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54화 (754/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54)

95. 도룡지기 (8)

연회가 끝난 후, 청룡궁의 청주각.

용의 뿔을 의미하는 ‘주’가 붙은 곳답게 청주각은 청룡궁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창문을 열어 두면 심해와 용궁의 정경이 잘 보이는 명소였으나 모든 창문에는 청룡의 결계가 더해져 엄중히 봉인된 상태였다.

“황룡과 용제건이 청주각의 계단을 오르고 있군. 곧 도착할 것이다.”

결계를 쳤기에 기척이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청룡궁의 주인인 청룡은 누가 어딜 드나드는지 훤히 아는 듯했다.

현재 청룡궁에는 황룡, 용제건, 청룡까지 용이 셋 있었다.

청룡과 동행하여 이곳에 온 용족 다섯 명은 용왕신의 무녀를 감시하기 위해 백룡궁으로 향했으나 남은 용들이 다 청룡궁으로 왔다.

‘황룡의 성격이라면 바로 올 거라고 했지.’

청룡과 용제건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될 거면 처음부터 황룡을 청룡궁으로 부르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용제건의 개인적인 상담이 아니라 청룡궁에서 2차 회식을 하는 분위기가 되면 무녀들을 떨쳐 내기 어려울 것 같아 이런 번거로운 짓을 했다.

스르륵.

두 용이 우리가 있는 층에 도착하자 청룡이 문을 열었다.

“나 왔어.”

“늦은 시간에 미안하다.”

같은 용인데 반응이 참 달랐다.

용제건은 실실 웃으며 이쪽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고, 황룡은 경황이 없을 텐데도 미안해하고 있었다.

두 용이 안으로 들어오자 문이 닫히고 위에 결계가 더해졌다.

청룡이 결계를 완성하자 황룡이 말했다.

“나는 용제건과 용족의 은인을 믿는다. 하나 동시에 무녀들도 믿고 있다.”

황룡의 공평하고 공정한 성정은 플마고를 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플마고 속 윤여랑이 모함을 받아 용족과 무녀들이 그녀를 몰아세울 때에도 황룡은 끝까지 양쪽의 말을 모두 듣고 증거를 바탕으로 판단했다.

오랜 기간 황룡과 함께한 무녀의 배신이라는 충격적인 안건을 두고 있으니 더욱 신중하게 행동할 것이다.

“그러니 증거를 보여 다오.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싶구나.”

황룡이 이쪽을 곧게 보고 있었다.

황룡의 태도에는 의심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모든 판단을 보류하고, 사감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황룡과는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증거를 보여 주기 위해 광림을 쓸 수밖에 없어.’

황룡을 설득하지 못하면 수를 두기 어려워진다.

나는 곧바로 광림을 발동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해당 캐릭터의 광림, ‘제의(祭儀) 기구 소환’을 사용합니다.〉

플레이어의 궤적 대상자로 윤여랑을 택했다.

윤여랑의 광림으로 소환한 제의 기구는 일월청룡선(日月靑龍扇)과 파랑황룡선.

청룡과 황룡을 본 윤여랑이 둘을 모델로 고안해 낸 무선(巫扇)이었다.

“그들이 마련한 음식은 가져오셨나요?”

“운룡이 가져왔다.”

청룡궁에 대기 중이었다가 황룡의 명을 받고 이 자리에 온 운룡이 내 앞으로 왔다.

운룡이 손을 열심히 움직이자 구름에 폭 싸여 있던 상이 드러났다.

상 위에는 무녀들이 만든 연회용 음식과 청룡궁에 보낸 듯한 한과 등의 간식이 있었다.

전부 이쪽에서 손을 댄 음식은 없었고, 운룡이 계속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걸 증명하면 된다.’

나는 양손에 든 부채를 단숨에 펴 동시에 음식들을 향해 부쳤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벽사(辟邪)’를 사용합니다.〉

파앙! 팡!

무선의 끝에서 각각 반투명한 푸른 용과 황색 용이 나타나 음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을 꿰뚫어 통과한 두 용은 입에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청룡은 이미 이야기를 들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 신기해하다가 벽사 끝에 나타난 무언가를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실체는 불분명했지만, 용왕신의 무녀들이 다루는 오색 채운과 같은 빛깔이었다.

“아…….”

황룡이 작게 탄식했다.

벽사의 힘을 사용한 결과 무언가가 나타났다는 건 삿된 것이 깃들었다는 뜻이다.

그걸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탄식이 나온 것이다.

나는 삿된 것의 실체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한 번 더 스킬을 사용하기로 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진령(鎭靈)’을 사용합니다.〉

진령은 령(靈)을 달래서(鎭) 그 실체를 밝히는 스킬이었다.

즉, 무녀들이 음식에 심은 것의 정체를 드러내게 만들 수 있었다.

파앙!

나는 부채를 한 번 접었다가 편 후, 일월청룡선과 파랑황룡선의 잔상을 향해 크게 부쳤다.

그러자 두 용은 허공에 서리를 틀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용이 사라지자 삿된 것의 실체가 보였다.

그것은 유황색, 자색, 녹색, 벽색 그리고 홍색으로 빛나는 비늘이었다.

황룡은 탄식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그 비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리 알고 있었기에 충격이 덜한 건지, 청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용과 후예, 거기에 더해 무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힘까지 다루다니…… 용족의 은인은 과연 용족의 일원으로 부족함이 없구나.”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정말 충격이 별로 없었나 보다.

“청룡, 황호가 이 자리에서 발언할 수 있다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할 겁니다. 그리고 조의신은 용족의 은인이기 전에 호족의 은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물론 잊지 않았네. 용족과 호족이 동시에 은인을 받아들이는 건 어떤가.”

“어째서 조의신이 용족의 일원이 되어야 합니까? 저는 황호처럼 좋게 말 못 합니다. 여기가 용궁일지라도 말입니다.”

적호도 좀 이상했다.

헛소리를 할 틈이 있다면 황룡을 위로하는 게 낫지 않을까?

모두가 제각각의 이유로 불편해하는 가운데 용제건만이 기분 나쁠 정도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김신록이 용제건을 팔꿈치로 찌르려 했지만 얄밉게 피하고 더 즐겁게 웃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황룡이 입을 열 때까지 쓸데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보여 줘서 고맙다. 귀한 힘을 다루는구나.”

황룡이 말하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황룡은 진령으로 실체화시킨 비늘의 형상을 보며 물었다.

“용제건으로부터 용족의 은인은 이것을 이무기의 비늘이라 생각했다고 들었다. 어째서 이것을 생각한 것이더냐.”

저 비늘은 용의 것도, 뱀의 것도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는 이무기는 뱀도 용도 아닌 것으로 취급당할 때가 많으니 그것만으로도 유추해 낼 수는 있긴 하다.

하지만 비늘을 가진 존재는 그들 외에도 여럿 존재한다.

그러니 비늘의 형태만을 보고 바로 이무기라고 판단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저걸 보고 곧바로 이무기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비늘을 본 적이 있어요.”

“똑같은 비늘이라고?”

“네, 여기에 계신 분들 대부분이 그 비늘을 봤을 거예요.”

청주각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 비늘을 봤을 거라는 말을 들어도 바로 떠오르지 않는 건지 다들 기억을 더듬는 중인 것 같았다.

용제건이 제일 먼저 생각해 낸 것인지 싱긋 웃었다.

“보여 드리는 게 빠르겠네요.”

파앗!

나는 디바이스를 켜 어느 그림을 하나 보여 줬다.

홀로그램으로 전개된 그림을 본 김신록과 청룡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과연, 그랬군. 본 적이 있다.”

둘은 그림 속의 비늘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은 그 그림에 관해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알고 있나 보다.

황룡은 처음 보는 것인지 부드럽게 물었다.

“이 그림에 관해 설명해 주겠느냐?”

나는 흔쾌히 그 질문에 답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이무기의 귀천’이에요. 홍경복 화백과 그 제자인 민그린 화백 두 사람의 작품이죠.”

어제와 오늘, 식사하는 대신 진령 스킬로 비늘을 실체화시켰을 때.

나는 그 비늘이 ‘이무기의 귀천’ 속에 등장하는 이무기의 비늘과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폭에 담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기에 크기는 같지 않지만, 홀로그램으로 확대해 비율을 동일하게 한 결과 모양이 일치했다.

“이무기의 귀천은 어둠의 시대에 한반도에서 플레이어 협회의 한국 지부장이었던 분의 의뢰로 그린 거예요. 그분은 밑그림, 소재 등을 꼼꼼하게 주문했죠.”

이무기의 귀천은 옛 한국 지부장의 의뢰로 그려졌다.

그림의 완성은 민그린이 했지만, 옛 한국 지부장에 의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무기의 귀천을 그리게 된 계기에 관해 묻자 홍경복은 이렇게 답했다.

―친한 형님이 부탁하셨던 일이었지. 꼭 그리고 싶은 게 있다고 갑자기 나를 불러내더구나.

―이것저것 주문이 많았지. 밑그림에 들어갈 이무기의 몸체는 내 손가락을 기준으로 정확히 세 치여야 한다, 색을 입힐 때는 은주(銀朱)에 자화(紫花)를 섞어 손수 염료를 만들어야 한다…….

이 그림의 밑그림에는 옛 한국 지부장이 남긴 정보가 담겨 있는 셈이었다.

이무기의 귀천은 일종의 지도로, 한반도를 노린 진족이 숨기고자 했던 동결형 이계의 위치 정보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뛰어난 플레이어는 한 수로 여러 효과를 노리는 법이다.

옛 한국 지부장은 이 그림으로 여러 정보를 전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 그림의 의뢰주는 한반도를 노리고 있던 진족과 거래를 한 적이 있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죠.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이 그림이에요.”

내 말을 들은 황룡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무녀들이 한반도를 노리는 진족이라는 존재들과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있는 셈이군.”

내 생각대로라면 그렇다.

비늘의 형태는 상당히 독특한데도 그림 속의 이무기와 일치했으니까.

비늘에서 보이는 광택이나 결까지 온전히 일치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흡사했다.

“어둠의 시대라고 칭한 시기는 수십 년 전이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오랫동안 저 비늘을 삼킨 것이겠지.”

황룡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속마음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황룡이 아직 내가 들고 있는 부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힘을 나에게도 써 보겠느냐.”

나는 그 부탁을 받아들여 진령 스킬을 사용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진령(鎭靈)’을 사용합니다.〉

파앙!

부채를 크게 부쳤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방금처럼 비늘이 온전하게 실체화하는 대신, 가루처럼 무언가가 흩어질 뿐이었다.

최근에 먹은 음식들에 섞인 비늘 가루가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듯했다.

황룡은 흩어지는 가루들과 일월청룡선과 파랑황룡선의 잔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저 이무기의 비늘은 내 일부가 된 듯하구나.”

담담하게 말하던 황룡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떨렸다.

“저 이무기의 비늘은 범상한 것이 아니다. 저것에 잠식된 나의 감각을 믿을 수 없구나.”

황룡은 그를 저버린 무녀에 대한 원망을 말하지 않았다.

황룡의 목소리에서는 원망 대신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내 눈과 귀로는 용왕신을 가려내지 못할 것이다. 용왕신께 어찌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다.”

황룡은 그 말을 뱉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룡이 황룡의 어깨를 말없이 두드리자 조금씩 평정을 되찾았다.

황룡이 진정한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아직 사죄해야 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요.”

들고 있던 무선 두 개의 소환을 해제한 후, 황룡에게 제안했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