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51)
95. 도룡지기 (5)
“늦지 않았다. 용궁 구경을 하다 온 모양이구나.”
“네! 용궁이 너무 멋지고 용궁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진짜 좋아서 좀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후보생이 용궁을 마음에 들어 하다니 기쁜 일이로다. 어서 앉거라. 연회를 시작하고 싶구나.”
황룡이 밝게 인사하는 윤여랑을 반겼다.
황룡을 상대로도 저렇게 구김 없이 말을 하니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을 거다.
자리를 잡은 무녀 후보생들이 윤여랑에게 이리 오라며 손을 흔들자, 윤여랑이 자리를 뜨려던 용궁의 무녀에게 물었다.
“언니, 언니도 이쪽에 앉으실래요?”
“내가 왜 너랑…… 아니, 사, 사양하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모르겠지만, 윤여랑의 용궁 탐험에 휘말려 꽤 시달렸나 보다.
용궁의 무녀가 울컥한 목소리로 답하다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 같이 얼굴을 가리고 손님 앞에선 정중한 태도를 보이는 무녀들만 봐서 그런 건지, 조금이나마 본색을 드러낸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윤여랑에게서 멀어진 무녀는 같은 황색의 면사를 착용한 용궁의 무녀 무리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합류했지만 무녀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저렇게 등장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법도 하지 않나?’
윤여랑이 자리에 앉자 질문을 쏟아 내는 무녀 후보생 그룹처럼 말이다.
용궁의 무녀들은 용왕신의 무녀들에 비해 말수가 적긴 했으나 반응이 지나치게 정적이었다.
저 용궁의 무녀가 합류하고 나서 분위기가 더욱 냉랭해진 것 같기도 했다.
아직 관찰이 부족해 결론을 내리긴 어렵지만, 어느 정도 상상은 갔다.
‘용궁의 무녀들은 아주 오랫동안 고여 있는 물 같은 집단이야. 오래 묵은 알력 싸움이나 갈등이 존재하겠지.’
어쩌면 윤여랑에게 휘둘린 무녀는 용궁의 무녀들 사이에 잘 섞이지 못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용궁의 무녀들이 모두 배신에 가담했다고 쳐도 저 인원으로는 용족이나 호족들을 감시하기에도 바쁠 텐데, 어린 인간에 불과한 윤여랑에게 긴 시간을 낭비하는 건 이상했다.
윤여랑에게 휘둘린 용궁의 무녀가 배신자라면, 배신자 중에서도 따돌려지는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아예 배신자 그룹에조차 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의신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아마도요.”
높은 신격 덕에 시야가 훤한 용제건이 내 시선을 읽고선 소곤거렸다.
용궁의 무녀들을 관찰한다고 해도 절대 직접 시선을 주지 않고 물그릇에 비치거나 은잔에 반사된 모습을 보았을 뿐인데, 눈치가 귀신 같았다.
“내가 잘 보고 있을게.”
내 방식으로 지켜보는 건 한계가 있으니 잘됐다.
용궁의 무녀들 관찰은 용제건에게 맡기기로 했다.
참고로 이 와중에도 적호와 청룡의 후예 자랑이 멈추지 않았기에 김신록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적진에서 팔불출짓을 하는 건 권장할 만한 건 아니었으나 저 모습을 보면 ‘배신자의 존재를 눈치채고 작전을 수립하고 실행 중인 유수한 역사를 지닌 진족들’을 연상하기 어려웠기에 내버려 두기로 했다.
손님들이 모두 앉고, 부지런히 움직이던 운룡들이 자리를 정비하는 것을 마쳤을 때, 황룡이 황린정의 중심에 섰다.
“귀한 손님을 맞아 용궁을 찾은 무녀들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한다. 현재 유황의 이름을 받은 무녀의 노래를 듣는 건 이게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나도, 손님들도 운이 좋군.”
황룡은 모든 손님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몇 걸음 걸으며 말했다.
아직 배신에 관해 전해 듣지 못한 황룡의 자상한 눈빛과 목소리에서는 기쁨과 반가움 외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황룡이 말을 마치고 한발 물러나자 황색의 구름이 피어올랐다.
황색의 구름은 곧 뒤이어 떠오른 오색 채운에 가려졌다.
곧 황룡과 황색의 구름은 사라지고 유황, 녹, 벽, 자, 홍의 구름이 이를 대신했다.
구름 속에서 무녀들이 걸어 나왔다.
유황이 첫 소절을 부르자 은은한 이능파가 솟아올랐다.
‘저번에 들었던 노래와 다르네.’
처음으로 붉은 사자 팀 빌딩에 방문했을 때, 무녀들이 노래로 용왕신의 힘을 빌려 나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목적이 다르니 노래가 다를 것이다.
유황이 몇 소절 독창한 후, 다른 무녀들도 이어서 노래를 연창했다.
용왕신의 무녀들이 부르는 노래에 맞춰 채운이 피어오르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순수하게 즐겼을 것이다.
“와아…… 저 이능파가 용왕신께 닿는 걸까요.”
“아름다운 소리예요. 귀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어요.”
노래가 끝나자 무녀 후보생들이 감동하여 박수를 연신 쳤다.
용족도, 호족도 표정을 감추고 웃는 얼굴로 그들의 노래를 칭찬하였다.
용족과 손님들을 대표해 청룡이 그들을 칭찬하는 말을 했다.
“훌륭하구나. 용왕신께서도 이 노래를 직접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냥 듣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말이었으나 뼈가 있는 말이었다.
청룡은 용왕신의 부재가 무녀들의 수작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유황색의 면사를 쓴 유황이 청룡의 말에 답변했다.
“과찬입니다. 용왕신께서도 저희의 노래를 듣고 있겠지요. 모습을 볼 수 없어도 늘 용족분들과 저희와 함께하시니까요.”
용왕신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겸허한 저 말에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말을 들을수록 머릿속이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저 말을 듣는 청룡의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속은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무녀들의 노래가 끝나자 나타난 황룡은 둘의 대화를 흐뭇해하며 지켜보다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늘 용왕신께서 함께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 분명 너희의 노래를 듣고 기뻐하셨을 거다.”
“그랬다면 좋겠군.”
“청룡, 용왕신을 뵙지 못해 서운한 건가. 시험이 시작되면 반드시 나타나실 거다. 손님을 위해 오래도록 밀봉해 둔 술을 개봉하려 한다. 잔을 교환하고 싶구나.”
황룡은 청룡의 속도 모른 채로 술을 권했다.
황룡은 손님을 위해 눈앞에서 숙성한 술을 열었고, 청룡은 그 술을 기꺼이 받았다.
이를 시작으로 미성년자를 제외한 이들이 술을 주고받았다.
직접 마시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감상들을 요약하면 독하고 맛있는 술로 추정되었다.
미성년자인 무녀 후보생들과 나는 알코올이 없는 음료를 제공받았다.
“용왕신께서 저 노래를……?”
무녀들의 노래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록 멍하니 있던 윤여랑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혼잣말은 금방 연회 분위기에 파묻혔지만, 내 기억 속에는 남았다.
‘용궁에 길게 체재하며 정보를 얻는 건 우리 쪽뿐만이 아닌 것 같네. 윤여랑도 플마고 때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있는 걸까.’
플마고 속 무녀의 시험에서는 연회가 열리지 않았다.
황룡은 지금보다 말수가 적었고 여유가 없었다.
용제건의 장례식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황룡이 연회를 열 리가 없었다.
윤여랑이 용궁 탐험을 할 시간도 없었고, 시간이 있다 해도 황룡이 허락할 가능성이 적었다.
용궁이 그런 분위기이니 용왕신을 꿈에서 볼 정도로 뛰어난 후보생일지라도 윤여랑이 얻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손님들이 준비한 음식도 있었군. 대체 언제 준비한 건가? 맛을 보아도 되겠는가?”
“물론이네, 황룡. 육지의 음식을 맛볼 기회가 적지 않았는가. 우리도 자네를 대접하고 싶군.”
이 자리는 황룡이 손님을 대접하는 자리었지만, 연회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에는 손님들도 연회 준비에 가담했다.
청룡이 데리고 온 다섯 용 중에 요리 실력이 뛰어난 자가 있어 용궁에만 있던 이들을 위해 솜씨를 발휘했다.
또한, 염준열의 라이브 드래곤 쇼의 퍼포먼스를 지도했다는 용족이 쇼를 재현하기도 했다.
“영상으로 본 준열이의 홍룡이 떠오르는구나. 준열이가 많이 성장했더군. 너희의 가르침 덕이 크겠지.”
용족들이 준비한 것을 두고 황룡이 크게 기뻐했다.
따져 보면 연회 준비 과정의 대부분은 운룡이 했는데도 황룡은 기쁨과 감사를 아낌없이 표현했다.
“환영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이거늘. 오히려 내가 대접을 받고 말았구나.”
술기운인지 기쁨 탓인지 황룡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갑자기 황룡의 손에 구름이 피어오르더니 구름 속에서 피리가 나타났다.
흑요석을 깎아 만든 듯한 검은 피리였다.
피리를 본 청룡이 놀라며 물었다.
“황룡, 자네 설마 연주할 생각인가?”
“그렇네. 답례로 한 곡 연주하마.”
황룡이 연주하는 건 드문 일인지, 용족들은 하나같이 놀랐다.
떠들썩하던 황린정은 황룡이 피리를 입가에 가져가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든 운룡도 움직임을 멈추고 황룡을 주시했다.
‘다정한 음색이다.’
황룡이 연주한 건 처음 무녀들이 불렀던 노래였다.
기교와 연출 등을 따지면 무녀들의 노래 쪽이 더 훌륭했겠지만, 나는 황룡의 연주가 더 좋았다.
청룡도 나와 같은 생각인 건지 무녀들을 칭찬할 때에 비해 더 감정을 풍부하게 담아 발언했다.
“멋진 연주였다.”
“흑룡에 비하면 전혀 미치지 못한다만.”
“나는 그 매정한 용의 연주보다 자네 연주가 더 좋네. 그 용이 승천한 후에 자네가 도통 연주를 하지 않아 아쉬웠지.”
황룡에게 피리를 가르쳐 준 건 승천한 흑룡이었다고 한다.
흑룡은 승천하기 전에 자신이 쓰던 피리를 황룡에게 남겼다는데, 저 흑요석 피리가 흑룡이 남긴 것이었나 보다.
‘흑룡이 승천한 후에는 계속 연주하지 않았던 건가.’
어느덧 모두가 나누는 대화의 중심은 승천한 흑룡이 되었다.
대화를 나누는 건 보통 청룡과 황룡이었지만, 초반에 황룡이 연회 분위기를 제대로 잡아 주었기에 누구나 쉽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던지는 이 중에는 용궁 탐험에 관심이 많은 윤여랑도 있었다.
“흑룡궁을 사용하시는 분이 없던데요.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황룡의 시선이 북쪽의 흑룡궁으로 향했다.
흑룡궁에는 흑룡의 영향으로 검은 이능파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황룡궁이 지나치게 밝은 탓일까.
그저 어두워 보였다.
“흑룡은 냉기를 관장하기에 흑룡궁은 그 영향을 받아 몹시 춥기 때문이지. 심해는 추운 곳 아니더냐.”
오방색 중 검은색은 북쪽을 상징한다.
그리고 북방의 상징물, 관념 등에는 보통 추위와 겨울이 포함된다.
사수(四獸) 중 북과 검은색을 상징하는 현무도 냉기를 다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고 보니 현무의 거처도 꽤 서늘했지.’
현무와 만난 건 여름방학이다.
한창 더운 여름에 방문했기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한겨울에 가면 좀 추울지도 모르겠다.
황룡은 흑룡궁을 응시하며 말했다.
“흑룡은 추위를 타지 않아 늘 냉기를 뿌려 댔지. 물을 다루는 덕에 냉기에 내성이 있는 청룡이라면 모를까, 다들 흑룡궁에 발을 디디는 것을 꺼려 했다.”
“나도 딱히 내켜서 방문한 건 아닐세.”
청룡은 툴툴대며 말하긴 했지만 황룡 못지않게 그리움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황룡이 흑룡궁에서 눈을 뗐다.
시선이 향한 곳은 호족 쪽이었다.
“흑룡 하니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황룡은 적호를 보고 있었다.
“호족 중에 색을 상징하는 호랑이들이 있지. 황호, 백호, 적호, 청호가 그러하지 않더냐.”
“은호도 있습니다.”
“그래,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황, 백, 적, 청이 있는데 흑은 없는지 궁금한 거다.”
오방색은 다섯 기운 오행을 상징하는 색이다.
중앙의 황색, 서쪽의 백색, 남쪽의 적색, 동쪽의 청색 그리고 북쪽의 흑색.
용궁의 다섯 궁도 이 오방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족의 경우, 저 오방색 중 네 개의 색을 상징하는 호랑이가 있다.
황호, 백호, 적호, 청호가 그러하다.
흑룡의 이야기 중에 갑자기 저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하나일 거다.
이윽고 적호가 황룡의 뜻을 헤아리고 물었다.
“호족 중에 흑호가 없는지 묻고 계신 겁니까?”
“그렇다.”
황룡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