서 지력을 사용하고, 무녀들은 용왕신으로부터 힘을 빌리는 중일 거야.’
용족의 진정한 본거지는 용궁이지만, 한반도에서 12지 동맹의 결계를 친 공간은 붉은 사자 팀 빌딩의 주변이다.
그 결계는 호족이 은광고 주변에 친 결계에 비해 범위가 협소하고 강도가 높지 않다.
한 번 이사하여 결계를 다시 치는 바람에 발생한 결과였다.
용족은 본래 서해안 연안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은광고에 진학하고 인간과 결혼한 후예들을 위해 손해를 무릅쓰고 이사를 감행했다.
그 바람에 12지 결계의 힘은 약해졌지만, 무녀의 힘을 결계에 더하고 붉은 사자 팀 멤버들이 상주하다 보니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청룡이 다루는 지력 또한 용족의 방비를 굳히는 데 일조했다.
‘청룡이 지력을 잘 다루는 건 당연한 일이야. 문제는 무녀 쪽이지.’
다섯 무녀들의 주변에 오색 채운이 넘실거렸다.
무녀가 용왕신으로부터 빌린 힘의 상징이다.
부재중이라는 용왕신이 왜 무녀에게는 힘을 빌려준 걸까?
“저번에 본 준열이의 후배네요. 오늘 오신다는 손님이 이 아이였나요?”
연한 노란빛의 구름을 등진 무녀, 배신자임이 확실한 유황이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용제건의 말에 의하면 무녀들에게 손님이 온다는 건 오늘 아침에 전했다고 한다.
무녀들은 갑자기 손님이 온다는 말에 당혹스러워하고 의문을 품은 것 같지만, 청룡이 ‘용제건의 의사다, 용족들도 몰랐다.’라고 둘러대자 바로 납득했다고 한다.
용제건이라면 할 법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속내를 감추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전히 예의가 바르네요. 분명 용왕신께서도 손님을 환영하겠지요.”
“의신이는 용왕신으로부터 용궁 출입 허락을 받았어. 물론, 내가 건넨 초대권을 받은 신록이나 적호 씨도 마찬가지지.”
“그렇군요, 안심이에요.”
유황은 따뜻한 말로 나를 환영했지만, 기껍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를 염준열의 후배로서 다정하게 맞이하는 유황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은광고에 삿된 눈을 뿌리는 데에 조력하고, 플마고에서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용들과 염방열 살해에 가담한 배신자를 연상할 수 있을까.
저 정도로 완벽하게 의태할 수 있다면 긴 시간을 함께한 용족들이 의심을 품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황에 이어 자(紫)의 무녀가 물었다.
“손님이 많아서 좋네요. 그런데 황룡 님과 청룡 님의 용새를 받은 분은 없는 건가요?”
무녀들 중 용족과 인간들과 가장 친하게 지낸다는 자의 무녀는 누가 용새를 받은 건지 궁금한가 보다.
붙임성이 좋은 무녀가 손님에게 관심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답하는 건 삼갔다.
무녀들과 필요 이상의 대화를 나누는 건 삼가기로 사전에 약속한 상태다.
그 질문에는 모르는 척 모호하게 웃으며 넘어갔다.
“내가 부른 손님들이 어떻게 왔는지 궁금해? 나도 손님들에게 궁금한 게 많아. 질문은 내가 먼저 할래.”
“네? 용제건 님이 부른 손님들인데 궁금한 게 많다니…….”
“신록아, 마침 궁금한 게 있었어. 너희 반 아이들과 놀러 간다는 거 말인데.”
용제건이 웃으며 김신록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던져 대기 시작하자 무녀들이 손님 측에 말을 걸 틈이 사라졌다.
용제건이 저러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쓴웃음을 짓는 무녀들이 몇몇 있었으나 의심을 사진 않을 것 같다.
“준비가 끝났다. 용제건, 손님들을 데리고 먼저 용궁으로 가도록.”
“자, 가자.”
용제건이 앞장서서 다섯 무녀의 중심에 서고, 나와 김신록이 그 뒤를 따랐다.
지력과 오색 채운에 휩싸이자 힘의 압력 탓에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먼 거리를 전이시키려면 이 정도의 힘이 필요한 건가.
전이하는 순간 멀미가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적호가 힘의 중심으로 발을 들이려는 순간, 시안색의 공간이 전개되었다.
파앗!
용제건의 공간술이 전개되자 공기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전개된 공간은 꽤 두터워 밖에서 봤을 때 불투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순식간에 전개한 공간술치고는 강도가 꽤 높았다.
“나 잘했지?”
“원래 하기로 한 거잖아. 늦어.”
“아슬아슬하게 전개하는 게 효과가 좋을 것 같아서.”
김신록의 핀잔을 듣고도 뭐가 좋은지 용제건이 웃었다.
용제건에 이어 청룡이 움직였다.
“귀한 손님들을 배려해야겠군.”
화르륵!
청룡의 푸른 불꽃이 시안색의 공간을 감쌌다.
공간 내부에서 바깥 상황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두터운 불꽃이었다.
지력을 다루는 중인데도 저 정도를 할 수 있다니.
수장이라면 누구나 저 정도는 하는 걸까?
황지호가 이 광경을 보고 한마디 한다면 ‘이 몸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다.’라고 말할 것 같긴 하다.
“저도 돕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염방열의 홍염이 덮였다.
강력한 힘이 삼중으로 덮이니 지력과 무녀의 힘이 몸을 짓누르는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손님들 중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은 적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용제건이 불꽃과 홍염의 틈 사이로 바깥을 보며 말했다.
“염방열, 여긴 맡길게.”
이 자리에 있는 용족, 무녀들은 우리를 뒤따라 용궁에 올 예정이었지만, 염방열은 달랐다.
염방열의 홍염은 해저에 있는 용궁에선 제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판단 탓이었다.
그리고 염방열은 수를 두기 위해서 남아야 했기에 지상에 배치하는 게 최적이었다.
작별 인사를 하듯 말을 남긴 용제건에게 염방열이 답했다.
“맡겨 주십시오. 좋은 여행이 되길.”
콰아아아아!
그 든든한 말을 끝으로 지력과 오색 채운이 소용돌이치듯 섞였다.
그 광경을 끝으로 시야가 크게 뒤흔들렸다.
힘의 격류 속에 내던져진 감각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전이의 충격으로 인해 우리 주변을 감싼 힘이 하나씩 벗겨졌다.
홍염이 사라지고, 푸른 불꽃이 사라지고, 시안색의 공간에 금이 갔을 무렵.
굉음과 충격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여기가 용궁인가.’
나는 바닷속에 서 있었다.
끝이 아득해 보일 정도로 대형의 공기 돔 밖에 시커먼 바닷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먼 곳을 보던 눈을 돌려 바로 앞을 바라보니 거대한 쌍여닫이문이 보였다.
쌍여닫이문의 한쪽은 청룡의 상징인 푸른색, 다른 한쪽은 황룡의 상징인 황색이었다.
오색으로 빛나는 문고리를 보고 있자니 용제건이 말을 걸었다.
“다 왔어. 힘들어? 업어 줄까?”
“아니.”
“신록이 말고 의신이한테 물어본 건데? 신록이가 힘들면 업어 줄…….”
“필요 없어.”
용제건과 김신록은 매우 멀쩡해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저럴 여유가 있는 걸 보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아들아,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괜찮습니다.”
적호도 별문제 없는 것 같다.
나를 제외한 손님들은 모두 끄떡없어 보였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정말로? 황호 씨는 걱정할 것 같은데.”
“저는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여기서 황지호가 왜 나오나.
용제건이 능글맞게 말했으나 나는 대충 받아쳤다.
용제건은 그 이후로도 골고루 속 긁는 소리를 했지만, 다들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긴 건지 별문제 없었다.
용제건이 저러는 사이에 멀미는 완전히 가라앉았다.
“내가 문을 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실컷 일행을 놀려 먹고 문고리에 손을 올리려던 용제건이 말했다.
용제건의 말대로 그가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문고리가 오색으로 빛나다가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
문이 양옆으로 열리자 문틈 사이로 황색의 구름이 퍼졌다.
구름을 밟고 누군가가 문 안에서 걸어 나왔다.
용궁의 정문 안에서 걸어 나온 존재는 눈을 가린 용이었다.
‘이 정도의 위압감을 가지고, 황색의 구름을 부리는 용이라면 황룡이겠지.’
황룡이 시야 안으로 들어오자 김신록이 탄식했다.
“아…….”
김신록의 시선은 황룡의 눈을 가린 눈가리개에 꽂혀 있었다.
그 눈가리개는 용제건이 한 것과 아주 흡사한 디자인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황룡의 눈가리개는 모든 마감이 황금의 실로 되어 있다는 것, 용제건의 것은 옥색의 실로 되어 있다는 것 정도였다.
눈가리개에 사감이 있는 건지 김신록은 도통 눈을 떼지 못했다.
“무사히 도착했구나.”
“안녕, 황룡. 자주 보네.”
“마지막으로 보고 나서 얼마 안 지나긴 했지.”
“용궁의 무녀들은?”
정확히 말하면 용궁에 있는 무녀는 정식 무녀가 아니라 탈락자들이다.
하지만 용족들은 용궁에 남기로 선택한 이들을 존중해 그 탈락자들을 ‘용궁의 무녀’라 부른다고 들었다.
참고로 정식 무녀들은 ‘용왕신의 무녀’라고 불러 용궁의 무녀와 구분을 짓는다고 한다.
용제건의 질문에 황룡이 답했다.
“용궁의 무녀들은 지상의 문과 이곳이 이어지도록 결계를 조정하고 있다. 손님이 많아 할 일이 많다. 나도 바로 가 봐야 한다.”
황룡은 바쁜 와중에도 마중을 나온 것 같다.
아마 마중을 나온 이유는 용제건을 아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김신록 때문인 것 같다.
“네가 그 용제건의 유일한 친우로구나. 만나고 싶었다.”
황룡은 용제건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를 바로 만나고 싶었나 보다.
황룡이 갑자기 말을 걸자 당황한 김신록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용제건과 달리 깐족이지 않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황룡은 김신록을 가만히 지켜보다 다시 말을 걸었다.
“머무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용제건이 친우 자랑을 어찌나 하는지, 늘 네가 궁금했다.”
황룡은 김신록 외의 손님에게도 시선을 줬다.
나를 한 번 흘끗 본 데에 이어 적호 쪽을 살피던 황룡이 말했다.
“이 자리에 있는 손님들은 모두 허락을 받은 자로구나. 한 번 왔거나 처음 오는 호족도, 인간도. 그렇다면 문제없겠지.”
눈에 띄지 않는 손님 쪽에는 관심을 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황룡은 모든 손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때, ‘콰르르’ 하고 저 멀리에서 바닷물이 크게 요동치는 게 보였다.
우리에 이어 다른 이들도 용궁으로 향한다는 전조 같았다.
“나는 가 봐야겠군. 다들 쉬도록. 이곳으로 전이하느라 피곤했겠지. 지금 인사가 곤란하더라도 나중에 대화를 나누었으면 한다. 나는 지상의 일에 관심이 많다.”
황룡은 적호와 내 쪽을 주시하며 말했다.
마침 나도 황룡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니 시간을 잡아 면회를 신청해야겠다.
“동쪽에 있는 청룡궁을 쓰고 싶다고 했지?”
“응, 그 궁이 좋아.”
“그래, 용제건. 손님들을 안내하거라.”
황룡은 그 말을 끝으로 용제건에게 손님의 안내를 맡기고 물러갔다.
용제건을 따라 문턱을 넘자 구름 탓에 시야가 흐려 보이지 않았던 용궁이 보이기 시작했다.
용궁은 웅장하고 험한 산세와 어우러져 있었다.
마치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듯한 산맥 사이에 용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