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71화 (771/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71)

97. 용행호보 (2)

김신록의 뇌호가 발산한 붉은 번개는 멀리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무녀들은 수경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경악했다.

처음엔 직접 웅족의 권속을 부리던 무녀들은 자신들이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경에 비추어진 것들은 전부 실제로 벌어진 일들이었다.

붉은 번개도, 잿더미로 변한 권속도 전부 수경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부정하던 무녀들은 이능파로 이어진 권속의 소실을 느끼고 탄식과 비명을 지르기를 반복했다.

“저 아이가 어찌 웅족의 권속과 싸운단 말입니까!”

“저것들은 웅족의 권속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말이 안 됩니다.”

“소원을 이룰 기회였는데!”

용왕신의 무녀들이 히스테릭하게 소리 질렀다.

면사를 벗은 무녀들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얼굴에 돋은 비늘에서 우중충한 빛이 새어 나와 보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한 느낌을 주었다.

그럼에도 용궁의 무녀들은 그녀들이 용의 모습에 가까워졌다는 걸 부러워하며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유황이 가장 먼저 진정했다.

‘황룡 님은 저 아이를 진심으로 도망시키려 했다. 우리가 세운 계획은 무엇 하나 잘못되지 않았다. 일이 잘못된 건 황룡 님이 하신 무언가 때문이다.’

유황은 김신록이 번개를 부리기 전, 황룡이 무언가를 하는 것을 보았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황룡의 이능파가 김신록 쪽으로 흘러갈 때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결국 제때에 막지 못했고, 김신록과 그 옆에 있는 황룡을 인질로 삼는 길은 요원해졌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신록이 웅족의 권속을 상대로 싸울 수 있게 되었다지만, 그뿐 아닌가.

용궁에는 이무기신의 힘이 서려 있고, 용궁의 반이 오간색으로 물들었으며, 용족들 대부분이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손님들이라는 변수가 마음에 걸리긴 하나 아직 모든 게 끝나지는 않았다.

“정신 차리거라! 용궁은 우리의 손에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여의보주의 소원이 없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용이 될 수 있다.”

유황의 일갈에 무녀들의 동요가 가라앉았다.

유황은 용왕신의 무녀들 중 가장 용에 가깝게 변해 있었다.

동공의 형태도 가장 날카롭게 변하고, 비늘도 몹시 단단해 보였다.

유황의 모습을 응시한 이들이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아직 우리가 용이 될 길이 막힌 건 아니니 수선 부리지 말거라.”

“하지만 이대로 가면 인질로 삼을 아이가…….”

“인질을 잡으면 일이 수월해졌겠지. 그렇다고 해서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마라. 우리는 앞으로 긴 세월을 살 텐데, 작은 일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앞으로 긴 세월을 살 것이라는 확신 넘치는 말에 무녀들 사이에 다시 활기가 돌았다.

무녀들이 전의를 되찾은 걸 확인한 유황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저들이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의 앞길을 막는다면, 더 큰 힘으로 뛰어넘는 수밖에 없다.”

“더 큰 힘이라니…….”

유황은 이무기의 힘이 넘치는 진(陣)을 내려다보았다.

용왕신을 모셨을 때에는 신령한 기운이 넘치던 오색 채운이 지금은 불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무녀들이 아닌 이들이 보았다면 그 불길함에 학을 뗐겠지만, 불로불사로 나아갈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니 유황의 눈에는 그저 영롱하게 보였다.

유황은 양손을 허공을 향해 높이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무기신을 지금 이곳, 현세에 강림시켜 저들을 제거한다.”

유황의 선언에 무녀들이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지금 용궁에는 이무기의 힘이 널리 퍼져 있지만, 정작 이무기의 실체나 본신은 이곳에 없었다.

현재 이무기는 상위 존재에 몹시 가까워졌기에 현세와 신계의 틈 사이에 존재했다.

이를 무녀들의 힘으로 강림시키려 한다면, 상위 존재를 부를 때에 못지않을 만큼의 힘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부르는 데에 성공하면 이무기신은 주저하지 않고 무녀들의 편에 서서 힘을 휘둘러 줄 것이다.

무녀들은 유황의 선언을 두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았다.

‘강림 의식은 며칠은 앓아누울 만큼 힘을 소모해야 하겠지.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이대로 소원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아직 청룡궁 곳곳에 전이시킨 호랑이 덫이 남아 있지만, 후예가 웅족의 권속과도 싸울 수 있는 상황이야. 각오를 굳혀야 한다.’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니, 이 정도의 희생은 감안해야 해.’

벽의 무녀, 녹의 무녀, 자의 무녀가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쳤다.

그들은 하나같이 유황의 말에 감복한 척 목소리를 높였다.

“역시 유황 님이십니다. 쉽지 않은 강림 의식인 만큼, 성공하면 우리의 소원에 가까워지겠지요.”

“어쩌면 이무기신이 용왕신으로서 강림한 순간, 바로 여기에 있는 모두가 용이 되는 은혜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강림하지도 않은 이무기신의 영향력이 이 정도인데, 실제로 이곳에 오면 더욱 굉장할 거예요.”

용왕신의 무녀들이 저리 말하니 용궁의 무녀들도 안심했다.

이들이 서둘러 강림 의식을 준비할 때였다.

바삐 움직이는 무녀들 사이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무녀가 하나 있었다.

홍의 무녀였다.

“홍이야, 아직도 상태가 좋지 않느냐? 이번 강림 의식에는 반드시 네 힘을 보태야 한단다.”

유황이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홍의 무녀는 움찔 몸을 한 번 떨 뿐이었다.

홍의 무녀는 마치 이 자리의 공기에 짓눌린 것처럼 괴로워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유황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이무기신의 은혜를 받은 무녀들은 어느 때보다 힘이 넘치는데, 홍이는 이상하게 힘들어했다.

‘홍이는 의식에서 채운을 부리는 것을 하지 못했어. 그래서 벽이와 자가 대신해야 했지. 그리고 방금 웅족의 권속을 부릴 때에도 홍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홍의 행적을 떠올리던 유황의 의심과 의문이 점차 커졌다.

유황은 홍의 손등에 돋은 비늘이 다른 무녀들의 것에 비해 듬성듬성하고, 흐릿하고, 힘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유황이 이를 지켜보고 있는 사이, 홍의 손등에 돋아 있던 비늘이 툭 하고 떨어졌다.

“면사를 벗거라, 당장.”

유황이 차갑게 명령했다.

홍이가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자 녹의 무녀가 다가가 면사를 걷었다.

휙!

면사가 벗겨지자 홍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염준열과 동갑인 그녀는 제 나이보다 어리게 보였다.

면사 뒤에서 눈물을 쏟은 건지 눈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가 울었는가의 여부는 유황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홍이 여전히 인간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홍은 용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하기는커녕, 이무기의 힘에 짓눌려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너, 이무기신의 비늘을 먹지 않았구나.”

유황의 말이 끝나자 홍의 손등에 힘없이 매달려 있던 비늘이 완전히 떨어졌다.

처음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먹었을 때를 제외하고 먹지 않은 듯했다.

어쩌면 먹은 후에 계속 토해 냈을지 모른다.

“감히 우리와 이무기신을 배신해?”

홍이 유황의 말을 부정하지 않자 녹이 손을 높이 들어 올려 뺨을 때리려 했다.

그러나 손을 휘두르기 전, 유황이 끼어들어 이를 제지했다.

“녹아, 네 손을 더럽히지 말거라.”

“유황 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손을 더럽힐 뻔했어요.”

“눈에 띄지 않게 구석으로 끌고 가거라.”

유황은 부드럽게 말하긴 했으나 분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용궁의 무녀들에게 그녀를 끌어낼 것을 지시한 후, 유황이 홍에게 말했다.

“늘 그랬듯이 네가 스스로를 벌하렴. 우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네 뺨을 백 대 내려치거라.”

유황은 홍에게 스스로 체벌, 자해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없었다.

오히려 유황이 자비롭고 현명하다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무녀들이 있을 따름이었다.

기괴한 상황이지만 이들은 뭐가 잘못됐는지 몰랐다.

“충분히 벌을 준 후에 처분하는 게 좋겠지. 홍의 무녀 자리가 공석이 되겠구나.”

유황은 용궁의 무녀 중 최고참 무녀를 임시 후임으로 지목한 후, 강림 의식 준비를 속행하였다.

*    *    *

적룡궁.

막내 무녀와 무녀 후보생들은 변해 버린 구조 속에서 고전하긴 했으나, 위험한 일을 겪지 않고 순조롭게 전진했다.

처음에 막내 무녀는 황룡궁 방향으로 직진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는 윤여랑에 의해 각하되었다.

“언니, 그쪽으로 가면 안 될 것 같아요! 위험해요!”

막내 무녀는 하필 윤여랑 앞에 자신을 떨군 황룡을 아주 조금 원망했다.

왜냐고 물어도 윤여랑은 그냥 위험하다며 아우성을 쳤다.

막내 무녀는 답답해하면서도 윤여랑의 고집을 들어줬다.

억지로 끌고 가 봤자 시끄럽게 구는 바람에 미친 무녀들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지금 이곳에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긴 해. 그리고 쟤는 감이 좋아.’

억지로 용궁 탐험에 끌려다니면서 느낀 게 있었다.

윤여랑은 운이 좋은 건지, 감이 좋은 건지 몰라도 위험을 피하는 재주가 있었다.

용궁은 대체로 안전하지만 강한 힘을 품고 있는 탓에 위험한 장소도 있는데, 윤여랑은 그런 위험을 기가 막히게 회피하곤 했다.

무녀들이 심술을 부린 함정도, 자칫하면 심해로 내던져질 위험이 있는 긴급 탈출로도 윤여랑은 근처에서 구경은 해도 손을 대지는 않았다.

‘길치인 주제에 여태까지 큰일을 겪지 않은 것도 저 덕분일까? 위험 감지 스킬이 거의 만렙인 게 아닐까?’

막내 무녀의 예상대로 윤여랑은 높은 수준의 위험 감지 스킬을 지니고 있었다.

그 덕에 윤여랑은 길치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도 이계나 범죄에 당하는 일 없이 무사히 자라났다.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한 장소로 마구 전진해 버리기 때문에 더욱 헤매어 길치가 악화되는 단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이리로 가요. 여기는 좀 안전할 거 같아요!”

“우리 지금 한참 뛴 것 같은데…… 다리 아파.”

“이동하는 데에 이능파를 이렇게 소모한 건 처음이야.”

윤여랑은 서둘러야 한다며 일행들을 뛰게 만들었다.

그 덕에 이들은 단시간에 먼 거리를 이동했다.

용궁은 처음 보는 구조로 바뀌어 있었지만, 막내 무녀는 자신들이 용궁 어디쯤에 있는지는 대략 감을 잡고 있었다.

‘적룡궁에서 출발해 청룡궁 끝자락에 왔어. 용궁과 심해의 경계를 따라 이동하는 중인 것 같아.’

무녀들이 머무는 동안 이무기의 비늘에 가장 심하게 침식된 백룡궁, 의식을 진행한 힘의 중심 황룡궁, 웅족의 권속과 호랑이 덫이 깔린 황룡궁과 청룡궁 사이.

윤여랑은 그런 위험들을 피해 빙 돌아왔다.

‘쟤 감에 따르면 황룡 님과 손님들은 위험한 곳에 있는 게 되는데, 괜찮을까?’

막내 무녀는 안전한 길로 와서 개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위험한 길을 피하긴 했지만, 이대로 도망 다닌다고 해서 이 상황이 해결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파닥, 파닥.

까마귀의 형태를 한 이능파가 윤여랑을 향해 날아왔다.

막내 무녀는 잠시 경계했지만, 곧 실체를 알아봤다.

윤여랑이 은광고 선배라는 조의신을 불러낼 때 쓰던 아이템, ‘메시지 없는 전서구’의 효과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까마귀를 반갑게 맞이한 윤여랑이 말했다.

“의신이 오…… 선배님이 보낸 메시지예요. 저쪽에서 날아온 걸 보니, 저기에서 기다리시나 봐요!”

윤여랑이 가리킨 저쪽은 흑룡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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