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72)
97. 용행호보 (3)
윤여랑에게 메시지 없는 전서구 아이템을 사용한 후, 흑룡궁의 로비.
나는 윤여랑을 기다리는 동안 적룡, 백룡, 흑룡의 부탁을 들어줄 준비를 하기로 했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어. 서두르자.’
승천한 세 용은 내게 곧장 흑룡궁에 가라고 말했다.
채운이 힘을 발하기 힘든 흑룡궁이 그나마 안전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의견이었다.
실제로 다섯 궁 중에 흑룡궁이 제일 색이 덜 변했다.
흑룡궁에 벽의 무녀가 간섭한 건지 곰팡이가 핀 것처럼 푸르죽죽한 빛이 떠올랐지만, 아직까지 큰 티가 나지 않았다.
흑룡궁이 색의 성질상 영향을 덜 받았다면 반대로 백룡궁은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을까?
흰색은 물들기 쉽지 않은가.
‘무녀들이 백룡궁에 머물겠다고 한 건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기 쉬운 궁이었기 때문이겠지.’
각 용궁의 상황에 관해 생각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자니, 쓸데없는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세 용과 헤어지기 전, 그들은 자신들의 부탁을 들어준 대가로 내게 무언가를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저 셋은 내게 한 부탁 때문에 당분간 현세에 개입하긴 어려워질 테니, 상위 존재로서 선물을 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말을 잘 포장해서 전하고 사양했더니 세 용들은 오기가 생겼는지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럼 흑룡궁 가질래? 은인의 이능파는 검은색이잖아. 마침 잘됐네. 은인 전용 용궁으로 하자.]
황룡과 용제건은 기둥을 주네 마네 하더니 흑룡은 궁을 주겠다고 한다.
흑룡은 흑룡궁에 숨겨져 있다는 금은보화와 아이템들에 관해 줄줄 늘어놓았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흑룡은 가벼운 말투를 사용하는 것 등을 보아하니 기분파인 것 같은데 괜히 나까지 휩쓸리면 안 된다.
들뜬 흑룡을 상대로 적룡이 말했다.
[은인의 또 다른 이명이 무엇인지 모르나 보군.]
또 다른 이명?
표현을 들으니 무명의 초신성 말고 다른 걸 가리키는 것 같았다.
적룡이 불길한 소리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은인은 적벽괴도라고도 불린다. 이명에 붉을 적(赤)이 들어가니, 은인이 적룡궁을 받아 가는 게 도리 아니겠나.]
상위 존재도 ‘그 단어’를 알다니.
용족 사이에 내 정체가 퍼져서 자연스럽게 저들도 알게 된 걸까?
방심한 상태에서 상위 존재에게 들은 ‘그 단어’의 파급력에 온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적룡과 흑룡은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며 ‘그 단어’를 섞어 말하기 시작했다.
진짜 나를 은인 대접 하고 싶으면 그만 말했으면 좋겠다.
그나마 백룡은 조용히 있어 줘서 고마웠다.
백룡은 저 둘이 떠드는 걸 지켜보다가 내게 조용히 물었다.
[……백룡궁은 싫은가?]
백룡도 용궁을 떠넘기고 싶나 보다.
받는 것 자체가 좀 그런데, 백룡궁이 싫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내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백호군의 상징색이 흰색 아닌가!
결국, 나는 현세의 용궁 관리는 황룡이 맡고 있으니 답변하기 어렵다는 말로 둘러댔다.
[황룡도 우리의 뜻을 생각해 기꺼이 우리의 궁을 내줄 것이다. 걱정 말거라.]
적룡의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걱정이 되었다.
[잘해! 조심하고!]
[뒤를 부탁한다, 은인.]
흑룡과 백룡의 인사를 끝으로 운명력의 발동이 끝났다.
세 용과의 만남을 마치고 나오니 용궁의 구조는 크게 뒤바뀌어 있었으나 흑룡궁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게 찾았다.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용궁을 뒤섞어 놓긴 했지만, 어쨌든 북쪽에 흑룡궁이 있는 건 분명했으니까.
‘흑룡궁 내의 특정 시설을 지정했으면 더 헤맸겠지만, 어쨌든 흑룡궁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니까 어렵지 않았어.’
흑룡궁의 냉기 탓에 손이 좀 시리긴 하지만, 무녀들의 기습을 덜 경계해도 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준비를 마쳤을 때, 누군가가 청룡궁과 이어지는 통로 쪽에 있는 창문을 작게 두드렸다.
윤여랑이었다.
“저 왔어요!”
“쉿, 큰 소리 내면 안 돼.”
“맞아, 청룡궁 쪽에 에너미가 있었잖아.”
윤여랑이 활기차게 인사하자 다른 두 후보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윤여랑은 여전히 밝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괜찮을 것 같아요. 흑룡궁은 색도 덜 변했잖아요.”
윤여랑이 먼저 창문을 열고 훌쩍 흑룡궁 안으로 들어오고, 뒤를 이어 두 후보생이 서로 도우며 넘어왔다.
윤여랑은 이 상황에 궁금한 게 많은지 내 쪽으로 달려와서 재잘재잘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계세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됐어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 지금은 나 혼자야.”
‘나 혼자’라는 말에 막 흑룡궁 안에 들어온 두 후보생의 얼굴이 흐려졌다.
나는 10대 고등학생이어서 용족이나 호족보다는 믿음이 덜 갈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두 후보생에 뒤이어 흑룡궁 안으로 무녀가 한 명 들어왔다.
면사를 쓰고 있긴 했지만, 실루엣으로 판별했을 때 윤여랑과 함께 다니던 막내 무녀로 추정이 되었다.
‘저 무녀는 배신자일 가능성이 적어.’
윤여랑의 탐험에 어울리며 막내 무녀를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의욕이 없는 막내 무녀의 태도에 처음엔 조금 의심을 품었으나, 점점 의심이 옅어졌다.
만약 막내 무녀가 윤여랑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다가 배신할 역할을 맡았다면 좀 더 살가운 척 굴었을 것이다.
윤여랑이 언니라고 부르면서 친하게 지내려 해도 막내 무녀는 성의 없이 ‘네에네에’ 하며 거리를 두었다.
그래도 배신자일 가능성이 적은 것과 0인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쩐지 ‘하세요’라는 부분을 작게 발음한 것 같은데.
막내라곤 해도 저 무녀는 성인일 테니 반말을 하든 말든 상관은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안건이 있었다.
“가까이 오시기 전에 면사를 벗어 주셨으면 합니다.”
세 용은 배신자를 구분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바로 면사 밑의 얼굴을 보는 것.
이무기의 비늘을 오래도록 먹었다면 눈과 피부에 변화가 일어났을 거라고 한다.
“갑자기 왜…….”
“네? 그렇지만, 무녀의 면사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들었어요.”
막내 무녀보다 후보생들이 더 동요했다.
이쪽에서 마찰이 일어날까 봐 걱정하나 보다.
“손님도 알고 있나 보네……요. 손님이 요청한 거니까 벗어도 용왕신께서 괜찮다고 하겠지……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래.”
막내 무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놓고, 그동안 쓰고 다니는 게 답답했던 건지 흔쾌히 면사를 휙 걷어서 바닥에 던져 버렸다.
‘알고 있나’라는 표현을 쓰는 걸 보니 막내 무녀는 다른 무녀들 얼굴이 변한 걸 본 것 같았다.
면사 밑에서 드러난 막내 무녀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에 대중교통을 타면 볼 수 있을 것 같은 흔하고 지친 인상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는 비늘 하나 없었고, 눈도 정상이었다.
“용궁엔 지금 위험한 게 많으니까, 의신이 오…… 선배님은 위험에 관해 확인하려 했나 봐요!”
“편하게 불러.”
“아, 네. 의신이 오빠!”
윤여랑도 기다렸다는 듯이 선배 소리를 그만두었다.
막내 무녀와 윤여랑은 상극인 것처럼 보여도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확인하고 싶은 건 확인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건 무녀 후보생 셋, 용궁의 무녀 하나 그리고 나.’
여기 있는 다섯 명 모두 다친 곳 하나 없었다.
윤여랑이 다른 후보생들과 동행하는 한, 큰 위험은 없을 거라고 판단했으나 무녀들이 일을 크게 벌려서 그들이 다치거나 이능파를 크게 소모했을 경우도 생각했었다.
그렇게 되면 나 혼자서 의식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잘됐다.
“여기 있는 분들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나는 손바닥을 펴 네 명에게 보여 줬다.
손 위에 있는 것을 본 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용의 비늘이다!”
“와, 용의 기운이 엄청나게 느껴져요!”
“적룡 님, 백룡 님, 흑룡 님의 비늘이네.”
막내 무녀가 비늘의 정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막내라고는 해도 유일하게 정상인 용궁의 무녀이니 실력이 남다른 듯하다.
“네, 지금부터 이 비늘을 이용해서…….”
쩌적, 쩌저적……!
내가 말을 마치기 전, 멀리서 무언가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쿠우웅!’ 하는 폭음과 함께 예사롭지 않은 압박감이 전신을 짓누르려 들었다.
윤여랑을 제외한 후보생 둘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벌벌 떨 정도였다.
“용궁의 결계가 흔들리고 있어. 그것들이 뭘 하려나 봐.”
막내 무녀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막내 무녀는 통찰계 이능을 발동했는지 눈 쪽에 이능파가 감돌았다.
이능을 통해 균열음의 근원을 살피는 듯했다.
막내 무녀의 표정이 심각해지고, 윤여랑도 큰 위험을 느꼈는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승천하신 세 용의 힘을 빌려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용궁의 결계가 파괴될 거야.”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어딜 가도 위험할 것 같아요.”
윤여랑이 용궁 시나리오에서 사망하기 직전에 했던 것과 비슷한 대사를 했다.
윤여랑은 뛰어난 위기 회피 능력으로 암살 위험을 몇 번 피했으나 결국에는 죽고 말았다.
알고 있어도 피하기 어려울 만큼 무녀들이 잔혹한 수를 두었고, 윤여랑에게 피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무녀들이 꾸미는 짓은 용궁의 결계를 위협하는 행위인가 보다.
‘용궁에 무슨 일이 발생해도 본인들은 이무기신의 힘으로 살아남겠다는 계산인가.’
그래도 괜찮을 거다.
용궁의 결계를 뒤흔들 가능성도 생각했으니까.
무슨 의도로, 무슨 방법으로 결계를 흔들고 있는 중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노림수를 짐작했기에 대책을 세워 뒀다.
“결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윤여랑이 조금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수를 믿고 적룡, 흑룡, 백룡이 한 부탁에 관해 설명했다.
* * *
황룡궁과 청룡궁 사이.
청룡궁으로부터 붉은 그림자가 뛰쳐나왔다.
청룡을 둘러메고 있는 적호였다.
적호는 새까만 잿더미 가운데 뇌호와 함께 서 있는 김신록을 발견했다.
“아들아! 무사하느냐!”
마침 무녀들이 힘을 거두었는지 수경이 형체를 잃고 사라졌기에 김신록이 눈을 떼고 적호를 돌아봤다.
김신록은 적호가 무사한 것을 보고 크게 티를 내지 않고 안도했다.
‘저는 무사합니다.’라고 덤덤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김신록의 의지를 무시하고 뇌호가 적호를 향해 내달렸다.
번개의 잔상을 남기고 이동한 뇌호는 적호가 어디 다친 데가 없는지 기웃기웃 살펴보며 끙끙거리고, 적호는 그런 뇌호를 몹시 기특하게 여겼다.
“부자 간의 사이가 좋구나.”
그 광경을 본 황룡이 그리 말하자 김신록은 얼굴이 타들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사이에 뇌호는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듯 재만 남은 웅족의 권속과 적호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적호는 뇌호의 의도를 곧바로 파악하고 칭찬을 퍼부었다.
“흔적을 보니 숫자가 적지 않았을 텐데, 이를 단숨에 쓰러뜨렸다니! 아직 힘을 파악한 지 시간이 크게 흐르지 않았거늘, 정말 대단하구나.”
적호는 감격에 차 뇌호를 쓰다듬었고, 그 바람에 둘러멘 청룡이 떨어질 뻔했다.
청룡은 이동하는 중에 그럭저럭 회복한 건지 적호에게 내려 달라고 청하고, 비틀거리며 홀로 섰다.
“신세를 졌네, 적호.”
“그러게 말입니다. 그것보다 이 주변을 보십시오. 겁도 없이 덤빈 웅족의 쓰레기와 청룡궁에 깔린 호랑이 덫을 치우는 데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제 아들이 활약하는 걸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적호는 이동 중에 싸우느라 시간을 낭비한 게 불만인 듯, 청룡에게 불평인지 자랑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때였다.
황룡궁을 중심으로 불길한 기운이 용궁 전체로 퍼지고, 심해와 용궁 사이에 있는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적……!
지금 무녀의 수작으로 용궁의 결계가 무너지려 했다.
황룡은 수천 년을 지켜 온 용궁에 닥친 위협에 눈을 떼지 못했다.
황룡은 믿을 수 없어 하며 결계를 응시하다가 슬프게 탄식했다.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그 목소리를 들으니 김신록은 덩달아 슬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김신록은 황룡을 위해 뭔가 해 주고 싶었지만, 저건 이능파 링크로 뇌호를 부린다고 해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좌절한 건 아니었다.
아직 조의신의 수가 있었다.
‘설마 조의신의 그 수까지 써야 하는 순간이 오다니.’
황룡도 그 수에 관해서 알고 있었는지, 적호 쪽을, 정확히는 적호의 뒤를 응시하며 말했다.
“눈에 띄지 않는 손님께 부탁을 드릴 때가 왔구나.”
황룡의 말에 용궁을 찾은 호족 중, 눈에 띄지 않는 손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적호, 적연을 해제해도 좋다.”
적호는 그 말을 듣고 적연을 해제했다.
붉은 안개가 흩어지자 10대 모습을 한 황호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