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70화 (770/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70)

97. 용행호보 (1)

용제건이 김신록 같은 처지이고 김신록에게 상위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선택지가 있다면, 김신록은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

황룡의 말을 들은 후, 김신록은 짧은 시간 동안 긴 생각을 했다.

김신록이 수천 년 사는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웅족의 권속이 그들의 주변에 전이해 온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이어졌다.

“너는 저것들과 싸울 수 없지만, 나는 싸울 수 있다. 도망가거라.”

도망을 권하는 황룡의 말에 김신록이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봤다.

황룡이 억지로 끌어올린 이능파는 반딧불이 내는 빛보다 더 희미했다.

황룡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이 정도의 권속을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이렇게 많은 권속과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황룡은 이길 수 없다.

오래 산 용족이니 쉽게 죽지는 않겠지만, 무녀들의 손아귀에 떨어져 비참한 인질 신세가 될 건 불 보듯 뻔했다.

김신록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신은 싸울 만한 상태가 아닙니다.”

“도망칠 만한 상태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 혼자 도망가지는 않겠습니다. 돕겠습니다.”

“마치 너도 싸우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네가 싸워 봤자 인질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날 뿐이다.”

황룡은 적을 쓰러뜨리고 곧 따라가겠다는 상투적인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황룡은 붙잡힐 각오를 하고 있었다.

만약 아무 수도 없이 이 자리에 왔다면, 김신록은 결국 황룡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자신이 남아 봤자 황룡의 말대로 인질이 더 늘어날 뿐이니, 차라리 도움을 구하러 도망가 황룡을 원호할 방법을 찾는 게 이치에 맞는 선택이다.

하지만 김신록에게는 조의신으로부터 전수받은 비장의 수가 있었다.

“혼자서는 싸우지 못합니다.”

“네가 없어도 내가 어찌 싸울지는 변함이 없을 거란다.”

“저는 혼자서 싸울 수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김신록은 황망해하는 황룡에게 간략히 설명을 마친 후, 그의 반응을 지켜보는 대신 고개를 들었다.

시선 끝에 불투명한 수경이 있었다.

무녀들은 용제건에게 이곳의 상황을 보여 주되, 이쪽에선 용제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게 만들 생각인 듯했다.

김신록은 용제건의 속 긁는 꼴이 보이면 집중력이 떨어지니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용제건!”

김신록은 수경 너머로 전해질 만큼 용제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김신록은 지금쯤 용제건이 허튼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때처럼 쓸데없는 짓을 하려고 하겠지.’

용제건이 적호와 자신을 화해시키겠다며 수작을 부린 적이 있었다.

김신록은 용제건이 변덕을 부려 자신과 적호의 사이를 유희 거리로 삼았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간 용제건이 호족의 적이 되고, 적호에게는 폐를 끼친다는 생각에 김신록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김신록이 용제건과 연을 끊으려 하자 용제건은 그의 역린을 두 번 다시 건드리지 않겠다고 진지하게 맹세해 넘어갔다.

황룡의 말을 듣고 난 지금, 냉정히 사고해 보니 용제건이 그리 행동한 이유가 달리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되었다.

‘만약 내가 그 용의 입장이었다면, 가족끼리 화해시키기 위해서 뭐든 하려 하지 않았을까?’

입장이 반대였다면, 김신록은 친우에게 가족을 되찾아 주기 위해 뭐든 했을 것 같았다.

용제건은 정말 얄밉고 짓궂고 괴상한 용이고 지금까지 그가 한 미친 짓 대부분이 변덕스러운 유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중 몇 가지는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승천도 그러할지 모른다.

‘그 용이 승천하려는 이유가 그거라면…….’

김신록은 수경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번 용제건에게 말했다.

“용제건, 그 자리에서 보고 있어.”

‘승천하지 말고’라는 말은 생략하고 말을 마친 김신록이 이능파를 끌어올렸다.

웅족의 권속을 상대로는 이능파를 발산할 수 없기에 머릿속을 비우고, 상대를 향한 적의를 억눌러야 했다.

붉은 비단 같은 김신록의 이능파가 일렁이는 가운데, 번개가 번뜩였다.

곧 이능파는 광림을 통해 호랑이 형태의 실체를 갖추었다.

파아아아아!

김신록의 앞에 붉은 번개를 두른 호랑이, 뇌호가 나타났다.

그러나 뇌호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김신록이 만약 뇌호를 움직여 웅족의 권속을 노리려 든다면 광림은 순식간에 해제되고 말 것이다.

지금 뇌호는 전기를 두른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투둑, 두둑.

얼음 덩어리에서 벗어난 웅족의 권속들이 하나둘씩 물기를 뚝뚝 흘리며 땅에 발을 디뎠다.

이윽고 얼음 덩어리는 전부 녹아 웅족의 권속들이 모두 해방되었다.

해방된 웅족의 권속들은 슬금슬금 김신록과 황룡을 향해 접근했다.

[어머, 광림을 사용한 것 같은데요. 싸워야 하는 건가요?]

[그래 봤자 저 호랑이로는 아무것도 못 한답니다. 허수아비를 세워 두는 쪽이 마음은 편하겠지요.]

[추격전을 벌이면 자웅을 가르기 편할 텐데, 움직이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불편한데요.]

무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황색, 녹색, 벽색, 자색의 기운이 감도는 걸 보니 권속을 만든 건 웅족이나, 지금 저들을 부리는 건 무녀들인 듯했다.

그륵, 그르륵.

뇌호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웅족의 권속이 비웃듯 목을 울렸다.

그들이 견제하는 것은 오로지 다른 무녀들의 권속뿐이었다.

결정타를 먹인 쪽이 소원권을 얻으니, 오히려 처음 나서면 불리하다는 생각으로 뜸을 들였다.

무녀들은 여유를 부리는 척 황룡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황룡 님, 바닥에 무엇을…… 그건 마법진도 아니고, 당신에겐 마법진을 가동할 힘도 없을 텐데요.]

[유서를 쓰신 게 아닐까요?]

[저런, 황룡 님께는 아직 부탁드리고 싶은 게 많답니다. 바로 죽일 생각은 없어요.]

황룡은 바닥에 무언가를 펼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문양이 그려진 종이었다.

황룡은 무녀들의 비웃음을 듣고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녹, 벽, 자의 무녀들이 웃음을 터뜨릴 때, 유황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황룡 님을 먼저 노려라. 어서!]

[네? 하지만…….]

[유황 님, 저희는 후예를 먼저 노릴 거랍니다.]

유황이 다른 무녀들을 견제하는 거라 생각한 이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유황이 혀를 차며 자신에게 할당된 웅족의 권속을 움직였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다른 무녀들의 권속이 방해가 되어 바로 황룡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황룡은 아직 반신반의한 얼굴을 한 상태로 바닥에 펼쳐진 문양 위에 서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황룡 님.”

황룡은 김신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김신록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황룡은 그를 믿고 따르기로 했다.

얼마 남지 않은 황룡의 이능파는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깜빡거렸다.

흐릿한 황룡의 이능파가 문양을 따라 김신록을 향해 흘러갔다.

파아아아아!

그리고 황색의 이능파가 붉은 비단 같은 이능파에 닿는 순간, 뇌호가 눈부신 빛을 발하였다.

김신록의 최대 출력을 훨씬 뛰어넘는 힘의 이능파가 휘몰아쳤다.

황룡을 향해 달려들던 웅족의 권속이 그 힘의 여파에 내동댕이쳐졌으나, 힘의 중심에 서 있는 황룡은 꼿꼿이 서 있을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싸울 수 있다.’

조의신이 감춰 둔 비장의 수는 바로 이능파 링크였다.

조의신은 2학년 0반 학생들에 의해 발견된 이능파 링크 현상을 이용해 김신록에게 웅족과 싸울 힘을 주고자 했다.

조의신의 제안으로 시작한 훈련은 광림을 다루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조의신의 말에 의하면, 광림은 수단에 불과했다.

우선 김신록에게 광림 훈련을 시킨 후, 조의신은 이능파 링크를 연습하자고 제안하며 이렇게 말했다.

―후예는 이 세계에서 상당히 가혹한 조건을 타고났어요. 근원으로 이어졌다는 이유로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건 매우 불합리하죠.

보통 근원이 이어지면 진족들은 후예를 몹시 아끼고, 눈 밖에 나면 금방 죽어 버리니 잘 드러나지 않는 불합리함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신록은 씁쓸한 얼굴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흑막은 그런 후예들을 집요하게 노렸어요. 작년만 해도 김신록 선생님과 염준열 선배님은 여러 차례 노려졌죠.

그 자리에는 김신록 외에도 염준열이 있었다.

염준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의신의 말을 들었지만 청룡은 그 말을 들으며 흑막을 향해 크게 분개했다.

용제건은 그때 자리를 비웠지만, 아마 있었으면 웃으며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렇게까지 해서 후예를 억누르고, 다스려야 하는 이유를요. 그 이유 중 하나가 ‘이능파 링크’라고 생각해요.

조의신은 염준열이 성공한 이능파 링크의 사례에 관해 설명하며 말했다.

그 이능파 링크에는 후예, 진족, 인간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이능파 총량을 단순 합산한 것보다 강력한 힘이 발동되었다고 한다.

이능파 링크에 관해 듣던 황호가 말했다.

―나도 그 이능파 링크에 관심이 있어 청호의 제자끼리 시켜 보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넷 중 둘은 쌍둥이라 파장이 잘 맞는데도 말이다.

―촉룡 외할머니도 처음에 2학년 0반 아이들과 같이 하려다 실패했어.

인간끼리는 이능파 링크가 가능하나 진족과 진족, 진족과 인간은 이능파 링크가 되지 않는 듯했다.

조의신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족의 경우, 후예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때에는 이능파 링크가 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요.

조의신은 진족과 후예에 관한 간략한 고찰을 덧붙였다.

진족은 과거의 산물이고, 인간은 현재를 사는 존재다.

그리고 후예는 진족에서 비롯되었으나 인간의 방식으로 태어났다.

즉, 후예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존재로 이능파 링크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리고 근원의 존재를 불러낼 수 있는 광림을 가진 후예의 경우, 이 이능파 링크를 더욱 강력하게 발동시킬 수 있다.

―진족의 본래 형태를 소환하는 광림을 가진 후예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큰 상징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이능파 링크가 더욱 강력하게 발동하는 것 같습니다.

조의신의 예상대로 김신록은 이능파 링크에 성공했다.

황호, 백호, 적호와 모두 이능파 링크에 성공했다.

호족뿐만이 아니었다.

김신록은 청룡과의 이능파 링크에도 성공했다.

그리고 이능파 링크 중에는 근원이 이어진 존재, 호족과의 대련이 가능해졌다.

조의신은 이 모든 걸 예상한 것처럼 말했다.

―김신록 선생님, 용궁에 가면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행동하세요. 그렇게 하시면 설령 웅족이 공격해 와도 선생님도, 선생님의 동행자도 안전할 거예요.

그리고 조의신의 말대로 지금 김신록의 곁에는 황룡이 있었고, 김신록은 웅족의 권속에게 대항할 수 있었다.

지금 김신록은 뇌호를 움직여 웅족의 권속을 사냥할 수 있었다.

파지지직!

무녀의 색으로 물들던 용궁이 붉은 비단 같은 번개의 빛으로 뒤덮였다.

뇌호가 뿜은 붉은 번개는 쉬지 않고 웅족의 권속을 삼켰다.

젖어 있는 웅족의 권속들은 번개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버둥거리며 번개를 피하고, 무녀의 힘에 숨으려고 했지만 압도적인 번개의 출력 앞에서 웅족의 권속들은 도망갈 수 없었다.

뇌호가 ‘크르르르!’ 하고 목을 울릴 때마다 웅족의 권속들이 전의를 잃고 멈추다 번개에 삼켜지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모든 웅족의 권속들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 김신록은 무녀의 동요로 인해 일렁이는 수경을 곧게 응시했다.

김신록은 보이지는 않지만, 수경 저 너머에 있을 친우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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