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53)
95. 도룡지기 (7)
윤여랑은 꿈에서 용왕신과 만난 후, 인생 최고로 행복하고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용왕신과의 대화가 즐거웠기 때문이다.
용왕신이 매일 꿈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나오더라도 윤여랑이 오래 버티지 못하는 바람에 긴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래도 윤여랑은 멋지면서도 아름답고 친절한 용왕신과 만나는 게 즐거워 견딜 수 없었다.
‘이분의 무녀가 되면 더 자주 뵐 수 있겠지? 언젠가 용왕신님을 상징하는 제의 기구를 소환하고 싶어!’
윤여랑은 꿈에서 본 용왕신을 생각하며 제의 기구를 소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재 윤여랑의 실력으로는 용왕신의 위엄을 담은 제의 기구를 불러내는 건 불가능했다.
무녀 후보생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을 당시 만났던 청룡의 모습을 바탕으로 한 일월청룡선(日月靑龍扇)을 불러내지도 못한 상태였기에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윤여랑은 매일같이 수련에 매진했지만, 실 장식이 추가된 구리 방울을 겨우 불러내는 게 고작이었다.
“이번에 불러낸 구리 방울에는 청실하고 홍실 장식이 추가되어 있긴 했는데요. 매듭이 좀 엉성하더라고요. 이래서야 언제 무선(巫扇)을 소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꿈속에서 용왕신을 만난 윤여랑은 하루 일과에 관해 재잘거렸다.
용왕신은 말수가 적어 늘 이렇게 윤여랑이 혼자 떠들곤 했다.
윤여랑은 용왕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 주는 것도 좋아했지만, 용왕신의 웅장하고 멋있는 목소리를 듣는 건 더욱 좋아했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용왕신님은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 참고 계신 것 같아요. 기다리면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제가 정식 무녀가 되어야 하나요?”
윤여랑의 말을 들은 용왕신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망설이고 있단다.]
용왕신의 음성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윤여랑의 마음이 덩달아 무겁고 슬퍼질 정도였다.
[너는 비밀을 갖기 어려운 솔직한 아이다. 내가 전하는 진실은 너를 죽음으로 몰아가겠지.]
용왕신이 거짓을 말하거나 사실을 과장해 전할 것 같지 않았다.
즉, 용왕신은 죽음으로 직결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진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용왕신님은 아주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게 아닐까?’
윤여랑은 당장이라도 그 진실에 관해 듣고 싶지만 묻지 못했다.
용왕신이 윤여랑의 꿈에 등장하긴 했지만, 광림으로 이어진 것도 아니고 가호를 받은 것도 아니며 윤여랑이 정식 무녀가 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용왕신을 위해서라도 묻기 어려웠다.
‘나한테 무녀의 소질이 있다고 해도 용왕신님이 상위 존재인 이상 한계가 있어. 나한테 정보를 많이 제공하거나 힘을 내리려 하면 용왕신님이 위험해지실지도 몰라.’
상위 존재가 현세에 간섭하는 건 상당한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는 행위였다.
그저 모습만 드러내는 거면 그나마 나았다.
맨체스터 아레나에서 열린 권제인의 단독 콘서트에서 테르포시코레, 에우테르페, 칼리오페가 강림해 춤만 추고 사라졌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세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제공하거나, 직접 힘을 사용해 개입하는 건 존재가 흔들릴 만큼 위험한 짓이었다.
‘궁금하지만 참아야 해. 용왕신님께서 무리하실지도 몰라!’
윤여랑은 용왕신을 만난 후, 상위 존재가 현세에 개입하는 사례에 관해 조사해 보았다.
그러자 플레이어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플레이어 네트워크’에 다음과 같은 정보가 도는 것을 확인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은광고에서 사건이 터졌을 때, 전단공덕불(旃檀功德佛)이 된 삼장법사, 금신나한(金身羅漢)이 된 사오정, 팔부천룡(八部天龍)이 된 백마가 기적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현세에 개입했다.
‘그분들은 광림으로 이어지거나 가호를 내린 인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현세에 개입했다고 했어. 그러는 바람에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했지.’
그들의 개입 이후, 그들을 신으로 섬기는 제단이 박살 나거나 동상에 금이 가는 현상이 벌어졌다.
상위 존재들이 정확히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세까지 그 여파가 미치는 걸 보면 신격이 뒤흔들릴 만큼 피해를 입은 게 분명했다.
제천대성이 복구 작업에 참가하는 등 손을 빌려주었지만, 상위 존재들은 아직도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으리라는 게 주요 의견이었다.
[너같이 착한 아이를 위험에 몰아가며 내 안위를 챙길 수는 없단다.]
윤여랑은 용왕신을 위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용왕신은 윤여랑을 위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순된 상황이 이어지다가 윤여랑이 용궁으로 향하는 날이 되었다.
[부디 몸조심하거라. 네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도록……. 네가 나의 무녀가 되기를 고대하고 있겠다.]
“네! 꼭 용왕신님의 무녀가 될게요!”
용왕신은 마치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
윤여랑은 밝게 대답하긴 했지만 어딘가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멀리 보내는 것처럼 말씀하셨지. 용궁에 가면 용왕신님과 더욱 가까운 곳에 가는 거 아닌가?’
이상한 일은 용궁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발생했다.
용족의 안내를 받아 중국에 있는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 자리에는 윤여랑을 제외하고도 세 명의 후보가 더 있었다.
윤여랑은 무녀 후보생들과 인사를 나누며 생각했다.
‘눈이 좋은 것 같아. 아, 저 언니는 귀가 밝으신가 보네! 하지만 저 사람은 용과 관련이 없어 보여.’
윤여랑이 봤을 때, 두 명의 무녀 후보생들은 용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남은 한 명은 평범해 보였다.
붙임성 있게 후보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용족과 대화를 나눴지만, 용과는 연이 없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자는 가짜 무녀 후보생이었다.
“아, 아아아악!”
입구에서 이능파가 발산되자 태연하게 서 있던 가짜 무녀 후보생이 비명을 질렀다.
윤여랑을 비롯한 진짜 무녀 후보생들을 보호하듯 감싸던 이능파가 칼날처럼 변해 가짜 무녀 후보생을 공격했다.
얇은 칼날처럼 변한 이능파는 가짜 무녀 후보생의 피부에 큰 상처를 남겼다.
마치 피부 위에 무수한 비늘을 그려둔 것 같았다.
“뒷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진짜 후보생들을 용궁으로 안내하라!”
혼란스러운 와중에 후보생들을 안내한 용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전이가 시작해 시야가 흔들렸다.
윤여랑을 제외한 무녀 후보생들은 전이의 충격을 견디느라 그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전이 과정에서 가벼운 어지러움증만 느낀 윤여랑은 일련의 과정을 목격했다.
‘가짜 무녀 후보생이라니…… 용왕신님이 말씀하신 진실과 관련이 있는 걸까?’
윤여랑이 품은 의문은 점점 더 깊어졌다.
용궁의 절경에 감탄하고, 흔들리는 물결 뒤에 서 있던 황룡을 보고 파랑황룡선(波浪黃龍扇)을 만들겠다며 들뜬 것도 잠깐.
윤여랑은 위화감을 느꼈다.
‘용궁은 용왕신님과 가장 가까운 곳이랬는데, 오히려 멀게 느껴져.’
용궁은 매우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설명을 듣고선 어쩌면 위치에 따라 용왕신을 가깝게 느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했다.
윤여랑은 용궁 구석구석을 돌아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와중에도 이상한 일은 계속 벌어졌다.
운룡이 무녀가 만들었다는 요리를 운반해 왔을 때였다.
‘이거, 못 먹겠어. 먹으면 안 돼.’
차려진 상을 본 순간 윤여랑의 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음식을 나른 운룡으로부터는 조금의 악의도 느껴지지 않는데, 손이 많이 갔을 정성 어린 요리에서는 끔찍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저것을 입에 담으면 용왕신이 더욱 멀어질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느낌이 들었다.
윤여랑을 제외한 후보생들도 음식에 손을 대는 데에 주저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전이로 인한 멀미 탓이라고 생각하는지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골라 몇 입 먹었지만, 윤여랑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시험이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윤여랑은 배가 고팠지만, 용왕신을 위해 참기로 했다.
용왕신은 더욱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윤여랑을 참게 만들었다.
다행히 적룡궁을 탐험하던 중, 외딴곳에 배치된 우물을 찾았다.
탐험의 결과 길을 잃고 말았지만, 윤여랑은 식수를 확보해 만족했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길 안내라면 해 드리겠습니다.”
신나게 물을 마시고 있자니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황룡의 상징인 황색의 면사를 쓴 용궁의 무녀였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던 윤여랑은 반갑게 무녀를 맞이했다.
“와, 진짜요? 그럼 탐험을 도와주세요!”
“……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제 방은 이미 실컷 둘러봤어요! 멋진 방이더라고요. 방 대신 적룡궁에서 돌아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아직 운룡 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라서…….”
그렇게 윤여랑의 적룡궁 탐험이 재개되었다.
후보생은 손님에 가까운 입장이었기에 무녀가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아무리 무녀가 눈치를 줘도 윤여랑이 탐험에 열중한 탓에 무녀는 실컷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윤여랑, 운룡, 용궁의 무녀 셋은 황룡이 준비한 축하의 연회 시작 전까지 적룡궁을 구석구석 탐험했다.
황린정에 도착하자 용궁의 무녀는 도망치듯 윤여랑으로부터 달아났지만, 그사이에 친해진 다른 무녀 후보생들과 어울려 연회를 즐겼다.
“여랑아,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손님들이 오셨어. 선물을 주셨으니까 같이 먹자.”
“손님이요? 아, 혹시 의신이 오빠…… 선배가 오신 건가요? 선물은 먹을 건가요? 양은 많나요?”
“응, 많이 받았으니까 며칠은 먹을 수 있을 거야.”
윤여랑의 얼굴이 확 폈다.
다행히 연회장에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음식이 있어서 배를 채울 수 있었는데, 선물까지 있다니.
식량 걱정을 덜어 윤여랑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적룡궁을 다 돌아봐도 용왕신님이 가깝게 느껴지는 장소가 없었어. 다른 궁도 돌아봐야 하는데 굶으면 힘들었겠지. 잘됐다.’
윤여랑에게 길 안내를 한 친절한 용궁의 무녀는 어쩐지 그녀를 지켜보는 게 임무인 듯하여 다음에도 길 안내를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본의 아니게 끌려다닌 용궁의 무녀가 알면 기함할 내용이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윤여랑은 계속 탐험을 할 작정이었다.
“귀한 손님을 맞아 용궁을 찾은 무녀들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한다. 현재 유황의 이름을 받은 무녀의 노래를 듣는 건 이게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나도, 손님들도 운이 좋군.”
황린정의 중심에 선 황룡의 목소리에 윤여랑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용왕신의 무녀가 어떤 자들인지 몹시 궁금했기에 기대가 되었다.
오색 채운 속에서 나타난 무녀들을 보고 윤여랑의 마음은 기대로 부풀었다.
윤여랑은 그들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용왕신에 관해 더 알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다.
윤여랑의 순수한 호의와 호기심에 그늘이 지기 시작한 건 그들의 노래가 시작되었을 때였다.
‘아름다운 노래야, 하지만…….’
용왕신을 위한 노래가 아닌 것 같았다.
저 노랫소리는 용왕신과 조금도 이어지지 않았다.
알 듯 말 듯 한 감각이 윤여랑을 괴롭혔다.
노래가 끝난 후에도 윤여랑의 고찰은 계속되었다.
“용왕신께서 저 노래를······?”
긴 고민 끝에 윤여랑이 결론을 내렸다.
용왕신의 무녀들은 용왕신을 향해 노래를 부른 게 아니었다.
그들은 용왕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