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62)
96. 오룡쟁주 (5)
자정을 앞둔 시각, 황룡궁.
황룡궁으로 향하는 길에는 김신록도 동행했다.
김신록은 용궁과 신의 세계가 이어지는 곳에 흥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를 황룡궁에 혼자 보낼 수 없다는 이유로 같이 움직이게 됐다.
‘지금은 황룡이 있긴 하지만, 상황을 아는 입장에선 미덥지 못하겠지.’
적호도 김신록이 동행하는 편이 좋겠다며 말을 얹을 정도였다.
호랑이들이 황룡을 불신하는 건 아니다.
오랜 기간 황룡의 주변에서 수작을 부린 무녀들을 믿지 못해서였기 때문이다.
‘무녀가 부릴 수작에 대비해 수를 두긴 했지만, 시간이 부족해. 황룡이 내 수를 얼마나 소화해 낼 수 있을지 미지수야. 최악의 상황을 항상 생각해 두는 게 안전해.’
황룡궁에 들어오자 용궁의 무녀 몇 명이 자연스레 황룡의 뒤를 따르려 했다.
황룡은 손을 내저으며 그들을 물렸다.
“손님을 직접 안내할 생각이다. 물러나 있도록.”
황룡의 말에 용궁의 무녀가 걸음을 멈췄다.
용궁의 무녀가 면사 뒤에서 황룡, 나 그리고 김신록을 차례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알겠나이다.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용궁의 무녀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흠잡을 곳 없는 모습이었지만,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한두 번은 핑계를 대면서 따라오겠노라고 할 것 같았는데. 너무 순순하게 물러났어.’
김신록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잠시 무표정으로 무녀들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황룡은 무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즈음 고개를 높이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왜 그러시죠?”
“불길한 느낌이 가까워졌구나.”
황룡에게 무녀의 배신에 관해 밝힌 후, 가끔 이렇게 천장을 보는 일이 늘었다.
황룡은 그때마다 용궁에 불길한 것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무녀들이 수를 둘 때가 가까워진 거야. 정월 초하룻날에 일을 벌이겠지.’
무녀들이 세 번째 시험을 막으려 들지는 않을까?
용궁에 온 이후 계속 불침번을 정해 대비했지만, 오늘은 자지 않고 대기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에는 지금 당장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왜 무녀의 시험이 정월 초하룻날에 치러지는지 아느냐?”
황룡이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황룡의 배려에 응할 겸 조금 생각해 보다가 답했다.
“무녀의 시험 과제 중에 용왕신의 알현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 관계가 있겠군요.”
“네 말대로다.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은 빠르게 치렀으나 세 번째 시험은 당기거나 미룰 수 없었단다.”
“그래서 자정에 가까운 시각에 이리로 온 건가요?”
“그렇다. 총명한 아이와 대화를 나누니 편하구나.”
무녀의 시험이 정월 초하룻날에 치러지는 이유는 지금 가는 곳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무녀의 시험 과제는 매번 조금씩 바뀌지만, 후보생들과 용왕신의 만남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이번 계승식의 세 번째 시험 과제는 ‘시’.
용왕신을 직접 만난 감상을 시로 풀어내는 것이다.
‘정월 초하룻날에는 용궁과 신의 세계가 이어지기 쉬운 거겠지.’
그래서 자정에 가까운 지금, 정월 초하룻날을 앞두고 있을 때 황룡이 이리로 안내한 것이다.
황룡은 평소 황룡궁 안에서 이동할 때 사용하던 넓은 복도 대신,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좁은 길로 향했다.
황룡이 다소 장난기가 섞인 말투로 말했다.
“자, 이리로 오거라. 저번에 후보생과 네가 탐험하러 왔을 때 찾지 못한 장소로 안내하마.”
“……알고 계셨어요?”
“내 궁에 귀한 손님이 왔다 갔는데 모를 리가 있겠는가.”
윤여랑의 용궁 탐험 코스에는 황룡궁도 포함되어 있었다.
황룡이 자리를 비웠을 때, 막내 무녀와 운룡을 데리고 정신없이 탐험했다.
황룡이 이를 두고 아무 말도 안 하기에 여러 일이 겹쳐 피곤해 알아차리지 못한 줄 알았다.
지금 말하는 걸 보니 그냥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것 같다.
‘내가 둔 수 덕에 용으로서의 감각이 돌아온 거면 다행이겠지.’
길고 좁은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황룡과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황룡은 나에게만 말을 거는 게 아니라 김신록에게도 말을 붙였다.
“둘이 자주 같이 움직이더구나. 혼자서 용궁을 돌아다니기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느냐?”
적호의 이동 범위는 제한되어 있고, 용족들은 할 일이 많았다.
용족 중에서는 그나마 용제건이 한가한 편이라 몇 번 같이 행동했으나 하고 싶은 게 많은지 혼자 잘 싸돌아다녔다.
그래서 김신록과 움직일 일이 많았다.
김신록과 단둘이 행동한 적은 많지 않아 처음엔 조금 어색했는데, 용궁에 오기 전 훈련을 하며 말을 좀 터서 그런지 지금은 어색함이 많이 가셨다.
김신록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황룡의 저 말을 듣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 게냐.”
“용궁을 위험한 곳 취급 하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용궁을 깎아내릴 의도는 없습니다.”
김신록이 고개를 숙이자 황룡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일으켰다.
황룡의 얼굴에 다정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용제건의 친구는 몹시 성실하구나. 농담을 이렇게 곧게 받아들여 솔직하게 말하면 용제건의 놀림감이 될 거다.”
“…….”
김신록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뭐라 말을 하지 않았다.
황룡이 좋은 조언을 하긴 했지만, 좀 많이 늦었다.
이미 몇천 년 동안 김신록은 용제건의 놀림감이 되었을 테니까.
황룡은 그 이후로는 농담으로도 김신록이 사과할 만한 화젯거리는 조금도 꺼내질 않았다.
나는 그 대화를 지켜보며 가끔 말을 거들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끼어들지는 않았다.
‘김신록은 자기를 아끼는 어른들과 대화를 좀 하는 게 좋겠지.’
이 기회에 김신록이 황룡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면 했다.
황룡을 비롯한 용족들은 용제건의 친구인 김신록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가.
하지만 김신록은 용족들의 호의가 불편한 건지 늘 도망치듯 자리를 비우거나 말을 아끼곤 했다.
‘풍경이 바뀌었어.’
좁은 복도를 빠져나가자 완전히 다른 경치가 펼쳐졌다.
순간 밖에 나왔다고 착각할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천정은 높고, 시선 끝에 벽이 겨우 들어올 만큼 탁 트여 있었다.
황룡궁을 상징하는 황색의 기둥은 위로 높이 뻗어 있었고, 기둥 장식의 일부에 청색, 흑색, 백색, 적색이 은은하게 빛났다.
‘여기가 용궁과 신계로 이어지는 길인가 보구나.’
좁다고 생각한 복도는 결계의 일부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리적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구조이니, 이능이 개입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황룡과 같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기 중에 흐르는 힘의 농도가 짙어졌다.
“으…….”
길을 얼마 나아갔을 때, 김신록이 비틀거렸다.
김신록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멈춰 섰다.
“괜찮느냐?”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구나. 지금 네게 신경 쓰지 않으면 네 아버지가 내 숨통을 조이려 들 거다.”
김신록은 한사코 괜찮다고 했지만, 무거운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저 증상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파수꾼이 상위 존재들을 만날 때와 같은 증상이다.’
윤회의 굴레에 갔을 때, 상위 존재의 회합에 파수꾼과 참석했을 때였다.
원형 회의장 중심에 서 있던 플루토는 선을 가리키며 그곳에 가까이 오라고 했다.
파수꾼은 선에 가까워질수록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파수꾼은 그때 상위 존재의 신격과 위압감에 짓눌렸어. 김신록도 그런 게 아닐까?’
황룡은 오랜 시간 황룡궁을 지키며 이 공기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김신록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이 공간에 무거운 힘이 흐르는 것은 느꼈지만, 딱히 저 정도로 압박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내가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라서 그런 걸까?’
의문을 품었지만, 이를 지금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얼마 안 있으면 자정이 될 테니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제안했다.
“이대로 걸어가면 되나요? 혼자 다녀올게요.”
“흐음…….”
황룡은 고민했다.
황룡 입장에선 김신록이나 나를 혼자 내버려 두는 건 꺼려질 거다.
하지만 멀쩡한 나보다 김신록 쪽이 더 걱정될 거다.
김신록은 이 공간에서 멀어지면 회복되겠지만, 지금 당장 몸이 안 좋은데 혼자 밖으로 나가라고 하기에도 뭣한 상황이었다.
황룡은 절충안을 제시했다.
“운룡을 붙여 주마. 나는 여기에서 제호와 기다리겠다.”
황룡이 손에서 구름을 불러내자 자고 있었던 것 같은 운룡이 눈을 끔뻑이며 일어났다.
황룡이 운룡에게 길 안내를 할 것을 지시하자 김신록이 저항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내게 거짓말을 할 생각이냐? 제호야, 자꾸 그러면 용제건이나 네 아버지를 부르겠다.”
황룡은 김신록을 제호라고 부르나?
김신록은 몇 번 저항했지만 용제건과 적호의 이름이 나오자 입을 다물었다.
일단 김신록의 정신 건강을 고려해 얼른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오거라.”
나는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휘청거리는 운룡과 함께 저편으로 향했다.
걸을수록 공기는 무거워지고, 오방색의 장식은 더욱 화려해졌다.
얼마 더 걸었을 때, 눈앞에 문이 보였다.
처음 용궁에 도착했을 때 본 것 같은 거대한 쌍여닫이 문이었다.
‘이 문이 그 경계인 걸까?’
나는 이 경계를 살펴보며 생각에 잠겼다.
문에서 느껴지는 힘, 문 주변의 상황 등을 고려해 이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관해 떠올려 봤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니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
〈스킬 ‘운명력’이 발동했습니다.〉
자정이 된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시스템 음이 들렸다.
동시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구름이 흘러나왔다.
구름은 세 가지 색을 띠고 있었다.
‘이 색은…….’
구름 사이로 거대한 용이 보였다.
눈을 가린 용들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나 있었다.
셋 모두 처음 보는 용들이었다.
‘저들은 용왕신이 아니야.’
지금 구름의 색으로 생각해 봤을 때, 저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저 셋은 승천한 용들이었다.
백룡, 적룡 그리고 흑룡이 눈앞에 있었다.
* * *
자정이 되기 직전, 용궁에 일어난 이변을 이르게 알아챈 존재가 있었다.
적룡궁에 머물던 무녀 후보생 중 하나, 윤여랑이었다.
용궁에 온 이후, 긴장하는 후보생들과 달리 항상 꿀잠을 자던 윤여랑이었으나 이상하게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용왕신님, 내일은 뵐 수 있으면 좋겠다.’
태평한 생각을 하며 잘 준비를 하려던 윤여랑이었지만,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윤여랑은 혼자 광림 연습이나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좀 늦게까지 눈을 뜨고 있기로 했다.
그러자 자정이 되고, 불길한 감각이 윤여랑을 지배했다.
윤여랑은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언니들, 일어나 있어요? 뭔가 이상해요!”
윤여랑이 다른 후보생들을 깨우자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다른 후보생 두 명도 잠을 이루지 못한 듯했다.
“저기 봐요!”
문밖으로 나온 윤여랑이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을 통해 보니 변화하는 용궁이 눈에 들어왔다.
황룡궁은 유황색으로.
청룡궁은 녹색으로.
흑룡궁은 벽색으로.
백룡궁은 자색으로.
그리고 그들이 머무는 적룡궁은 홍색으로.
용궁을 상징하는 오방색이, 무녀들을 상징하는 오간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용궁은 점점 무녀들의 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윤여랑은 아무 근거도 없이 이런 생각을 했다.
‘마치 용궁의 주인이 바뀌려 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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