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47)
95. 도룡지기 (1)
용궁과 산맥의 정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용제건이 제안했다.
“위에서 볼까? 밑에서 보는 것보다 위에서 보는 게 더 잘 보여.”
파앗!
뭐라 대답하기 전에 용제건이 움직였다.
용제건의 손짓 하나에 거대한 공간이 바닥에서부터 생성되었다.
공간은 천천히 위로 떠올랐다.
용제건은 비행술과 공간술을 동시에 사용해 용궁 구경을 시켜 줄 모양이다.
‘붉은 사자 팀 빌딩에서 공간술을 썼을 때보다 상태가 좋아 보인다.’
용제건은 원래 강했고 지상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로 힘을 다룰 수 있긴 했다.
그래도 공간의 생성 속도나 용제건이 발산하는 이능파의 질 등등의 상태가 지상에 있을 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전이 자체도 꽤 피곤한 일이고, 전이 과정에서 공간술을 사용하며 방어까지 담당했는데 용제건은 평소보다 더 쌩쌩했다.
용궁에 온 덕에 용의 힘이 강해지고 손님과 함께 온 게 신나서 저러는 것 같다.
“어때, 잘 보이지?”
용제건의 말대로 정말 잘 보였다.
오묘한 색의 구름을 휘감은 궁전과 산, 그 너머로 보이는 심해의 정경이 환상적이었다.
“용궁이 좀 크고 복잡해. 그래도 다섯 개의 궁이 가진 색을 기억해 두면 길을 잃지 않을 거야. 잃었더라도 황룡궁이나 청룡궁을 찾아오면 황룡의 권속이 발견해 주겠지.”
용제건이 말한 다섯 개의 궁은 오방색의 방위대로 배치되어 있었고, 각 궁에는 오방색의 용 이름이 붙어 있었다.
동쪽에는 우리가 머물 예정인 청룡궁.
중앙에는 용궁의 무녀들과 황룡이 기거 중인 황룡궁.
서쪽에는 백룡궁, 남쪽에는 적룡궁 그리고 북쪽에는 흑룡궁이 있었다.
용제건의 말대로 길을 잃더라도 궁의 색을 확인하면 자기가 어느 방위에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룡궁, 적룡궁, 흑룡궁은 평소 사용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곳에서도 힘이 느껴지는군요.”
적호의 말대로였다.
비어 있는 백룡궁, 적룡궁, 흑룡궁에서도 힘과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제건이 눈가리개를 한 얼굴을 돌려 세 궁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위 존재가 된 용들의 영향 탓이야. 여기는 신계와 가깝잖아? 승천한 용들의 힘이 용궁에 닿을 수 있어. 쉽게 강림할 수 있는 건 용왕신뿐이지만.”
“백룡, 적룡, 흑룡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설마…….”
“승천했어.”
승천했다는 말에 김신록이 다섯 개의 궁에서 눈을 떼고 용제건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용제건의 눈가리개를 응시했다.
용제건은 그 시선을 눈치챘을 텐데도 딴청을 부리듯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듯 읊었다.
“용왕신의 무녀를 선정하는 시험이 치러지는 동안에는 백룡궁, 적룡궁, 흑룡궁도 개방할 거야. 무녀 후보생들이 용의 기운을 접하면 접할수록 옥석을 가려내기 쉬워질 테니까.”
가끔 질문을 던지던 적호도 말수가 없어졌는데, 용제건은 쉬지 않고 용궁 소개를 했다.
용제건은 허공에 공간을 불러내 용궁의 지도 형태로 보여 주며 자세한 설명을 이었다.
“전이를 통해 왔으니 잘 못 봤겠지만, 용궁은 한국의 서쪽과 중국의 동쪽 사이에 있어. 한국 기준으로는 서해, 즉 황해에 있지.”
설명을 하던 용제건이 나에게 물었다.
“우리의 힘이 국가에 따라 영향을 받고 있는 건 알고 있지?”
“네.”
“왜 그런지 답할 수 있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 번째는 국가에 따른 지력의 차이. 두 번째는 국가별로 진족의 기원에 대한 지명도 차이. 보통 이 두 가지 때문에 국경을 넘으면 영향을 받죠.”
이 두 가지에 이어 흔하지는 않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가지고 있는 가호의 차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황지호다.
개천신화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이윽고 하늘이 열려 천신이 내려와 소원을 물으니 신성한 범들이 답하였다.]
[황호(黃虎) 이르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신은 황호의 소원을 들어주어 가호를 내렸다.
그 가호의 결정체가 바로 분신이었다.
천신과 황지호의 힘이 허락하는 한, 황지호는 분신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
천신의 가호가 닿는 땅에서는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는 천신의 가호가 닿지 않는 땅, 즉, 국경을 벗어나면 황지호는 분신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뜻이다.
“막힘이 없네. 역시 우리 학교가 자랑하는 수재다워.”
내 대답을 들은 용제건이 만족한 듯 말했다.
저러니까 마치 교사 같다.
가끔 잊을 것 같긴 하지만, 용제건은 우리 반 부담임이었으니까.
어쨌든, 칭찬을 받았으나 진짜 수재나 천재는 주수혁이나 안다인, 천동하, 염준열, 도원우 등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적당히 흘려들었다.
“바다의 경계는 지상의 경계보다 모호하다는 것도 잘 알겠구나.”
그야 잘 알고 있다.
지상의 국경선에 비해 바다의 경계는 모호한 감각이 있다.
연안국의 영해는 국제연합 협약에 따라 결정되지만 접속수역, 배타적경제수역, 공해를 두고 국제 분쟁이 빗발치곤 한다.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도 이 분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최근까지도 해양 주권, 해양 경계 획정을 두고 한중일 사이에 마찰이 일어날 정도다.
“네, 용궁의 위치는 한국과 중국, 어느 쪽의 영해에도 포함되지 않죠.”
“응, 용궁은 한중잠정조치수역에 있어. 저번에도 설명했지만, 용궁은 배타적경제수역, EEZ가 어떻게 설정되냐에 따라 한국이냐 중국이냐가 갈리는 것 같아.”
배타적경제수역은 엄밀히 따지면 공해다.
즉, 용궁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진족들은 지명도에 따라 힘이 달라지는 등 대중의 인식에 따라 갈리는 경향이 있다.
대중이 한국과 중국 사이의 EEZ가 어디까지인지 인식하느냐에 따라 용궁이 한국에 있는지, 중국에 있는지 갈린다고 한다.
공해라고는 하나 EEZ의 설정에 따라 경제적인 주권, 개발 권리, 관리와 오염 방지 의무가 결정되니 그런 인식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
“지금 기준으로는 여기까지는 한국, 여기부터는 중국이야. 황룡궁을 기준으로 생각해 줘.”
용제건은 지도 위에 선을 그으며 말했다.
지도에 그은 선과 허공에서 내려다본 다섯 궁의 위치를 확인하며 용제건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출발하기 전에 들었던 설명이 대부분이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면서 말을 들으니 시야가 더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용제건이 설명을 한 차례 마친 후.
용궁과 산맥 위를 부유하던 용제건의 공간이 푸른 궁 앞에 착륙했다.
“여기가 청룡궁이야. 오랜만에 와 보네.”
청룡궁의 정원.
청룡의 본 모습을 본떠 만든 거대한 용 조각상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심해 속은 어두웠으나, 반딧불처럼 빛나는 푸른 기운이 주변을 밝혀 청룡궁의 정경이 잘 보였다.
지리를 눈에 익힐 겸, 정원을 천천히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자 저 멀리 황색의 빛이 보였다.
청룡궁의 정문 앞에 도착하자 그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바로 구름을 타고 있는 손바닥만 한 황색의 용이었다.
“황룡의 권속이네. 안내는 나한테 맡긴다고 했으면서.”
용제건이 손님을 데리고 와 들뜬 나머지 폭주할까 봐 걱정한 게 아닐까?
황룡은 용제건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아마 대비해 뒀을 거다.
황룡의 권속은 낯선 이들이 신기한 건지 구름을 타고 이쪽을 지켜보았다.
‘백호군의 영호(影虎)나 황지호가 다루던 저택의 그림 속 호랑이 같은 존재겠지?’
황룡의 영향을 받은 건지, 황룡의 권속은 일행 중에서 김신록에게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용제건의 친우가 대체 어떤 호랑이인지 몹시 궁금한가 보다.
“그럼 안내해 줘.”
휘익!
곧바로 안내역을 맡겨 버린 용제건이 얄미울 법도 한데, 황룡의 권속은 묵묵히 구름을 타고 앞장서서 안내를 시작했다.
용제건이 말을 걸면 무시하지 않고 꼬리를 살랑이거나 구름 조각을 날리며 성실하게 응했다.
용들끼리 사이좋게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는데, 황룡의 권속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기에 어떻게 대화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용제건은 알아듣는 걸까?’
황룡의 권속은 딱히 대화를 하지 않고 리액션만 보이고 있는데 멋대로 용제건이 상상 속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휘유우…….
그때, 황룡의 권속이 숨을 크게 뱉었다.
한숨처럼 뱉은 구름은 황룡의 인장 형태로 굳어졌다 흩어졌다.
이를 본 용제건이 말했다.
“각자 배정된 방만 확인해 보고 바로 황룡궁으로 가야 할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적호의 물음에 용제건이 답했다.
용제건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무녀 후보생들이 도착했어.”
윤여랑이 용궁에 도착한 듯하다.
* * *
붉은 사자 팀 빌딩.
갑작스럽게 등장한 손님을 보내고, 무녀 후보생들이 용궁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뒤를 이어 청룡을 비롯한 용족 몇 명과 용왕신의 무녀들이 전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배신자들은 전이를 돕는 동안 용궁으로 향하는 전력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일에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 배신자들은 신중하게 움직였다.
[손님을 제외하면 예상대로네요.]
[손님 중에는 여의보주의 친우이자 웅족의 후예인 아이가 있었다. 나쁘지 않아.]
[저번에 그 아이를 잘 이용했으면 여의보주를 손에 넣었을 텐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성탄절 전야에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어렵게 됐어.]
[여의보주는 교원 계약으로 약해져 있어야 하지 않나요?]
[착오가 있었나 봐. 하지만 운 좋게도 여의보주는 삿된 눈으로부터 학교와 학생들을 지킨다는 크나큰 소원을 빌어 약해졌잖아.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놓쳤어.]
[그 상황에서 후예를 사로잡아 인질로 삼았으면 잘 풀렸을 텐데요.]
힘으로 연결된 무녀들이 다중으로 전음을 주고받으며 한탄하자 유황이 최고참답게 부드러운 어조로 이들을 달랬다.
[이미 지난 일을 탓하는 건 그만하자꾸나.]
유황의 전음을 들은 이들이 조용해졌다.
유황은 다시 부드럽게 물었다.
[준열이 스케줄을 확인해 봤니?]
[……죄송해요. 알 수 없었어요. 누가 경호를 맡는지도 알아내지 못했어요.]
[저런.]
방송국 사건 이후로 염준열의 스케줄 관리가 더욱 철저해지고, 보안도 강화되었다.
게다가 경호로는 용족과 붉은 사자 팀원이 각각 붙어 용살의 신화를 가진 무기로 약점을 노린다는 작전을 시행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래도 오랜 기간 그들과 함께했기에 능력을 훤히 알아서 이름만 알면 대처법을 강구할 수 있을 텐데, 경호 담당은 늘 스케줄 직전에 무작위로 뽑아 알아내기 쉽지 않았다.
[함께한 시간이 짧아 정이 덜 든 준열이부터 보내 주려 했는데, 생각을 바꿔야겠구나. 슬픔을 덜어 주려 했거늘.]
[그러게요.]
유황은 비애에 젖은 전음을 날렸다.
다른 배신자도 애석하게 여기며 유황의 생각에 동조했다.
[먼저 용궁에 웅족의 후예가 왔다는 걸 알려야겠구나. 그자들은 벌써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전하겠습니다. 붉은 호랑이와 인간 하나가 갔다는 것도 전해 두지요.]
[용궁으로 간 용족들의 명단도요.]
그들이 전음을 주고받는 사이에도 청룡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유황의 시선 속 청룡은 등을 돌리고 염방열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용궁으로 이어지는 문을 두고 전음을 나누는 무녀들의 속내 따위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황은 안심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지만, 뭔가가 이상하단 말이지.’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유황의 감이 경고를 고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유황은 그자에게 보고할 내용에 몇 가지 사항을 추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보고할 내용을 정리한 후, 유황을 비롯한 배신자는 그자에게 건네받은 나비의 비늘 조각에 사념을 담은 후 부수었다.
흩어진 비늘 조각은 무녀들이 방출한 오색 채운에 섞여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