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76화 (776/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76)

97. 용행호보 (7)

용들의 인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이 정도로 인사를 받을 일은 하지 않았다고 바로 사양했어야 했는데, 늦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번에 내가 한 일은 거의 없지 않나?’

지상에서 붉은 사자 팀 빌딩의 습격을 저지한 건 황지호와 염방열이다.

용궁에서 일어난 일들 대부분 내가 나설 필요 없이 해결되었다.

윤여랑은 무녀들의 방해 속에서 좋은 시험 결과를 냈다.

황룡은 용궁이 반쯤 잠식당한 상황에서도 구조를 바꾸었고 이후 청룡과 함께 괴물을 쓰러뜨렸다.

‘황지호가 결계술을 발동시킨 걸 보면 김신록이 인질로 잡히지 않았어. 김신록이 이능파 링크에 성공해 흑막의 수를 받아친 거겠지.’

용궁의 결계를 지킨 건 황지호고, 황지호를 흑막과 무녀의 눈으로부터 숨긴 건 적호다.

그리고 용제건은…… 무녀들을 약 올린 것 외에는 딱히 한 게 없긴 하다.

‘그래도 용제건이 준 흑진주 덕에 무사했어.’

괴물을 막을 때 사용한 흑진주는 용제건, 황룡에게 받은 거고 황룡에게 건넨 비늘은 용왕신이 준 거다.

적룡, 백룡, 흑룡이 비늘을 내어 주어 용왕신 강림 의식을 돕기도 했다.

결국 나는 용왕신 강림 의식에 참가한 다섯 명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도 깊게 파고들면 플마고 속 윤여랑의 힘을 빌렸으니 순수하게 내가 한 건 거의 없는 셈이다.

이런 내 생각이 반영된 사양의 말을 뒤늦게 전했지만,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가렸지만, 은인을 가릴 눈을 가지고 있다. 네가 없었다면 네가 말한 이들 중 누구도 그 역할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용왕신은 지나치게 사람을 쉽게 믿고 정을 주는 것 같다.

그러니 배신한 무녀들이 그 점을 파고들어 이 꼴이 난 게 아닐까?

신랄한 생각이 치밀어 올랐지만,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용들은 계속 대화를 주고받았다.

[용족의 은인이 겸손하여 감사를 전하기 어렵도다.]

“감사의 마음을 담은 선물을 전부 우리를 위해 써서 답례가 어렵습니다. 안 그런가, 황룡?”

“네 말대로다, 청룡. 용족의 은인은 저것과 싸울 때 흑진주를 썼나 보군. 이번엔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딱히 여태까지 받은 걸 다 용족을 위해 쓴 건 아닌데.

전에 받은 염준열의 홍룡 굿즈는 잘 보관해 뒀다.

그 점을 들어 용족에게 받은 걸 딱히 전부 쓴 게 아니라고 어필했다.

“염준열 선배님께서 주신 선물이 많이 남아 있어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어도 용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웃기만 할 뿐이었다.

오히려 ‘우리 준열이의 선물을 소중히 다루어 주어 고맙구나.’, ‘또 선물을 받아 주면 준열이가 더욱 기뻐할 거다.’라는 등 선물을 더 얹어 주겠다는 말이 추가되었다.

용왕신은 그 짧은 사이에 백룡을 만나고 온 건지 농담처럼 들리는 소리를 했다.

[백룡으로부터 들었다. 백룡, 적룡, 흑룡은 자신들의 궁을 주고 싶어 하더구나.]

“흠, 저와 황룡은 승천하지 않아 궁의 주인을 바꾸는 절차가 까다롭습니다. 대신 청룡궁 안에 은인의 이름을 딴 전각을 하나 짓는 건 어떻습니까?”

“황룡궁을 다시 꾸미고 싶던 참입니다. 용왕신께서 허락하시면, 황운호가 잘 보이는 곳에 은인을 위한 누각을 하나 더 짓고자 합니다.”

용들이 나를 두고 허무맹랑하지만 묘하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말만 들으면 용궁의 반 이상을 넘길 생각인 듯했다.

저들은 용궁 그 자체는 물론, 그 안에 있는 재화와 용궁에서 발생하는 부산물 등등의 권리를 이전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으면 반박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몸이 용궁의 결계를 손보는 동안 고얀 짓을 꾸미고 있었군. 호족의 은인에게 불필요한 것들을 떠넘기지 마라.”

황지호의 목소리가 반갑게 들렸다.

황지호는 막 힘을 거둔 건지 머리카락과 눈에서 황금빛이 막 사라지고 있었다.

“황호의 말대로입니다. 당연히 호족의 은인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그에 걸맞은 답례가 필요할 겁니다. 줄 거면 더 쓸 만한 걸 내놓으십시오.”

황지호 옆에는 적호도 있었다.

황지호와 적호는 심드렁한 낯빛을 하고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여전히 용왕신이 강림한 상태였으나, 저들은 상위 존재의 압박감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김신록도 무사하구나. 그래도 이쪽으로는 못 올 것 같네.’

황지호와 적호가 온 방향을 보니 김신록이 보였다.

다른 호랑이들과 달리 김신록은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두 호랑이가 용왕신 근처에 가지 말라고 미리 말해 둔 것 같았다.

황지호와 적호가 용왕신의 지척까지 다가오자 용왕신이 말을 걸었다.

[호족의 협력에 감사한다. 용족이 아닌 진족을 가까이에서 보는 건 몹시 오랜만이구나.]

“호족의 은인인 조의신의 부탁을 들어주고, 용족과의 동맹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그리고 소싯적에 천신을 몇 번이나 근광(覲光)하였으니 이 정도는 문제없다.”

상위 존재를 자주 만나면 존재감에 익숙해지나 보다.

윤여랑 역시 꿈에서 용왕신을 자주 만난 덕에 이번에도 잘 버틸 수 있긴 했다.

“황호, 용왕신께서 용족의 은인에게 용궁을 하사하려 하니, 양해 부탁하네.”

“호족의 은인과 관련된 일로 무슨 양해를 구하려 하는가?”

“용족의 은인이 우리의 영역과 용궁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하.”

청룡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황지호가 혀를 찼다.

괴물을 쓰러뜨려 용궁에 평화가 찾아온 좋은 순간인데, 이상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상황을 보니 이대로 보면 황지호가 용족의 과도한 선물 세례를 막아 줄 것 같으니 내버려 두기로 했다.

황지호는 그 양해인지 뭔지를 할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표현했다.

“용족이 모시는 상위 존재로서 용왕신을 존중하나 내가 따르는 상위 존재는 천신뿐이다. 용왕신이 아닌 다른 상위 존재가 나타나도 내 입장은 변함이 없다.”

“꼬우면 황호 자네도 천신을 강림시키게나.”

“용왕신을 강림시킨 게 호족의 은인이라는 걸 잊었나? 그런데 마치 적호처럼 말하는군. 청룡, 적호와 친해진 탓에 사고 회로가 닮게 된 건가.”

“친하지 않습니다. 용궁이고 나발이고 저는 조의신을 넘길 생각이 없습니다.”

대화 내용의 괴상함은 둘째치고, 용궁에 머무는 일주일간 청룡과 적호가 꽤 친해지긴 했다.

어쨌든 호랑이들이 호전적으로 대화에 끼어들자 용궁을 주네 마네 하는 화제가 좀 사그라들었다.

호랑이와 용이 나누는 대화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라 머리에 담아 두지 않고 대신 다른 중요한 생각을 했다.

나는 적당한 기회를 노려 발언했다.

“무녀들의 위치는 파악하셨나요?”

내 말에 용왕신이 답변하고 황지호가 헛소리를 덧붙였다.

[용족의 은인은 현명하고 사려 깊구나.]

“호족의 은인은 본인 일을 제외한 것들에 있어 늘 현명하고 사려 깊다.”

용왕신은 아직 이 자리에 남아 있었다.

신의 세계에 가깝다는 용궁의 특성상, 용왕신은 강림으로 인한 페널티를 덜 받는 듯했다.

용왕신이 독단적으로 행한 강림이 아니라 정식 의식을 치른 강림이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운룡을 보내 확인하던 참이었다.”

황룡은 힘을 회복한 후, 곧바로 운룡을 움직여 무녀를 잡을 준비를 한 듯했다.

무녀들은 괴물에게 힘을 빨려 대부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황룡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무녀들이 지금 무사히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번거롭게 발걸음을 옮길 필요는 없다. 이쪽으로 끌어내마.”

쿠구구구구구!

황룡이 황룡궁을 재구성하였다.

황색의 구름이 걷히자 경계심 어린 표정을 한 운룡 여럿이 떠 있는 게 보였다.

운룡 밑에는 지하 깊숙이 처박아 두었던 무녀들이 쓰러져 있었다.

무녀들은 모두 면사를 벗고 있어 민낯이 드러나 있었다.

그 얼굴에는 막 생긴 것 같은 화상 자국이 가득했다.

‘저게 무슨 자국이지? 탄 흔적을 보면 비늘과 비슷해.’

괴물이 불탄 여파로 이무기의 비늘이 돋은 무녀들도 불탄 건가 보다.

그리고 화상 자국뿐만이 아니었다.

무녀들은 생기를 빨린 탓에 한 번에 나이를 먹은 것처럼 폭삭 늙어 버렸다.

면사를 쓰고 있어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손을 확인할 기회가 있어 비교할 수 있었다.

전에 본 무녀들의 손은 주름 없이 매끈했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특히 복장으로 구분해 봤을 때, 용왕신의 무녀였던 이들의 상태가 특히 심각했다.

이무기에 가까웠던 자들은 더욱 큰 피해를 입었다.

‘머릿수가 모자라.’

무녀를 살피던 중,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스무 명이 넘는 무녀들이 고통에 찬 얼굴로 뒤얽혀 있어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무녀가 보이지 않았다.

“도망친 무녀가 있구나.”

황룡도 이를 알아채고 말했다.

이 자리에 없는 무녀들이 있었다.

바로 유황과 홍이었다.

둘의 부재를 확인한 황룡이 말했다.

“이것조차 용족의 은인이 한 말대로 되었구나.”

*    *    *

홍의 무녀가 이무기의 비늘을 먹지 않은 것이 들통나 밖으로 끌려갔을 때.

홍의 무녀의 양팔을 잡고 거칠게 끌어내는 이들은 그녀를 증오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우리가 저 입장이었다면 절대 유황 님을 실망시키지 않았을 텐데.”

“홍의 무녀가 공석이 되면 또 저희에게 기회가 오겠지요? 이대로 최고참 무녀님이 그 자리를 차지하진 않겠지요?”

날카로운 말이 쏟아졌지만, 홍의 무녀는 몸과 마음이 갑자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무기를 부르는 의식의 장소에서 멀어진 덕이었다.

다른 무녀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끌려 나왔을 때, 홍의 무녀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으…….”

충격에 신음하는 홍의 무녀를 향해 다른 무녀들이 차갑게 말했다.

“자, 어서 무녀님들께 감사 인사를 올리고, 뺨을 치거라.”

홍의 무녀는 벌벌 떨며 뺨을 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설움과 함께 다정했던 용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살갑게 대하던 염준열, 염준열과 친하게 지내 줘서 고맙다며 잘 대해 준 용족들, 웃을 수 있는 정도의 장난을 치던 용제건, 언제나 상냥한 황룡까지.

‘내가 그때 무녀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계승식에서 시험을 치를 때, 유황이 살갑게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다.

‘무녀가 되고 싶니?’라고.

홍의 무녀가 그 말에 긍정한 순간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홍의 무녀로 선정되어 기뻐한 것도 잠깐, 유황은 그녀가 부정한 과정을 거쳐 선정되었음을 알렸다.

유황은 그녀가 욕심을 부렸기에 정당한 후보자가 떨어졌고, 부족한 자가 무녀가 된 바람에 용족의 안위가 위험하다고 했다.

홍의 무녀는 그렇게까지 해서 무녀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무녀가 되고 싶냐는 유황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것도 사실이었다.

홍의 무녀가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무녀들의 꼭두각시가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용족분들이 무사하고, 동시에 다른 무녀분들이 불로장생을 얻으면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녀들은 교활하게도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없음을 홍의 무녀에게 알리지 않았다.

무녀들이 무서운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너무나도 늦은 후였다.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갑자기 한밤중에 불려 나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의식이 시작되었다.

의식이 용궁을 전복하기 위함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이무기의 기운이 용궁을 삼켰을 때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아직 용족분들이 무사하다면…….’

아주 많이 늦었지만, 홍의 무녀는 지금을 놓치면 영영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홍의 무녀는 마지막 용기를 짜냈다.

휙!

홍의 무녀는 제 뺨을 내리치는 대신 땅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감시하던 용궁의 무녀들이 뭐라 소리를 질렀지만, 듣지 않고 앞으로 뛰었다.

황룡궁은 처음 보는 구조로 변해 있어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달린 결과 무녀들의 추격은 뿌리쳤다.

어차피 이무기가 용궁을 완전히 삼키면 추격을 해도 안 해도 의미 없다고 판단하고 쉽게 포기한 듯했다.

하지만 홍의 무녀는 출구에 도달하지 못했고, 어떤 용도 만나지 못했다.

‘용왕신이시여, 제발 듣고 계시다면 답해 주세요!’

홍의 무녀는 자신이 정당한 과정으로 뽑힌 용왕신의 무녀가 아니란 걸 깨달은 이후로 한 번도 용왕신을 부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 기댈 곳은 용왕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애타게 불러 보았지만 용왕신의 기운은 용궁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홍의 무녀가 닿지 않는 기도를 올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였다.

파아아아…….

갑자기 용궁에 온기가 넘쳐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왕신이 어느 때보다 아주 가까이 느껴졌다.

용왕신이 용궁에 강림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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