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50)
95. 도룡지기 (4)
황룡이 물러간 후, 오후에는 남쪽에 있는 적룡궁을 방문하기로 했다.
적룡궁은 현재 무녀 후보생이 머무는 곳이다.
윤여랑이 있는 곳이니 은광고 신입생의 얼굴을 보러 왔다고 핑계를 대면 나는 물론이고 용제건, 김신록도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용제건은 뭘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니까 딱히 핑계를 댈 필요가 없겠지.’
알고는 있었지만, 용궁행 이후 용제건의 기행과 괴상한 발언이 잦았는데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황룡은 용제건을 마치 장난기 많은 남동생 취급하듯 다루었고 용족과 무녀들도 미지근한 시선을 보낼 뿐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족들은 승천을 앞둔 용제건이 미련이 없어 보여 서운해하는 기색이었다.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용제건이 이 정도로 현세의 삶을 즐기고 있는데 미련이 없을 리가.’
용제건은 태평하게 적룡궁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무슨 생각인 건지 적호에게도 권했다.
“적호 씨도 적룡궁에 갈래?”
“남쪽에 있는 궁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호한 위치군요. 어디에 눈이 있을지 모르니 청룡궁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아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적호는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적호는 이번에 활동 범위를 제한해 움직일 예정이기 때문에 저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아들을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할 때 용제건뿐만 아니라 나한테도 말한 것 같다.
적호가 김신록을 아주 어리게 취급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 어리게 보는 건 아니겠지?
용제건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히죽거리며 말했다.
“적호 씨 눈에는 신록이가 아주 어리게 보이나 봐. 그치, 신록아?”
“네가 나이를 많이 먹어서 그런 거겠지.”
황룡과 눈가리개에 관해 이야기한 후에는 도통 입을 열지 않던 김신록이었는데, 저 헛소리에는 한마디 했다.
물론, 용제건은 쉽게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렇네, 나도 적호 씨도 나이를 많이 먹었지.”
“적호 님은 너처럼 나이를 헛먹지 않았어.”
내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여기에 있는 모든 진족들과 후예의 나이가 몹시 많았다.
다 오천은 넘었을 테니 그게 그거일 것 같은데 유치하게 왜 나이 갖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저 유치한 싸움의 한편이 용제건이 아니라 다른 존재였다면 적호가 적뢰를 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플레이 이후부터 적호는 용제건을 몹시 유하게 대했으므로 주의를 주는 선에서 끝났다.
“용제건, 어린 아들을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네? 어리다니…….”
“알았어. 내가 과했어, 신록아. 미안해. 그럼 가자.”
김신록은 적호한테 어리다라는 말을 듣자 얼굴이 붉어졌다.
김신록은 그 상태로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한 용제건에게 질질 끌려갔다.
사과한 건 용제건인데 김신록이 패배한 것 같다.
작은 소란이 있었으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적룡궁으로 향했다.
각 궁을 눈에 익힐 겸, 동쪽에 있는 청룡궁에서 출발해 중앙에 있는 황룡궁을 거쳐 남쪽에 있는 적룡궁으로 향하기로 했다.
‘전래 동화에 등장하는 용궁 속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별천지라는 점은 마찬가지구나.’
청룡이 돌아온 덕에 그 힘의 영향을 받아 푸른 불꽃과 물줄기가 넘실거리는 청룡궁.
용궁을 관장하는 황룡이 머무는 궁답게 가장 넓고, 신비한 빛의 구름과 황룡의 권속인 운룡이 여럿 떠다니는 황룡궁.
그리고 승천한 적룡의 궁이지만, 무녀 후보생을 맞아 붉은 산호를 곳곳에 피게 한 적룡궁.
세 궁을 아직 세세히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대충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했다.
물론,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하면 관광하는 기분을 내긴 어려웠다.
“황룡궁과 적룡궁이 이어지는 길의 구조가 좀 바뀌었네.”
용제건이 용궁에서 제대로 된 소리를 한 건 오랜만인 것 같다.
용제건이 비행술로 하늘에서 용궁을 구경시켜 주었을 때 남았던 기억과 지금 보이는 광경을 비교해 나도 한마디 얹었다.
“오고 가기 편하게 정비되었네요.”
“앞으로도 다듬겠지. 황룡은 손님들이 정말 마음에 드나 봐. 내부 구조도 많이 바뀌었으려나.”
용궁의 변화 원리를 고려해 주변을 관찰하고 있을 때, 적룡궁의 정원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윤여랑을 제외한 무녀 후보생 두 명이었다.
“손님이 오시는 것 같아 맞이하러 나왔어요.”
“여랑이와 아는 분이셨죠? 여랑이는 적룡궁을 탐험하는 중이라 조금 시간이 걸릴 거예요.”
두 사람은 아직 용궁에 익숙해지지 않았을 텐데도 낯선 우리 일행을 정성껏 대접했다.
황룡이 후보생 세 명에게는 특별히 운룡을 하나씩 붙여 뒀기에 길 안내나 손님 접대 과정은 운룡이 맡았지만, 두 후보생들은 긴장한 와중에도 예의를 지켜 말 상대를 하려 애썼다.
운룡이 차와 과자를 대접하려 했으나 내가 만류했다.
“선물을 사 왔어요. 괜찮으면 같이 드실래요?”
나는 MITRON의 로고가 박힌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상자에는 케이크와 쿠키 등의 제과류와 음료가 들어 있었다.
MITRON에서는 캔 밀봉 방식으로 음료를 팔고 있어 내용물이 흐르는 일 없이 안전하게 가져올 수 있었다.
단 것을 싫어하지는 않는지 두 무녀 후보생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용궁에서는 지상의 음식을 접하기 어렵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선물로 준비해 왔어요.”
“여랑이는 아직 안 왔는데…….”
“넉넉하게 준비해 왔으니까 괜찮아요. 기다리는 동안 같이 먹죠. 그리고 다른 후보생분들과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두 무녀 후보생은 망설이긴 했지만, 내 말을 듣고 다과회에 참석했다.
입에 잘 맞았는지 두 무녀 후보생은 한입에 MITRON의 맛에 반했다.
“무녀님들이 주신 한과도 맛있었지만, 이건 정말…….”
“맛있네요, 감사합니다. 어디에서 산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 대답을 들은 두 사람이 디바이스 메모장을 켜 가게 정보를 메모했다.
용궁에서는 통신은 안 되어도 충전을 해 와서 오프라인 모드로 디바이스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 디바이스를 다루는 모습을 보니 무녀 후보생이 아니라 평범한 현대인으로 보였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두 사람 다 플레이어로 은광고가 아닌 플레이어 특목고 출신이라고 한다.
한 명은 올해 고3, 한 명은 졸업생이었다.
‘현직 무녀도 나이가 제각각이라고 했지. 후보생도 나이가 달랐구나.’
어느 정도 말을 튼 후에는 무녀 후보생에 관해 물었다.
두 명의 무녀 후보생들은 경계하는 일 없이 물어보는 것에 관해 대답했다.
첫 번째 무녀 후보생은 눈이 좋았다.
“사실 멀리서 오시는 걸 봤어요. 그래서 기다리는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죠.”
첫 번째 무녀 후보생은 그 말을 하면서 우리가 이동한 루트를 정확히 짚어 냈다.
황룡궁의 구름 사이를 헤치고 왔기에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그걸 꿰뚫어 볼 만큼 눈이 좋은 듯했다.
두 번째 무녀 후보생은 귀가 밝았다.
“오시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귀를 기울였어요. 세 분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려 했는데, 대화하는 내용도 듣고 말았어요, 죄송해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던 데다 적룡궁 안에 있었는데도 두 번째 무녀 후보생은 발소리와 말소리를 들은 듯했다.
먼 거리는 귀를 기울여 집중해야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긴 했으나 그래도 훌륭했다.
무녀 후보생은 황룡이 황룡궁과 적룡궁이 이어지는 길 사이를 정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플마고 속에서 본 둘에 관해 생각했다.
‘플마고 속에서는 용왕신의 진위 여부를 구분하지도 못하는 무녀 후보생이라는 인상이 있었어. 하지만 실제로 보니 자질은 나쁘지 않아.’
‘엄청 뛰어나다’라는 말은 할 수 없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사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둘보다 뛰어난 청소년 플레이어들은 얼마든지 있다.
둘은 눈과 귀를 활용하는 이능이 있었으나, 장남욱의 ‘별 처녀의 눈’이나 문새론의 ‘엿듣는 천이통(天耳通)’에는 미치지 못했다.
아마 주수혁이나 안다인의 감각, 이능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용왕신은 두 사람을 무녀 후보생으로 택했다.
‘단순히 우수한 플레이어인 것뿐만 아니라 용왕신과의 소통 능력, 용과의 궁합 등도 중요한 걸까.’
그런 걸로 따지면 윤여랑이 최고일 거다.
만나기 전부터 용왕신을 꿈에서 볼 정도니까.
두 사람과 대화를 하며 용왕신의 선택 기준에 관해 한창 추측하고 있을 때였다.
포크를 내려 둔 두 사람이 말했다.
“너무 맛있어서 과식할 뻔했어요. 여랑이 몫을 남겨 놨어야 했는데…….”
“여랑이는 이곳에서 와서 한 끼도 안 먹었거든요. 과자는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윤여랑이 한 끼도 먹지 않았다는 말에 용제건이 웃으며 물었다.
“그래? 용궁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대?”
“네, 그런가 봐요. 그냥 손이 가지 않는대요.”
“그렇구나. 두 사람은 어땠어?”
용제건의 질문에 두 사람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가 보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사실 나도 먹고 싶은 것만 먹거든. 신록이도 좋아하는 음식이 따로 있고…….”
애꿎은 곶감 애호가 김신록이 끌려 나왔다.
김신록은 용제건의 눈가리개에 압핀을 꽂아 넣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대화의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무녀 후보생들은 몹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사실 저는 해산물이 별로 입에 맞지 않아서…… 아, 그래도 몇 입 먹었어요.”
“딱히 가리는 건 없는데, 긴장해서 그런지 손이 잘 안 가서요.”
둘은 먹긴 먹었지만, 손이 잘 가지 않았나 보다.
큰 시험을 앞두고 입이 짧아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용제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가 고팠겠네. 아직 선물용 과자는 넉넉하게 있으니까 더 먹어 둬.”
“아, 감사합니다……!”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됐지만 용제건의 짓궂은 모습을 여러 번 봤을 무녀들은 의외로 친절한 유희계 용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윤여랑은 대체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 건지 시간이 꽤 흘러도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을 잡고 온 게 아니니 윤여랑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황룡이 준비한 환영의 연회 시간이 가까워졌다.
용제건이 걱정하는 무녀 후보생에게 말했다.
“옆에 운룡이 붙어 있으니 시간이 되면 데려올 거야. 우리는 먼저 갈까? 늦는 사람이 너무 많으면 황룡이 서운해할 거야.”
그렇게 우리는 윤여랑보다 한발 앞서서 황룡궁으로 향했다.
환영의 의미가 담긴 연회가 열린 곳은 황룡궁 내에 존재하는 누정(樓亭), 황린정(黃鱗亭)이었다.
황룡궁 내에는 거대한 정원이 있었고, 그 안에는 호수와 높게 세운 황린정이 있었다.
구름 위로 솟은 황린정에는 벽이 없고 지붕과 기둥만이 있었기에 호수와 용궁의 절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연회를 열고 분위기를 고조시키기에는 최고의 장소였다.
“어서 오거라. 이제 무녀 후보생 한 명만 오면 되겠구나.”
황룡이 우리를 맞이하며 운룡에게 자리를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운룡을 따라 황린정에 오르니 이미 자리가 거의 다 차 있었다.
적호는 청룡궁이 조금 보이는 동쪽에 자리 잡았고, 청룡을 비롯한 용족들도 그 주변에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준열이가…….”
“우리 아들은…….”
청룡과 적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뭔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팔불출의 자랑 대회가 열리는 중인가 보다.
적호는 용족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염준열과 달리 김신록은 현재 용궁에 있었기에 자랑이 수월한 듯했다.
용제건이 거리를 두려는 김신록을 잡아 그 자랑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으려 했을 때였다.
“모든 초대객이 도착한 것 같구나.”
황룡의 말과 함께 윤여랑이 등장했다.
윤여랑은 온갖 곳을 탐험하고 온 건지 여러 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긴 했지만 옷 한구석이 구겨져 있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마지막인가요? 늦은 건 아니죠?”
활기차게 말하는 윤여랑 옆에는 실컷 끌려다닌 탓에 지쳐 보이는 운룡이 있었다.
운룡 외에도 윤여랑에게 끌려다닌 이가 있었는지, 지친 기색의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저자는 용궁의 무녀 중 하나 아닌가.’
윤여랑 뒤에는 황색의 면사를 착용한 용궁의 무녀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