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49)
95. 도룡지기 (3)
파아아앗!
용족과 무녀들의 힘에 반응해서 용궁이 빛을 내는 걸까.
용들과 무녀들이 바다 밑에 서고, 황룡이 환영 인사를 마치자 용궁의 모든 것들이 빛을 발했다.
지상의 빛이 닿지 않아 밤처럼 새카맣던 심해가 용궁이 발하는 빛에 밝게 보였다.
잘 보이지 않았던 용궁의 경계 밖도 보일 정도였다.
‘산맥을 끼고 있는 용궁 안 못지않게 밖도 지세가 험하구나.’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빛 탓에 시선을 잠시 밖으로 돌리자 밖의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바다 밑은 수영장처럼 평평하지 않다는 게 실감이 났다.
경사가 급한 산줄기가 이어지는 능선.
땅 저편으로 이어진 것만 같은 해구.
심해 열수구가 있는지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물결.
용궁의 영향을 받아 오색으로 빛나는 암초.
감탄이 나올 만큼 환상적인 풍경이었으나 동시에 섬뜩해지기도 했다.
‘만약 용궁 주변의 결계가 무너지면, 이 심해 속에 내던져지게 되는 거야.’
낯설고 비현실적인 광경일수록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곳일 확률이 크다.
그리고 눈앞에는 배신자가 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낯선 곳에서 적을 상대하자니 긴장이 되었다.
체스 기사 시절에는 한국에서 치르는 경기가 많지 않아서 자주 이런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낯선 곳에서 혼자 싸우는 데에 익숙해져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간 아연해졌다.
‘체스 기사를 할 때에는 항상 그랬고, 이 세계에 갑자기 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플마고를 통해 접했다고 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선 이방인이었다.
이 세계에 막 왔을 때에는 언제나 낯선 곳에서 싸워야 했던 셈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은광고를 편안하게 여기고, 호랑이 저택에서 지내는 게 익숙해졌나 보다.
새삼 낯선 곳에서 싸운다는 게 긴장되다니.
얼마 전 명계에 간 적은 있지만, 싸우러 간 게 아니니까 이런 건 생각하지 못했다.
“……조의신 군?”
쓸데없는 생각에 잠긴 게 좀 길었나 보다.
김신록이 부르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김신록과 적호가 있었다.
적호의 뒤쪽에도 눈길을 주니 용제건이 눈에 들어왔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윤여랑이 탄성을 뱉으며 용궁을 돌아보는 것도 보였다.
그들을 보고 나니 긴장이 점차 사라졌다.
긴장이 사라졌다기보다는 긴장을 대신한 다른 감정이 속을 채운 기분이 들었다.
“바깥 구경을 하고 있었어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라 눈을 떼기 어렵네요.”
“……그렇습니까?”
적당히 변명을 하자 김신록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적호는 누구한테 재촉받기라도 한 것처럼 내게 뭐라고 말을 붙이려고 했는데, 그 전에 용궁의 빛이 은은한 수준으로 가라앉고 황룡이 입을 열었다.
“용궁이 그대들을 환영하고 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빛을 낼 정도지. 하지만 이래서야 눈이 아파 용궁에서 지내기 힘들겠구나.”
“눈가리개를 하고 있으면 안 아파.”
“용제건, 그야 너와 나는 아프지 않겠지.”
황룡은 용제건의 실없는 소리를 받아 줄 만큼 마음이 넓었다.
한편, 청룡은 전이를 위해 힘을 크게 소모한 데다 용제건의 저런 꼴을 보니 머리가 아픈 건지 말을 아꼈다.
눈이 따끔거리는 건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던 무녀 후보생들이 진정하자 황룡이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번 시험은 예전에 비해 길게 진행된다. 그러니 앞으로 머물기 편하도록 수시로 정돈할 생각이다.”
그 말은 손님들이 잘 지내도록 편의를 봐주겠다는 뜻처럼 들렸지만, 사정을 알고 있는 내게는 다르게 들렸다.
용제건의 예상대로 황룡은 용궁의 구조를 조작할 예정인 것 같다.
적호와 용제건이 용궁에 다녀온 후, 호랑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억을 바탕으로 그린 지도를 공개하며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용궁의 구조를 기억하는 대로 지도로 그려 왔습니다.
―황룡은 용궁의 구조를 조작할 수 있어. 구조가 바뀔 가능성이 있지. 외부자인 적호 씨가 방문했으니 반드시 재구성할 거야.
―새로 방의 개수를 늘리거나 복도의 길이를 조작하는 것도 가능한가?
―황룡의 힘만으로는 안 돼. 용궁의 구조가 아닌 규모를 바꾸려면 용왕신의 힘이 필요해.
―그러면 이 지도는 일종의 퍼즐 조각이라고 생각해야겠군요.
비유하자면 황룡은 용궁이라는 거대한 입체 퍼즐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퍼즐의 전체 크기와 규모를 바꾸는 것은 용왕신만이 가능하지만, 황룡은 퍼즐을 재조립해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즉, 시시각각 용궁은 모습을 바꿀 수 있다.
‘길치인 윤여랑에게 있어 최악의 조건이지.’
그에 반해 윤여랑의 암살을 획책한 무녀들은 용궁이라는 퍼즐 조각의 형태에 관한 이해가 깊었다.
그 탓에 윤여랑이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기는 더욱 곤란했다.
‘이번에 부른 용족들은 전부 용궁의 변화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고 했지.’
용족의 선별에는 주의를 기울였다.
양보하고 타협한 결과, 다섯 무녀를 감시하기 위해 다섯 용이 뽑혔다.
무녀 뒤에 서 있는 용족들은 눈이 아플 정도로 용궁이 빛을 내도 동요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늘은 전이하느라 피곤했을 테니 이만 쉬도록 하지. 내일은 환영의 연회를 열 생각이다. 참석을 기다리겠다.”
용궁의 체재자들과 손님들의 첫 대면은 그렇게 끝났다.
그 뒤로는 각자 체류할 궁으로 향했다.
나와 호랑이 손님들은 청룡궁으로.
지상에서 온 용족과 용왕신의 무녀들은 황룡궁으로.
무녀 후보생들은 적룡궁으로.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청룡궁에 왔는데, 청룡은 얼굴만 비춘 후 곧바로 황룡궁으로 향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푼다고 무녀들끼리 황룡궁으로 향했다.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내가 가서 지켜보겠다.”
“나도 갈까?”
“용제건, 청룡궁에 용이 하나 정도는 남아야 하지 않겠나. 손님에게 용궁의 구조에 관해 설명하도록.”
“의신이는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던데.”
용제건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도 청룡이 떠난 후, 제대로 설명했다.
한 번 들었던 것을 복습하는 셈이 되었지만, 복습의 횟수를 늘리는 건 나쁘지 않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운룡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해산물 요리를 대접해 왔다.
운룡이 구름 위에 끌고 온 음식을 두고 손짓, 발짓을 하며 뭐라고 설명을 했다.
물론 나는 용이 아니었기에 알아듣지 못했다.
“용궁의 무녀가 준비한 음식이래. 손님을 위해 힘썼나 봐.”
번역을 맡은 용제건의 설명이 그러했다.
김신록과 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투적이지만 정중한 어조로 감사 인사를 했다.
나도 호랑이들의 뒤에 이어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잘 받았다고 전해 주세요.”
우리가 상 앞에 자리를 잡자 운룡이 기대에 찬 얼굴로 바라봤다.
음식이 입에 맞는지 기대되나 보다.
운룡이 구름을 타고 둥둥 떠다니며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뚫어지게 바라봤다.
우리가 식기를 손에 들기 전에 용제건이 말했다.
“손님은 낯선 용이 있으면 먹기 어려울 거야. 대신 낯설지 않은 용인 내가 지켜봐 줄게.”
“…….”
김신록이 용제건의 말을 듣자 식욕이 떨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배려심이 넘치는 말 같기도 한데 용제건이 저 소리를 하니까 좀 그렇긴 했다.
운룡은 용제건의 입가와 눈가리개 쪽에 구름을 몇 번 던졌지만, 우리가 머뭇거리자 자리를 비웠다.
휘이이이…….
운룡이 청룡궁의 식당 밖으로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한 후.
용제건이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말했다.
“자, 그러면 즐겁게 식사해 볼까.”
용제건이 기대에 찬 얼굴로 밥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저녁 식사도, 다음 날 아침 식사도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맞이한 둘째 날.
황룡이 청룡궁에 머무는 손님들을 찾아왔다.
“황룡, 잘 잤어? 아침 인사를 하는 건 오랜만이네.”
“네 인사를 받는 건 오랜만이군, 용제건.”
“그러게. 그런데 황룡은 무녀 후보생들을 먼저 찾아갈 줄 알았는데, 우리 쪽에 왔네.”
“무녀 후보생들은 고단했는지 아직 쉬고 있다.”
우리보다 덜하다고 해도 무녀의 후보생들도 전이가 남긴 충격에 시달리나 보다.
다른 무녀 후보생들은 몰라도 윤여랑은 신나게 일어나서 용궁을 구경하고 다닐 것 같은데.
윤여랑에 관해 생각하고 있자니 황룡이 내게 말을 걸었다.
“멀미는 가라앉았느냐.”
황룡은 그 정신 없던 와중에도 나를 걱정했나 보다.
무녀 후보생을 제외하면 인간은 나뿐이니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을 거다.
“네, 배려해 주셔서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렇군. 용제건의 제자가 이렇게 우수하고 예의 바른 아이라니.”
“응, 우리 반 아이가 좀 착해.”
용제건의 제자!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리에 뭔가 무거운 게 치고 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일단 용제건이 부담임이니까 제자이기는 하다.
그런데 좀 그렇다.
이 말을 앞에서 듣는다면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미묘한 기분이 들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다.
‘어, 그럼 황지호도 용제건의 제자라고 봐야 하나?’
눈에 보일 리가 없는 황지호가 미묘한 표정을 짓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걸 직접 봤다면 즐거운 기분이 될 텐데 아쉬웠다.
용제건의 제자라는 말이 남긴 여파가 가라앉은 후에도 사사로운 대화와 안부 묻기가 이어졌다.
대체로 황룡의 질문은 김신록을 향했다.
그런 대화가 이어지고 중단되기를 몇 번 반복했을 때.
황룡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눈가리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구나.”
“……죄송합니다.”
김신록이 허둥지둥 시선을 떼었다.
용제건이 중간중간에 농담을 해 대도 비교적 침착하게 대응하던 김신록이 몹시 동요했다.
왜 김신록이 황룡의 눈가리개에 관심을 갖는지는 일목요연했다.
‘용제건의 것과 디자인이 흡사해. 그게 신경 쓰였나?’
신경 쓰이긴 해도 그 유래는 쉽게 짐작할 수 있어서 파 보지는 않았는데.
잠깐만 생각해도 알 수 있을 텐데 김신록은 왜 그게 궁금한 걸까.
‘아마 제작자가 같겠지. 제작자는 황룡이나 무녀일 텐데, 무녀가 만들어 줬다면 용제건이 진작에 다른 눈가리개를 착용했을 거야. 즉, 제작자는 황룡이다.’
황룡은 내가 예상한 대로의 말을 했다.
“이 눈가리개는 이전에 용제건이 네 아버지와 용궁에 방문했을 때 준 거란다.”
“……혹시 눈가리개를 만든 분은.”
“내가 직접 만들었다. 용제건이 신격을 쌓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거든.”
김신록은 그 말을 듣고 멍한 얼굴을 했다.
저 말에 예상하지 못한 정보가 있었나?
김신록이 뻣뻣하게 굳은 탓일까, 황룡이 저 말을 하자 주변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
황룡은 여전히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용제건이 신격을 쌓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되었지. 아마 그 시점은 먼 옛날, 어느 전투를 치렀을 땐데…….”
“황룡.”
용제건이 황룡의 말을 잘랐다.
용제건은 웃고만 있었고 황룡의 이름을 부른 것 외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딱히 용제건으로부터 위압감이 느껴지거나, 분위기가 기묘해질 만큼 딱딱하게 말을 자른 건 아닌데 그 뒤로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이만 가 봐야겠군. 지상에서 온 무녀들이 회포를 푼 후에는 백룡궁에 머물겠다고 했으니, 궁을 재정비해야겠지.”
황룡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룡은 떠나기 전, 말수가 부쩍 줄어든 호랑이 손님을 살피며 말했다.
“손님들이 내게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들을 수 있을 것 같진 않군. 시간은 며칠 더 있으니 기다리면 되겠는가.”
황룡은 내 속을 읽은 것 같은 말을 했다.
아니, 내 속이 아니라 손님들 속을 모두 읽은 것 같았다.
황룡은 용제건, 김신록에 이어 적호 쪽을 천천히 응시한 후, 마지막으로 내 쪽을 봤다.
“네,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황룡의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