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52)
95. 도룡지기 (6)
흑색, 검은색은 오방색 중의 하나다.
오방색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신화나 전설 속에서도 검은색을 상징하는 존재들은 자주 등장한다.
그러니 검은색을 상징하는 호족이 없는지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검은색 이능파는 드물다고는 하지만 없는 것도 아니고, 진족 중에서도 많은 건 아니지만 검은색을 상징하는 이들이 꽤 있지.’
나만 해도 검은색 이능파를 사용하지 않는가.
내 주변에 검은 이능파를 사용하는 인물이 많지는 않지만, 없는 건 아니었다.
프로 플레이어 중에서는 흑림의 검성이 있고 진족 중에서는 흑마가 있다.
자타 공인 유명한 디자이너 서돌의 말에 의하면, 검은색에도 종류가 있어 다 똑같은 검은색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와 저들의 이능파는 검은색이다.
‘하지만 흑호에 관해 들어 본 적은 없어.’
흑호의 존재 여부.
오방색 개념에 관해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법하지만, 나는 그동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인간도, 진족도, 호족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알고 있는 한, 흑호는 없습니다.”
예상대로 적호가 딱 잘라 단언했다.
적호가 이어서 그 이유를 말했다.
“진족 모두가 오방색을 상징하는 이를 갖추진 않았습니다. 흑마가 수장을 맡고 있는 마족(馬族)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진족이 오방색을 상징하는 이를 갖춘 건 아니었다.
적호의 말대로 마족은 오방색을 갖추지 못한 진족 중 하나다.
청마와 백마는 있지만, 황마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황룡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안다. 하지만 마족은 서방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많지 않더냐. 수장인 흑마만 해도 유럽 쪽 말의 여신 에포나를 따르고 있다. 말 사이에는 오방색의 관념이나 상징성이 옅지.”
“토족은 한반도에 터를 잡은 지 오래되었고, 지금도 월궁의 항아를 따르지만 그들 역시 오방색을 상징하는 이들을 모두 갖추지 못했습니다.”
적호는 사례로 토족을 들었다.
백토와 흑토는 몰라도 청토와 황토는 없는 걸로 안다.
처음부터 토족을 사례로 들었으면 이야기가 빨랐을 텐데, 여전히 옥토연에 대한 사감 때문에 늦게 언급한 것 같다.
황룡은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어 보였지만, 적호의 말에 잘못된 점이 없었기에 더 이상 반론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호족 중에 흑호는 정녕 없는 것 같군. 다른 호랑이도 반론을 꺼내지 않는 걸 보니 말이다.”
황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랑이 손님들이 앉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흑호 얘기가 끝날 것 같았는데 황룡이 말을 더 얹었다.
“만약 흑호가 있다면 악기를 연주하는 데에 능하고, 냉기를 다룰지도 모르겠다. 현무나 흑룡처럼 말이다.”
“그렇습니까? 동일한 색을 상징한다고 해서 닮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당신과 황호는 그리 닮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황호와 나는 통하는 구석이 있을 것 같다만. 참고로 내가 봤을 때, 자네는 적룡과 비슷한 점이 있다.”
적호가 저렇게 말하긴 했지만, 내가 봤을 때에는 황룡과 황지호 사이에 닮은 점이 있는 것 같다.
친우가 다 자리를 비워도 홀로 남아 의무를 다한다는 점이 그러했다.
황지호와 달리 황룡은 태만해지지 않았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럼 청호와 청룡도 닮았을까?’
황지호와 독고미로 사이에 낀 채로 입을 다문 한이와 지금도 틈만 나면 염준열 자랑을 하는 청룡 사이에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였다.
후예 팔불출 청룡과 신인을 몹시 따르는 청호를 떠올리면 조금 비슷한 점이 있긴 하다.
흑룡에 관한 화제를 꺼낸 탓에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이 자리에는 없는 용에 관한 것들이 되었다.
승천했다고는 하나 용궁 내의 흑룡, 백룡, 적룡의 영향력은 상당했기에 새겨들었다.
“오랜 시간 붙잡아 둬서 미안하군. 연회는 여기까지다. 남은 체재 기간이 좋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
심해의 용궁에서는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았으나 체감상 늦은 시각이 되었을 무렵.
황룡이 연회의 끝을 선언했다.
초대객들은 자리를 뜨며 황룡에게 인사를 남겼다.
호랑이 손님들은 모두 황린정을 내려갈 준비를 하는데, 용제건은 그 자리에 남았다.
“나는 황룡이랑 좀 이야기하다가 갈게.”
“그러든가.”
“길 잃으면 돌아와. 바래다줄게.”
“길 안 잃어.”
“황린정에 올 때 잘못 갈 뻔했잖아.”
“…….”
용제건은 꾸준히 김신록을 약 올렸다.
저런 용제건을 상대해 주는 김신록이 대단해 보였다.
용제건의 저 꼴을 보면 딱히 중요한 얘기를 할 것 같진 않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더 미루긴 어렵겠지.’
용제건은 이 자리에 남아 무녀들의 배신에 관해 전할 생각인 거다.
무녀들은 황룡의 운룡과 함께 연회의 정리에 힘쓰고 있으니 지금이 적기였다.
연회로 기분이 들뜬 황룡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황린정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건 좋지 않을 거야.’
황린정에는 연회의 여운이 남아 있기도 하고,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나는 자리를 뜨기 전 용제건에게 말했다.
“용제건 선생님, 이야기를 하실 거면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
용제건이 웃으며 말했다.
독한 술 탓에 술 냄새가 조금 나는데도 웃는 얼굴은 평소 같았다.
어쩌면 용제건의 정신은 취했을 때와 안 취했을 때가 별로 차이가 안 나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황린정을 바삐 오가는 운룡과 용궁의 무녀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연회장을 정리하느라 바빠 보여서요. 그리고…….”
시선을 돌려 구름 사이로 보이는 누정 밖을 바라봤다.
황린정 앞에 펼쳐진 호수.
호수변에는 옥같이 고운 풀과 구슬같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었다.
꽃들은 영기를 머금고 있었고 꽃 위로 나비들이 느리게 떠다녔다.
산맥 사이로 불어온 바람에 호수의 수면이 흔들리고 나비들은 꽃잎 위에 앉아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 광경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바람이 차서요.”
* * *
흑룡궁 앞.
얼음으로 덮인 정원을 지나 황룡과 용제건은 흑룡궁의 문 앞에 도달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은 두 용이 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열렸다.
흑룡궁을 관리하던 운룡은 두 용의 방문을 몹시 반겼다.
운룡은 추운 건지 몸에 구름을 둘둘 두르고 어두운 흑룡궁 안을 안내했다.
“흑룡궁을 계속 비워 뒀나 보네. 무녀들도 여기는 잘 안 오나 봐.”
“이곳은 춥지 않더냐. 그리고 흑룡의 검은색은 무녀들과 궁합이 별로 좋지 않다.”
“검은색은 모든 색의 빛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으니까?”
“그렇다. 채운을 다루는 무녀들과는 맞지 않지.”
운룡이 흑룡궁에서 그나마 덜 추운 방을 골라 안내를 마쳤다.
용제건이 좀 추운 정도로 몸에 이상이 생길 리가 없지만 운룡은 황룡의 영향을 받아 걱정이 많았다.
운룡은 부산을 떨며 용무늬가 그려진 화로에 불을 붙였고, 황룡과 용제건은 검게 옻칠이 된 의자에 마주 앉았다.
“황룡,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
“너와 하는 이야기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 이곳까지 나를 불러내고, 안내하려던 무녀까지 물리지 않았느냐. 몹시 중요한 말을 할 예정이겠지.”
“왜 그렇게 생각해? 별말 아닐 수도 있어.”
용제건은 속내를 숨기며 말했다.
황룡과 흑룡궁으로 향할 때, 용궁의 무녀 중 하나가 길 안내를 자처하며 따라오려 했었다.
용제건은 황룡과 둘이서만 대화하고 싶다며 그 안내를 거절했다.
무녀는 흑룡궁의 정비가 덜 되었다며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황룡이 용제건의 말에 힘을 실어 줬다.
―용제건은 승천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니 무슨 떼를 써도 받아 주고 싶구나.
승천이라는 말을 들은 후에야 무녀가 물러났다.
용제건은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으나 끈질기게 굴었던 무녀와 그 무녀가 어울리는 집단을 눈에 새겼다.
‘저 무녀는 기억해 둬야겠네.’
조의신은 용궁의 무녀 사이에 파벌이 있어 배신자와 배신하지 않은 자로 갈렸을 가능성을 상정하는 것 같았다.
용제건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모든 무녀가 배신자일 리가 없다는 바람 탓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알아봐서 나쁠 것은 없었다.
“네 제자는 바람이 차다고 걱정했거늘, 가장 추운 궁으로 오지 않았느냐. 당연히 중요한 이야기겠지.”
황룡은 다정하게 말했다.
잘 보니 운룡이 준비한 화로는 황룡보다 용제건 쪽에 더 가까이 있었다.
작은 것에서부터 용제건을 생각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황룡은 정이 많아. 그래서 탈락자인 무녀들도 전부 거두고, 승천 대신 용궁을 지키는 것을 택했지.’
눈가리개를 해도 훤히 보이는 시야 속에 다정한 얼굴을 한 황룡이 있었다.
용제건은 답지 않게 배신자에 관한 화두를 꺼내는 것을 망설였다.
황룡은 용제건이 말하길 조금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승천에 관해 상담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구나.”
“……왜 그렇게 생각해?”
“너는 승천에 관해 가벼이 말하지 않았느냐. 네 호랑이 친구 앞에서도 쉽게 말했으니 내 앞이면 더 쉽겠지.”
황룡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용제건을 대신해서 말했다.
“손님들이 우리가 준비한 음식에 손을 거의 대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느냐?”
“알고 있었어?”
“내 시야는 너보다도 더 넓다, 용제건. 무녀들의 눈을 피해도 내 눈까지는 속일 수는 없다.”
용족들은 황룡의 눈까지 속일 작정이었는데, 먹히지 않은 것 같았다.
황룡은 동생의 서툰 장난질을 눈치챈 형처럼 다정히 말했다.
“황룡궁에 머문 청룡과 다른 용족들을 잘 살펴보았다. 그들은 직접 마련한 음식은 잘 먹지만, 무녀들이 준비한 음식을 먹을 때에는 몹시 신중하더구나.”
조의신은 사전에 용궁에서 취식을 신중하게 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요리에 능한 용족을 택했고, 이유를 붙여 직접 음식을 마련했다.
무녀들 앞에서 음식을 먹지 않는 건 눈에 띄므로 속이는 법도 연습했다.
입속에서 이능파로 음식을 감싸 삼키고, 나중에 토하거나 그대로 소멸시키는 게 그러했다.
무녀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으나 황룡은 이를 꿰뚫어 본 듯했다.
“사실 무녀들이 서운해할까 봐 너희를 좀 돕기도 했단다. 운룡이 그릇을 정리할 때 눈속임을 하게 시켰다.”
황룡이 그것을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빨랐다.
용제건은 망설이는 것을 그만두고, 사실을 고하기로 했다.
파앗!
용제건은 공간의 결계를 전개한 후, 입을 열었다.
“그럼 바로 말할게. 황룡, 무녀들 중에 배신자가 있어. 그들은 용왕신을 저버리고, 나와 준열이를 죽이려 했지.”
용제건의 말을 들은 황룡의 입꼬리가 조금 떨렸다.
긴 세월 알고 지냈지만, 용제건은 황룡의 표정이 흔들리는 건 처음 보았다.
황룡은 용제건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으나 바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청룡궁에 온 손님 중에 용족의 은인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물론이다.”
황룡은 용제건과 염준열이 조의신에게 목숨 빚을 진 것을 알고 있었다.
용제건이 조의신에게 줄 선물을 찾는다는 말에 귀한 흑진주를 바로 내줄 정도였다.
하지만 황룡은 조의신이 은인이 된 사건 배경에 무녀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용제건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 아이의 제안으로 무녀들이 우리에게 내준 음식들을 조사했어.”
조의신은 플마고 속의 윤여랑이 용궁에서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금식을 제안했다.
그 결과, 청룡궁에 머무르는 이들은 무녀들이 내온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들은 식사 시간에 지상에서 가져온 음식을 먹고, 무녀들이 내온 음식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지난 저녁과 아침, 그들은 분석을 마쳤다.
“그 안에는 비늘을 잘게 간 가루가 들어 있었어. 용의 비늘과 매우 흡사했지만, 달랐지.”
굳어 있는 황룡을 향해 용제건이 말했다.
“용족의 은인은 그게 ‘이무기의 비늘’이라고 생각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